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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사용에 대한 자기결정권
<반다의 질병 관통기> ‘시간 빈곤’에 관하여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왜 그리 바빠?”
사람들과 일정을 정할 때마다, 나는 안 돼는 날이 많다. 그들은 내가 다시 많은 일을 하며 지내는 건 아닌지 염려하지만, 전혀 그런 건 아니다. 나도 이따금 의아했다.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지.
이제 더 이상 일상적으로 병원에 가느라 시간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예전만큼 매일 여러 보조치료법을 하지도 않는다. 누워있는 시간도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그런데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 올 한해 극장 한번 간적 없고, 이따금 시집을 읽는 것 외엔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도 아득하다. 집에 티비를 놓고 살지 않으니 티비 앞에서 무심코 버리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들을 자주 만나거나 활동을 제대로 많이 하는 것도, 생계를 위해 돈을 변변히 버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늘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걸까, 도대체 나의 시간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 내가 몇 시에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한 시계부. ⓒ이미지 제작: 조짱
시계부(時計簿)를 쓰다
예전에 이따금 쓰던 시계부(時計簿: 실제로 이런 말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얼마큼의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기록하는 것을 시계부라고 부른다)를 다시 써봤다. 매일 몇 시에 뭘 했는지 기록해 봤지만 새삼스러울 게 없다. 대체로의 일상은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먹고, 집 앞 산길을 걷거나 요가를 하러 간다. 다녀와서 점심을 해먹고, 잠시 낮잠을 자거나 쉬다가 텃밭이나 도서관에 간다. 저녁에 집에 오면 간단히 반찬을 만들어 놓거나 청소, 세탁 등의 집안일을 한다.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이렇게 보면 마치 한가로운 전원생활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회의 한번 하자는데, 밥 한번 먹자는데 왜 그렇게 일정 정하기 어려운 걸까 궁금해 한다. 하지만 이 한가로워 보이는 일정들은 마치 직장이나 병원 가는 일처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언젠가부터 담이 자주 결리는데, 아침 스트레칭을 하지 않거나, 요가를 일주일 넘게 안가면 거의 반드시 담이 결린다. 허리나 목, 등에 담이 결리면 짧게는 삼사 일이지만 길면 열흘 넘게 고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치료가 안돼서 아주 오랫동안 고생하던 고질적 출혈이 요가를 하면서부터 많이 안정됐다. 요가는 전문 치료행위가 아니지만, 내게 요가는 병원 가는 행위에 준할 만큼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아침에 산길을 걷는 것도 그렇다. 8월 중순이 지나면 수면양말과 극세사 이불 없이는 잠을 못잘 만큼 추위에 약한 몸이 되었고 면역력도 무척 떨어졌다. 그런 나에게 내과의사는 물론 한의사도 생활처방으로 제시한 게, 아침햇살 속에서 가볍게 땀이 날 만큼 산길을 걷는 일이다. 사실 이건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아침의 나무 냄새와 햇살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자주가진 않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는 텃밭도 빼놓을 수 없다. 애초 텃밭을 가꾸는 건 아프기 전에도 즐기던 취미였다. 하지만 아프고 난 뒤 더 어려워진 경제상황에서 텃밭의 작물은 유용했다. 매우 작은 텃밭이지만, 작물을 다양하게 잘 선택하면 봄부터 초가을까지 장보는 비용이 확실히 줄었다. 엥겔지수가 절대적으로 높은 나로서는 텃밭의 수확물이 작으나마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
▶ 일주일에 한두 번은 텃밭에 간다.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비트. ⓒ사진: 여은
또한 도서관에 가는 것도 조금 다르지만 의무적 노력이다. 나에게 도서관은 노동공간으로서 회의 준비나 강의, 원고 등의 작업을 하는 곳이다. 물론 집에서도 가능하지만, 집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주 누워있게 된다. 늘 몸이 무겁다보니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진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현기증 등이 많이 안정된 상태라 적절한 쉼 이상의 시간을 누워 있는 건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오히려 해롭다. 그래서 특별히 컨디션이 난조인 시기가 아닌 한, 운동이나 식사 후에 일정하게 알람을 맞춰 놓고 누워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눕지 않으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차라리 도서관 같은 공간에 내 몸을 두는 게 좋다.
