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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잃어도 모든 것을 잃지는 않는 사회로!

<질병과 함께 춤을>① 아픈 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흔한 사회다. 이는 아픈 몸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말이다. 그럼에도 ‘덕담’으로 회자된다. 이런 사회에서 아픈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혼돈의 세계에 던져진다는 의미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불안, 아픈 몸에 대한 사회의 무지, 정상성에서 빗겨난 몸으로 사회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아픈 몸들은 건강 중심 사회에서, 이러한 질병 세계의 경험을 표현할 언어도 없이, 모호하게 살아간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하고 싶지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 보니, 자주 침묵으로 미끄러진다. 침묵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기도 한다.


아픈 몸은 낯선 세계에서 새롭게 언어를 배워야 한다. <질병과 함께 춤을> 연극 원크숍 중에서. (촬영: 혜영)


건강 중심 사회에서 ‘여기, 아픈 몸이 있다’


나도 그랬다. 2009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 오랫동안 어둡고 눅눅한 터널에 갇혀 사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몸이 아프니까 당연히 삶이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질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잘 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자책감과 아픈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마음 한쪽을 늘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라는 식의 건강 중심 세계의 말들로 인해, 내 안에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무수히 쌓이고 있었다. 결국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픈 몸 때문이 아니라, 건강 중심 세계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 깨달음을 구체화하고, 말하기를 시작하는 과정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가 있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나는 <반다의 질병관통기>라는 제목의 연재를 했다. 질병 경험을 토대로 아픈 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문화를 성찰해보는 내용이었다. 우리 사회에 아픈 몸이 이토록 많지만 모두 ‘건강한 몸의 시선’에서 아픈 몸을 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아픈 몸들이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정하고, 좌절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건강과 의료뿐 아니라 질병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자 했고, 입체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여성, 장애, 국제연대 운동 경험 위에서 질병을 바라보았다. 질병을 관통하는 젠더, 장애, 계급, 정상성 등을 교차적이고 포괄적으로 보며, 질병 세계 언어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내가 아픈 몸으로 우울과 혼돈 속에서 살면서, 길을 잃지 않고 질병 세계의 언어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말을 경청해 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아픈 몸이 있다’고 쏘아 올린 신호탄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해 준 <일다> 독자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반다의 질병관통기>를 토대로, 몇 달 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묶어냈고, 보다 다양한 대중들을 만나고 있다.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 2019) 표지


아픈 몸의 말하기, 질병 서사 만들기


아픈 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질병 세계에 대해 말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심지어 질병과 인권에 대한 담론이 희박하고, 당사자의 말하기가 부족한 사회에서 말이다.


모든 인권 담론의 본격적 출발은 당사자들의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더 정확히는 당사자의 말하기 없이 시작된 인권 담론은 현실에 뿌리내리기 어렵다. 당사자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신이 살아 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아픈 몸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면밀히 드러낸다는 의미다. 질병과 인권 담론의 토대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픈 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 질병은 오랫동안 개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는 건강을 개인의 스펙으로 만듦으로써, 질병에 걸린 것을 자기 관리의 실패로 몰아갔다. 결국 ‘질병의 개인화’로 인해 아픈 몸들은 자책감에 시달리게 됐다. 자신이 잘못 살아서 질병이 왔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아픈 몸이라서 겪는 부당함이나 의문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말하지 못하니 문제가 수면화되지 못했고, 수면화되지 못한 문제는 변화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국 아픈 몸에 대한 사회적 무지와 차별은 지속되었고, 아픈 몸들은 질병 자체의 생물학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고통에 시달렸다.


나는 이런 ‘질병의 개인화’를 비판하는 동시에, 아픈 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할 수 있는 장을 열고자 했다. 나뿐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발화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길 바랐다. 그 과정을 통해 아픈 몸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재해석하고 자신의 몸을 덜 미워하게 되기를 바랐고, 사회에 아픈 몸의 서사가 양적으로 늘어나기를 바랐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는 질병 서사를 양적으로 늘려 가는 것 자체가, 질병과 인권 운동의 토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다 시민강좌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질병과 함께 춤을: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워크숍. 보드게임으로 만나는 질병의 순간. (촬영: 정인진)


아픈 몸을 재해석하고 말하는 장: 질병과 함께 춤을


<반다의 질병관통기> 연재 당시, 나는 일다 시민강좌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질병과 함께 춤을: 잘 아프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라는 워크숍을 개설했다.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함께 살아갈지 단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워크숍이었다.


