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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에 대한 차별

<반다의 질병 관통기> 질병을 사유하라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갑자기 떨어지는 소나기, 교복을 입은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처마 있는 곳을 향해 달린다. 그런데 그중 유난히 작고 뒤처진 아이가 보인다. 아이는 깔깔거리며 “현기증 때문에 빨리 못 뛰어”라고 말하고, 앞선 아이들도 깔깔거리며 “병신같이 왜 못 따라와”라고 말한다. 다들 유쾌해 보인다. 병신이라는 말을 듣고, 뱉은 실제 마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병신(病身), 글자 그대로의 원뜻은 ‘병이든 몸’이다. 그러니까 현기증이 있다는 그 아이도 나도 병신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상당수가 병신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병신의 원뜻은 사실상 사라졌고, 질병이 있는 몸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거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장애가 있는 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말이 되었다. (사실 질병과 장애는 명징하게 분리하기 복잡한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질병과 장애는 긴장이 존재하는 관계로, 이 글의 주제와도 연결되어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 많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다음 기회로 넘긴다.)

 

어쨌거나 병신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웃으면서도 화내면서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멸시의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병신이라는 말만큼 강력하고 배타적이진 않지만, 아픈 몸을 차별하는 말들이 일상에서 흔하게 돌아다닌다.

 

▶ 아픈 사람을 차별하는 표현  ⓒ이미지 제작: 조짱

 

질병과 정체성

 

“긍정적이네요, 아픈 사람 같지 않아.”

“유쾌하네요, 장애인 같지 않아.”

“의리있네요, 여자 같지 않아.”

 

세 문장의 공통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수용해야 ‘칭찬’을 긍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픈 몸 정체성과 계속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아픈 몸을 부정하는 것은 질병과 함께 사는 삶을 계속 한탄하거나, 지속적으로 극복하고 갱신해야 할 정체성과 함께 산다는 의미다.

 

본디 차별이란 명시적으로 차별을 의도하거나 목표로 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그리고 차별 표현 수위가 낮다고 해서, 해악이 낮은 것도 아니다. 장기적으로 혹은 평생을 아픈 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아픈 몸 정체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우울과 소외, 자존감 저하를 불러온다. 결국 질병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는 걸 방해한다. 질병을 삶 속으로 통합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픈 사람 삶의 질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질병의 희화화

 

“난독증 있냐?”

“암 걸리겠네!”

 

자신의 고통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농담’이나 한없이 가벼운 비유가 됐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모두 웃음으로 받아 치는데, 당사자가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을 표하면 비웃음을 받거나 고립되기 쉽다. 그런데 우리는 인터넷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난독증을 겪고 있는 이들이 놀림과 소외의 대상이 되는 현실, 암환자들이 완치 판정을 받은 후조차 단지 병력(medical history)이 있다는 이유로 취업과 교육에서 배제되기도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질병을 겪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명체로서 질병에 대한 생래적 두려움도 있지만, 질병에 대한 사회 안전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은 불안을 크게 가중시켰다. 결국 박탈감 가득한 광폭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질병은 내 삶의 안전을 위협하는, 외면하고 싶은 위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픈 몸이나 질병을 희화화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깊은 불안을 잠시라도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건강 중심성

 

“건강이 최고지, 건강을 잃는 건 모든 걸 잃는 거야.”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협박성 예방 표현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도 하고 계속해서 꿈을 꾸기도 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아픈 사람도 아픈 대로 공동체 안에서 돌봄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역할과 존중 안에서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저 말은 건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질병에 차별과 낙인이 붙어 다니는 사회에서는 위험해 보인다.

 

▶ 국가인권위원회 차별 행위 진정 사건 통계 (2016년)

 

어떤 이들은 AIDS처럼 극단적 낙인이 부여된 질병이 아닌 한, 일반적으로 질병에 대한 차별은 미미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 차별 시정 자료에서도 질병에 의한 차별 진정은 다른 영역에 비해 적은 편이다.(2016년 국가인권위 차별 행위 진정 현황 중 병력에 따른 차별은 1.2%)

 

하지만 그건 지금과 같은 고실업 사회에서 병력 없는 ‘깨끗한’ 사람을 고용하길 원하는 건 당연하다는 태도, 혹은 너나없이 고통 받는 사회에서 ‘아프니까’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는 태도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즉 당사자에게 차별이 내면화되어, 차별을 차별로 명명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차별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질병과 인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 수위가 낮고 오히려 아픈 사람의 인권이 취약한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질병 개인화

 

“저러니까 병 걸렸지.”

