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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장애는 구분되어야 할까?

<반다의 질병 관통기> ‘아픈 몸’과 ‘장애’ 사이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장애인 등록을 둘러싼 갈등


“장애인으로 인정받아야죠.”

“안돼요, 이미 차별은 충분하다구요.”


의견 대립은 팽팽했다. 표정은 심각했고, 예민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도 아니고, 그냥 쉬는 시간에 나온 대화일 뿐인데도 그랬다.


그곳은 지역의 보건소와 여성단체에서 진행한 암환자 캠프였고, 어느새 참여자들의 시선은 ‘사람책’으로 초대받은 내게 모아졌다. 판관 역할을 요청하는 건 아니었다. 묘안이 없냐는 눈빛이었다. 긴 세월 투병을 해온 중증질환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아픈 몸들의 욕구는 명확하다. 정부가 장애인에게 부여한 복지는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실제 아픈 몸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의 제약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암 치료 5년 후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저하된 체력 때문에 재취업이 어려운 경우는 흔하다. 게다가 한국은 워낙 노동 강도가 높다보니 취업에 성공해도 체력 상 직장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임금노동은 제한되는데, 재발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한번 암에 걸린 사람은 다른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통계를 떠올리면 건강관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건강에 중요한 쾌적한 주거 환경과 청정한 먹거리, 적당한 운동, 정기 건강검진 등은 일정한 비용을 필요로 한다. 소득은 줄고 의료비와 건강관리 비용은 늘어나다 보니,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도시가스 난방비 할인, 의료비 공제 같은 작은 복지라도 적용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픈 몸들 모두가 장애인 복지를 우선적으로 원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 복지는 적용 받지 않아도 되고, 아주 낮은 등급도 괜찮으니까 장애인 증명서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왜일까. 아픈 몸을 ‘게으른 몸’으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는 암 수술 한 뒤에 등산도 다니고 직장도 다시 다니던데, 왜 너는 늘 늘어져 있냐. 매일 집에만 있으니까 건강이 더 안 좋은 거다.” 체력이 부족해서 집에 있는 건데, 집에 있어서 건강이 안 좋은 거라며 나태하다고 비난을 받는다. “암환자였다고 너무 몸 사리면, 동료들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적당히 합시다.” 높은 실업난에 혹시라도 해고를 당할까봐 자신 체력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방전 직전까지 일하지만, 회사에서는 몸 사린다며 비난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게으른 게 아니라, 몸이 ‘정상’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전직 암환자’라는 꼬리표는 자신의 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온전히 회복한 ‘건강한 암환자 출신’들과 비교가 될 뿐이다. “정말 체력이 부족한 게 맞냐”, “잦은 병가는 꾀병인거 아니냐”, “계절마다 자잘한 질병을 달고 사는 건 자기 관리 부족 아니냐” 라는 반복되는 의구심을 받으며 지쳐간다. 번번이 건강 상태를 설명해 보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자신의 몸을 설명할 언어가 절실한 이들은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추가되더라도, 장애인이라고 공식 인정받는 게 더 필요하다. ‘인정투쟁’을 위해 더 이상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게으른 게 아니라, 정상에 속하지 않은 몸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제작: 조짱)


무엇이 질병이고, 무엇이 장애인가


‘기존’ 장애인들은 이런 아픈 몸들의 ‘장애인 등록을 둘러싼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통상 장애인들은 질병을 가진 ‘환자’가 장애 영역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일정한 긴장감을 갖는 것 같다. 온갖 중증 질병을 가진 환자들이 장애인으로 등록을 하면, 너무나 적은 장애인 복지 예산이 바닥이 날까봐 우려돼서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 파이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중증장애가 있는 가까운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애는 질병이 아니며 그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지하철을 탈 때 흔히 겪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시선도 싫지만, ‘어디가 아픈 거냐’ 라는 질문이 짜증난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장애가 있으나 건강한 자신이, 아픈 몸이 되는 것 같아 기분 나쁘기도 하고. 가족들 손에 이끌려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용하다는 곳을 다니느라, 사라진 유년 시절이 떠올라 끔찍하다고도 한다. 장애는 치료되는 게 아닌데, ‘네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장애가 치료되지 않는 것’이라는 종용을 받는 것. 장애가 있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상’으로 교정하려는 태도에 대한 서운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실제로 장애인권운동은 오랫동안 장애와 질병은 구분되어야 하며, 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강력히 외쳐왔다. 장애는 재활이 가능할 수는 있어도 치료되는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장애가 있는 몸을 ‘치료와 교정’으로 최대한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어야 차별을 해소할 수 있다는 태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다. 다시 말하면, 장애가 있는 몸을 교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구조와 문화를 교정함으로서 장애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질병과 장애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무엇이 질병인지, 장애인지는 사회 문화적으로 다르게 형성되거나 개발된다. 질병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의학적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알다시피 그런 건 없다. 사회적 의식과 가치의 영향력을 벗어나 진공 상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예전에 질병으로 규정되어 왔던 역사라든가, 제약회사의 로비로 정상 수치의 기준이 높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간주 돼 약물 복용 비율이 상승했다는 주장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장애가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많이 회자됐듯 마서즈 비니어드 섬에서 농인 출현률이 높았으나, 그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성언어 이외에 수어(手語)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들리지 않음’이 낙인이나 장애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보고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다양한 몸들이 등장하는 연극 <천장은 위에 있고 마루는 밑에 있다> (장애인문화예술판 제공 사진)


질병은 ‘몸’에 있지만, 그 의미는 ‘사회’에 있다


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암과 같은 중증 질병으로 인한 가시적인 명백한 손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상생활에 명백한 제약이 발생하는 사람을 장애인으로 규정해야 할까 아닐까.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는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낙인은 원하지 않는다는 딜레마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픈 몸이 된다는 것은 정상이나 건강한 몸에서 비껴나는 위치에 강제적으로 놓이게 됨으로서, 인식의 확장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질병은 활동 반경의 제한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됨으로서(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을 때, 비로소 계단과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 자신 몸을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듯)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감을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변경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 몸을 스스로 새롭게 규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병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개인의 물질적 몸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질병의 의미나 차별은 그 몸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사회에 존재한다. 마치 결혼과 출산을 한 여성과 비혼인 여성이 각각 동일한 자궁암에 걸렸을 때, 사회적 시선이 ‘평등’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질병과 관련한 차별을 문제 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픈 몸이 아니라, 아픈 몸을 명명하고 해석하고 위계화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만약 아픈 몸들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는 적용받고,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있는 묘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병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분명 연결된 지점이 있다는 것을 탐색하고 인정해 가는 과정 속에 존재할 것 같다.


질병과 장애는 정상/비정상이라는 기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정상이라는 ‘우월감’은 비정상이라는 ‘찌질한’ 배경이 존재함으로서만 빛날 수 있다. 그 우월감과 찌질함을 분열적으로 오가는 상황에서 빠져나와, 질병과 장애를 은폐하거나 유배시키지 않고도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 불확실한 몸들이 작은 파이를 놓고 경쟁하게 만든 사회를 향해 전선을 긋고, 서로의 낙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질문할 때, 그래서 세상을 향한 불안을 서로에 대한 연대로 바꿔 낼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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