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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20년’ 해고된 여성들을 기억하며

<반다의 질병 관통기> 당신의 고통과 희생에 위로를…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IMF 20년’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

 

올 한해 ‘IMF 20년’을 조망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나는 IMF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돌 같던 그의 어깨가 떠오른다. 그를 만난 건 아픈 여성들과 함께하는 몸 워크샵이었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 마음을 살펴보는 시간으로 춤과 요가 사이에 있는 움직임 워크샵 같은 형태였다.

 

워크샵 강사는 ‘척추는 몸에 새겨진 자서전’이라고 했다. 이어서 두 발을 벌리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발을 바닥에 밀착시키고 단단히 서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리면서 척추 뼈 하나하나를 느껴보라고 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한 뒤, 다시 한 번 내려가면서 척추 뼈마다 관련 된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잊고 있던 많은 기억이 순간적으로 수면위로 올라왔다.

 

▶ 몸 워크샵. 척추를 천천히 움직이며 척추에 기억된 삶을 떠올리고 있다. (사진: 쎄실)

 

관련 감정을 잠시 느껴보고, 둘씩 파트너가 되어 기억을 나눠보는 시간. 나의 파트너는 강사의 지시에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느리게 말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마음이 아플 때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책상 밑에 박혀 있던 습관, 체했을 때 할머니가 손을 따고 등을 쓸어내려 주던 순간, 집회에 참석했다가 부상을 입었던 어깨, 힘내라며 등을 토닥이는 남자 선배 손의 끈적임에 소름끼쳤던 기분, 중증 장애가 있는 동료를 활동보조하다가 허리를 삐끗했던 기억 등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의 파트너는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나보다 열 살 쯤 많은 50대 여성이었는데, 거뭇한 혈색과 초췌한 머리카락은 언뜻 보기에도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때 권고사직을 통보받고 이후에도 출근하던 시기에 등에 꽂히던 동료들의 시선, 마트 캐셔로 일할 때 서 있는 내내 허리와 등이 아팠던 기억, 일당제로 일하던 식당에서 갈비판을 닦다가 허리를 삐끗했던 통증, 남편이 장난으로(?) 자주 등짝을 때렸던 순간, 아이를 키워야 하는 가장으로서 무거운 자신의 어깨가 기억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계속 살 수 있었던 건, 해고를 수용하고 퇴근했던 밤에 아이를 업었을 때 등에서 느껴졌던 따뜻함 때문이라고 했다.

 

잠시 뒤 강사는 서로의 파트너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머리를 바닥으로 내리며 척추 뼈를 느껴보라고 했다. 그의 몸은 척추 뼈 하나하나가 아니라 통으로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 뒤 내가 동일한 동작을 하자 파트너는 내게 유연해 보인다며 부럽다고 했다. 내 척추 뼈가 덜 굳을 수 있었던 건, 머리로나마 내 삶의 경험을 젠더 위계와 구조적 모순, 사회적 차별 같은 언어로 정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소되지 못한 감정, 해석되지 못한 경험은 우리 몸에 분노와 슬픔이 되어 맺힌다.

 

이어서 서로의 어깨 근육을 손끝으로 섬세하게 만져주던 시간. 그의 척추 뼈가 하나씩 구분되지 않고 통으로 된 막대기처럼 움직였듯, 그의 어깨는 탄력이나 근육 결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돌처럼 단단할 뿐이었다. 내가 조금 놀라서 평소 어깨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의원에 가도 침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견뎌야 했던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어깨를 돌처럼 만들었을까, 혹은 돌처럼 단단해야만 부서지지 않고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걸까.

 

강사는 프로그램을 마치며, 자신 몸과 연결된 단어를 하나씩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아이 엠 에프’라고 답했다. 그 짧은 음절에도 그토록 무거운 감정이 실릴 수 있는 인간의 목소리가 새삼 놀라웠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몇몇이 함께 식사를 했다.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였고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자고 사전에 말한 적 없었지만, 모두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속 가득한 이야기에 기꺼이 청자가 되었다.

 

정리해고의 칼날은 가장 먼저 여성을 향했다

 

▶ 여성단체들은 여성우선 해고 반대운동을 펼쳤다.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여상을 졸업한 그는 공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오면서 여성우선 해고가 단행됐다. 그는 해고에 불복하며 버텼으나 돌아온 건 이기적이라는 힐난이었다. ‘너 대신 남성 가장들이 해고돼야 겠냐’며, 회사에서 왕따를 당했다. 결국 해고를 수용했고 재취업은 어려웠다. 서른 살 넘은, 아이 있는 여성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자신의 퇴직금도 바닥났을 무렵, 작은 회사 경리 일을 시작했다.

 

그와 달리 재취업을 하지 못한 남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돈 몇 푼 번다고 자신을 무시하냐며 폭군으로 변해갔다. 그는 아이와 남편을 부양해야했으므로 주중에는 경리 일을 하고, 주말에는 마트에서 캐셔 일을 했다. 그나마 경리 일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몇 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백화점, 콜센터, 보험대리점 등을 전전했다.