나는 질병을 겪으며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배운 지혜를 공유했다. 참여자들은 질병에 대한 불안과 혼돈을 자원 삼아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 갔으며, 공감과 위안 속에서 잘 아프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 갔다. 워크숍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후속 모임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후속 모임은 워크숍 이름을 따서 <질병과 함께 춤을>이라고 지었고, <다른몸들>(질병, 젠더, 장애, 민족, 계급, 종차별 등의 문제를 교차적으로 고민하는 활동가 그룹) 산하의 서클로 운영되고 있다.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병 세계 언어를 탐구하고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 안에 고여 있던 질병 경험과 감정을 길어 올렸다. 매회 차마다 의료나 관계 같은 키워드를 가지고 토론하기도 하고, 각자의 생애사를 질병과 연관지어 발표하고 온전히 듣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내 보는 이야기, 여전히 어떤 언어로 정리되지 못하고 단어로만 더듬거리며 흘러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침묵에 담겨서 숨소리로만 나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모아진 이야기를 토대로 2개월간 연극 워크숍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각자가 가진 질병에 대한 불안이나 감정에 함께 접촉하기도 하고, 서로가 되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일련의 경험을 통해, 꾸준히 언어화하고 재해석했던 자신의 질병 경험을 최종적으로 글로 정리했다. 각자가 살고 있는 질병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10여 차례 합평 과정을 거쳤다. 합평 과정을 통해, 글의 내용은 물론이고 문장까지 함께 살폈다. 합평은 글을 손보는 과정이었으나, 서로의 질병 경험을 매만져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질병으로 인한 증세, 통증, 치료, 죽음은 오롯이 혼자 겪을 수밖에 없는 여정이다. 우리는 <질병과 함께 춤을> 서클을 통해 각자의 질병을 ‘함께, 다시 겪는’ 시간을 보냈다. 조각난 경험들, 이름 붙여지지 못한 경험들, 어떤 말로 명명해야 할지 모르는 경험들에 함께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 갔다. 이는 아픈 몸으로 건강 중심 세계에서 살아 내느라 부서졌던 감정, 분절되어 있던 삶을 통합해 가는 과정이었다.


워크숍 후속 모임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2개월간 연극 워크숍을 시작했다. (촬영: 혜영)


규정되는 몸, 식민화된 몸을 거부하기


앞서 말했듯 우리는 질병과 인권을 둘러싼 담론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회를 살고 있다. 따라서 <질병과 함께 춤을>이 하고 있는 작업처럼 아픈 몸들의 차별과 고통을 드러내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건강불평등과 같은 담론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노동자라서, 여성이라서, 가난해서 건강 영역에서도 차별받고 있다는 현실이 다양한 연구 자료를 근거로 주장되어왔다. 이와 같은 건강불평등 문제는 보건의료운동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해왔고, 여러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보건의료운동은 건강의 기준이 단일한 ‘표준의 건강’으로 설정되고, ‘정상성’으로 구획된 기존의 기준과 체계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건의료운동은 아픈 몸들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차별이나 고통에 대해 접근하고, 아픈 몸들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발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건의료운동은 ‘전문가’들의 장이고, 아픈 몸들은 전문가들의 텍스트로만 존재했다. 아픈 몸들은 의사와 사회로부터 환자다움을 요구받고, 전문가들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전문가들이 아픈 몸에 대한 규정과 해석을 포함한 말하기를 거의 독점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아픈 몸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한다는 것은 의료인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규정되는 타자의 위치를 벗어나겠다는 의미다. ‘식민지화된 몸’을 거부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질병과 함께 춤을> 서클 구성원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재해석하고 정리해 낸 글의 일부를 일다에 연재한다. 이는 당연히 질병을 어떻게 극복했다거나, 질병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서사가 아니다. 아픈 몸들이 질병과 어떻게 살아가고,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협상하며, 자신의 몸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아픈 몸에 대해, 끊임없이 ‘해명’하길 요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해명을 성공하거나 실패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픈 몸들이 질병과 공생하는 고유한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새해엔 건강염려 대신 건강을 사유하는 시간을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건강을 염려하며 요가나 헬스장에 등록하고, 금주나 금연을 결심한다. 그 틈새에 질병과 건강을 사유하는 시간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질병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건강산업에 휘둘리는 대신, 주말에 운동 안 하고 소파와 침대를 오간 자신을 자책하는 대신, 아픈 몸들의 삶을 만나 보자.


아픈 몸들이 어떤 세계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것은 질병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과 왜곡된 건강 인식으로부터 멀어질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다. 질병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 몸을 보다 정확하게 마주하고, 현재의 아픈 몸을 이해하거나 아프게 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게다가 건강한 몸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부추김당하고, 불안 속에서 건강산업에 더 많은 돈을 소비하게 만드는 사회로부터 한걸음 빠져나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건강산업이나 아프지 않은 몸이 아니다. 아픈 몸에 대한 상상력과 건강 신화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사회가 아니라, 아파도 괜찮은 사회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은 세상이다. 한진희(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ildaro.com


※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 이 연재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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