이처럼 마치 여가 생활의 일부처럼 보이는 산책, 요가, 텃밭, 도서관 등의 일상이 현재의 나에겐 필수적 시간들이다. 마치 건강한 이들은 비타민제를 건강보조제로 선택적으로 먹지만, 어떤 환자들은 비타민제를 치료약제의 일부로 의무적으로 복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 사람들과 일정을 정할 때마다 한 번씩 애를 먹는 건, 몇 가지 생활 규칙 때문에 그렇다. 병원에 가면 늘 피곤하지 않게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생활 조절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투병과 완치사이 경계의 몸인 만큼, 약간의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도 피곤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건강과 사회생활의 양립 가능한 삶을 모색하면서 여러 실험을 해보는데, 그 중 하나가 외부 일정을 정하는 규칙이다.
이를테면 외부 일정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한 개 이상은 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녁에 회의가 있는 날은 전날과 다음날 외부 일정은 정하지 않는다. 낮 일정이라고 해도 강의가 있다면, 역시 전날과 다음날 외부 일정을 정하지 않는다. 그 외에 친구를 만나 가볍게 밥을 먹는 일정이라고 해도 다음날은 외부 일정을 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한 이런 모든 외부 일정은 최대 주 3회 이하로만 정한다.
게다가 그마저도 체력이 더 저조해지는 시기, 그러니까 비가 잦은 때라거나 나의 월경주기가 예상되는 때는 외부 일정을 가능한 잡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정말 며칠 남지 않는다. 누군가는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나는 워낙 전근대적 생활 습관을 갖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일을 다 마치고서야 비로소 피로감과 몸이 아픈 게 느껴지고, 밥 때가 지나고 잘 때가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중독형 근대적 인간. 아프게 된 뒤로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떤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금세 몸의 소리를 완전히 잊고, 일정을 촘촘히 잡는 습관에 끌려가는 것을 몇 번 경험했다. 그 뒤로는 아예 규칙을 정했다.
아픈 사람이 겪는 세 가지 빈곤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고, 다들 시간에 여유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보다시피 바쁘게 생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바쁘고 피곤하지 않게 생활하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일상을 산다. 그런데도 스스로 이토록 시간빈곤에 시달린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시계부를 한참 적고, 각 일상의 의미를 적어보며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재량시간(discretionary time)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재량시간을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고 사용할지에 대한 통제권, 선택권, 자기결정권으로 정의한다고 할 때, 나는 활용가능한 시간이 부족하고, 시간사용에 대한 통제력과 자기결정권이 부족하다.
즉, 직장인의 시간이 SNS와 통신기술의 발달로 퇴근 이후는 물론 주말까지 근무시간으로 확장되어 버렸고, 결혼한 여성들의 시간이 개인 소유가 아니라 가족의 공유재처럼 운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떠올려 보면 쉽다. 아픈 사람의 시간은 질병에게 언제든 침범당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일상적으로 질병과 공유해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 재량 시간의 빈곤은 삶의 주도권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시간도 일종의 자원이다. 소득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개인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소다. 그리고 수명은 곧 시간이다. 시간을 얼마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곧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원하는 바대로 만들어 갈수 있느냐의 문제다. 결국 시간 사용의 자율성, 재량 시간의 양이 빈곤하다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발현해 나갈 조건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려나갈 수 있는 힘이, 기회가 통제된다.
아픈 사람은 최소한 세 가지 빈곤을 겪는다. 첫 번째가 앞서 말한 시간 빈곤이다. 시간 빈곤은 삶의 주체성을 빈곤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누구나 알고 있듯 경제 빈곤이다. 아파서 일할 수 없는데, 아프기 때문에 의료비는 물론 생활 관리에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래서 질병은 더 낮은 빈곤층으로 내려가는 가장 가파른 미끄럼틀이다. 세 번째는 관계 빈곤이다. 체력의 한계로 다양한 이들과 사회적 관계 맺는데 쓸 수 있는 에너지와 시간이 부족하다. 또한 아픈 몸에 대한 무지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피로감과 무엇보다 설명할 언어의 부재 때문에, 만남을 회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 ‘경계의 몸’이라는 네 글자 안에는 이런 삶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시간 빈곤자인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이곳에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한 번씩 묻곤 한다. 너무나 많은 소중한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내 몸이 질병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질병과 내 몸을 공유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질병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민과 감정을 언어화 해보는 과정이, 나는 물론 나와 같은 처지의 이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픈 몸을 설명할 언어를 길어 올리고 싶다.
‘건강한 삶’이나 ‘정상의 몸’에 가려진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지, 더 많은 주제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충동을 나와 같은 ‘동료’들이 함께 느끼길 바란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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