“조심했어야지 젊은 사람이 왜 병에 걸려?”

“어떻게 살았길래 저 집은 암환자가 여럿이야.”

 

질병의 원인을 성격이나 생활습관에서 찾고 자기 관리의 실패로 보는 태도는 질병의 귀책을 철저히 개인에게 돌린다. 과거에는 신이 내린 형벌로 질병에 걸렸다고 여겼고, 요즘은 생활습관이 나빠서 질병이 왔다는 믿음이 강력하다. 실제 지금도 중증질병을 진단 받았을 때, 노년층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청년층은 ‘나의 어떤 습관이 문제였을까?’를 고민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쨌거나 아픈 사람이 자책감을 갖게 된다는 점은 양쪽 다 공통적이다.

 

건강은 사회적 권력이나 차별과도 밀접하기 때문에 빈곤층일수록, 다양한 차별을 겪는 소수자일수록 더욱 아프기 쉽다. 사람들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동시에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리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아픈 이들과 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나 안전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 질병관리본부는 대사증후군을 생활습관에 의한 병으로 설명하고 있다. ⓒ출처: 질병관리본부 국가정보포털

 

덧붙여, 누가 그런 문화를 더욱 조장하는지도 살펴볼 일이다. 종편을 중심으로 한 방송은 물론, 정부에서 만든 질병 관련 사이트에도 개인의 생활습관을 강조할 뿐, 건강에 위해한 사회적 요소에 의해 질병 위험이 높아진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가 질병의 개인화 논리를 원하는지, 그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질병을 개인 책임으로 몰아갔을 때, 건강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 구조는 희미하게만 보인다. 정부가 산재, 야근, 가정폭력, 젠더 불평등, 미세먼지 같은 사회적 건강 위해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새삼 또 생각하게 된다.

 

정상성에 대해 ‘질문하는 몸’

 

이처럼 질병을 둘러싼 차별적 말과 태도는 아픈 몸들이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하며 존중 받아야 할 권리를 제약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질병을 개인의 불행, 수치, 책임으로 귀속시킴으로서 열등감을 갖게 하고, 종종 질병을 숨기기 위한 긴장이 유발된다는 점이다. 혹은 반대로 몸이 아프지만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정투쟁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질병을 극복했거나, 질병으로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거나, 질병이 있음에도 뛰어난 삶을 살았음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나를 포함해서 질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 그 양쪽 모두 그만둘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알다시피 문제는 우리의 아픈 몸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가 아닌 배타적 대상으로 만든 사회다. 지배 권력의 필요에 맞는 정상과 효율의 기준을 만들고, 그것에서 벗어난 몸들을 모조리 차별하는 몹쓸 사회다.

 

오히려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둘 때, 아픈 몸을 극복해서 정상이나 표준이 되려는 흉내를 그만둘 때, 그리고 아픈 몸과 불협화음을 만드는 이 사회를 자책 없이 성찰할 때. 바로 그때, 아픈 몸의 ‘쓸모’가 빛을 발한다. 건강과 효율이 정의(justice)가 된 사회에서 아픈 몸은 질문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중심과 정상에서 밀려난 우리는 이 현실을 조망하며 새로운 정의를 질문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위치에 있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내는 내 몸을 조금씩 긍정해가는 중이다.


사실 아픈 몸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의 태도를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병신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는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아픈 몸을 정상으로 복구하는데 전력투구하지 않고, 이렇게 사회의 태도를 거부하며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는 내 행동은, 그들 기준에서는 한참 모자라는 그야말로 ‘병신 짓’이다.

 

질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 아픈 몸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규정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정상성에 대한 균열,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 다른 상상력을 생성시키는 ‘질문하는 몸’으로 우리가 함께 트렌스(trans)할 수 있길 바란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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