 

재취업도 매번 어려웠지만, 직장 안에서의 관계도 늘 힘들고 쉽게 갈등 관계에 놓이곤 했다. IMF 외환위기 때 해고당한 이후 우울증이 반복적으로 찾아왔으나, 어쨌거나 꾹꾹 참으며 일했고, 한 번도 집에 돈이 떨어지게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 유방암 수술을 했다. 그 얼마 뒤 자궁암 수술도 했는데, 지금도 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말했다. IMF만 오지 않았어도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 같다고.

 

그는 헤어지기 전 이런 말을 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래서인지 그는 계속 자신을 탓했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 오빠에게 대학 진학을 양보한 것, 남편과 이혼하지 못한 것, 그 모든 자신이 싫다고 했다. 해고가 부당하다고 회사에 소리 한번 크게 지르지 못한 게 한이 되고, 평생 일하면서 자식과 남편만 돌봤지 자신 몸을 돌볼 줄 모르던 어리석음이 후회된다고 했다. 그리고 질병으로 가득 차버린 몸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부당한 현실에 대해 발화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존중 받지 못한 그의 분노는 내면으로 흡수되었던 것 같다. 그에게 IMF 외환위기는 부당함의 상징이었다.

 

‘남편 기(氣) 살리라’는 사회적 주문

 

20년 전 11월에 시작된 IMF 구제금융. 당시는 왜란(倭亂), 호란(胡亂)보다 무서운 환란(換亂)이라 불렸다. 당시 구조조정은 노동자를 희생양 삼아 자본의 질서를 회복,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대량 해고가 자행됐고 가정 경제는 파탄 났다. 하지만 그 고통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미친 건 아니었다. 기업은 말했다. ‘미혼’이니까 결혼하면 되지, ‘기혼’이니까 남편이 벌어오겠지, ‘사내부부’니까 아내가 나가야지, ‘출산휴가’ 다녀왔으니 이제 아이 키워야지. 정리해고 칼날은 여성에게 정조준되어 우선적으로 향했다.

 

당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자료(여성해고 실태와 정책 과제, 1999년)에 따르면, IMF로 인해 집중적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은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20대 사무직여성’이었다. 그리고 사무직에서 해고성 비자발적 이직은 남성 9.7%, 여성 43%였다. 여성사무직 정리해고자 비중도 1997년 하반기 13.4%에서 1년 뒤 43.7%로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남성의 해고에만 주목하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를 위로하기에 바빴다. 수많은 언론은 여성은 알뜰한 살림으로 지출을 줄이고 남편 기죽지 않게 잘 보살피며 취업으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쏟았다. 여성들은 취업을 하면 실업자인 남편이 기죽을까 걱정하고, 취업을 못하면 무능한 아내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직장을 잃은 남편들은 그 고통을 아내에게 퍼부어, IMF 구제금융 시기 남편에 의한 아내폭력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있다.

▶ “남편 기 살려야 IMF 이긴다”, 한겨레21 1997년 12월 25일자 기사. (캡쳐 이미지 편집)

 

IMF 구제금융 시기, 여성은 우선해고를 통해 경제적 위험을 흡수하는 안전판으로 동원됐다. 그리고 가족 안에서는 남편 기를 살리는 아내, 알뜰한 살림과 취업으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능력 있는 엄마 역할을 할당 받았다. 절대적 희생으로 가정 붕괴 위험을 막는 여러 개의 에어백 역할을 요구 받은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IMF 외환위기 때만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되는 일상이지만, IMF라는 위기 상황은 그것을 더 극단화했다.

 

기록되지 못한 차별은 고통과 질병으로 쌓인다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등에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노동자들은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고 보고된다. 비정규직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는 사람들 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IMF 구제금융 직후 소득 감소를 경험한 가구가 80%가 넘었다고 하니, 분명 전 국민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리고 질병이환율를 비교한 조사에서도 IMF 이전인 1995년에 비해 1998년 전체 질병에 대한 이환은 2.8배, 급성은 2.2배, 그리고 만성은 1.9배 늘었다. (한국의 IMF 경제위기 전후 질병이환율, 의료이용 및 사망률 변화, 송영종, 2000년)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그 중 누가 왜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 희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기록되지 않으면, 더 쉽게 희생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반복된다.

 

올 한해 ‘IMF 20년’을 주제로 한 언론과 전문가 의견이 수없이 많이 쏟아졌다. 하지만 당시 제일 앞에서 희생을 분담하도록 떠밀려나갔던 여성노동자에 대한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의문과 분노가 든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극복했다면, 그건 분명 희생자들을 밟고 그 위에 선 결과다. 당시 사회의 위험에 대한 안전판, 에어백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그 고통을 온몸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쌓여 온전히 개인이 겪어야 하는 통증과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그 고통은 몸에 스며들어 질병으로 확장되기 쉽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이 더 나쁜 건 분명한 차별의 결과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고 하지만, 실제 건강수명은 그다지 더 나은 게 아니라는 보고들은 사회적 차별을 온 몸으로 흡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이 많은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20년 전 IMF 구제금융 시기, 여성우선 해고와 일방적 희생 분담으로 삶과 몸이 아팠던 이들에게 나라도 작은 위로를 보낸다. 당신들의 고통과 질병이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결과였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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