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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건강권 문제로 바라본 ‘성폭력’

<반다의 질병 관통기>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선생님, 내가 뭘 잘못했소?”


전화기 너머로 따지듯 말했다. 그가 지쳐가고 있었다. 그의 억울함과 분노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억울함이 꾹꾹 눌러 담긴 그때의 목소리를 아직 희미하게 기억한다.


2001년, 나는 여성단체에서 상근을 하고 있었고 그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로 상담을 해온 내담자였다. 생산직 노동자이고, 중년여성이자, 가장이었던 그는 사내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들 ‘대표’로 문제 제기한 내담자였다. 정말 용기 있고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그는 중견 기업의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생산라인은 대부분 중년 여성들이었고 작업반장을 비롯한 관리직은 모조리 남성이었다. 작업반장은 생산라인을 ‘관리’하러 돌아다닐 때마다 여성노동자들의 몸을 만지고, 성적 모욕감을 주는 말을 뱉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행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강력하게 문제 제기하지 못했다. 작업반장 눈 밖에 나면 야근을 못하게 되거나(기본급이 적기 때문에 야근 수당이 있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인사고과를 나쁘게 줘서 결국 직장을 떠나야 했다. 그곳은 엄격하게 성별화된 작업 현장이었고, 성폭력은 남성(관리자)이 여성(노동자)을 조롱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몇 년간 참고 참던 그는 마침내 해고를 각오하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싸움은 지난했다. 그토록 씩씩하던 피해자는 지쳐갔다. 견고한 성차별의 벽을 알아버린 그는 억울해 했다. 그의 분노는 점점 가해자보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회사를 향했다. ‘뒤늦게 피해를 고발한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강간도 아닌데’ 예민함 때문에 분란을 만들지 말라는 이들에 의해 고통은 확장됐다.


그는 해고를 각오하고, 고발하면 처벌이 이뤄질 거라 믿었던 자신을 한심해 했다. 그리고 성폭력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에 바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흔한 우울, 불안, 불면 등의 증세는 그에게는 애초 미약했지만, 2차 피해를 경험하면서 증세가 심화됐다. 싸움이 승리하면서 건강은 다시 호전됐지만, 한창 싸움이 진행될 당시에는 두통약과 소화제를 달고 산다며 고통스러워했다. (※본 사례는 당시 피해자의 동의를 거쳐 한 매체에 기고했던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성폭력은 여성건강권 해치는 고위험군 유해 요소


성폭력은 여성의 인권 문제고 시민권 문제기도 하지만, 성폭력 피해로 인해 다양한 후유증과 질병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건강권의 문제기도 하다. 여성에게 우울증이 더 많고, 두통 같은 만성통증이 더 많다는 보고를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성폭력이 구조적으로 만연한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 혹은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아동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성인여성에게 골반통이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거나, 데이트 폭력 피해를 경험했을 때 만성통증 비율이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다. 그렇다면 전체 여성 건강에 성폭력이 직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은 상당할 것이다. 특히 성폭력 피해로 인한 후유증은 물론,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빈번한 정서적 긴장감, 활동 반경 제약 등이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성폭력은 직장, 학교, 집(친족 성폭력, 아내강간), 공공장소(지하철, 엘리베이터), 종교 공간(교회, 절), 사이버 공간(몰카, 지인능욕, 비동의 성적 촬영물 유포)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일어난다. 예외인 곳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아동기부터 노년기까지 전 생애 걸쳐 어느 시기에나 발생한다. 게다가 다른 폭력 피해와 달리 성폭력은 주변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서 고통이 가중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 그렇다면 생애 단 한 번도 어떤 유형이든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여성들이 성폭력으로 인한 신체적 정서적 후유증을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겪어봤거나 겪을 수 있다는 의미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2년 실시한 성폭력 피해여성의 건강 조사 (그래프 제작: 조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건강 연구는 하나같이 성폭력이 건강에 얼마나 유해한가를 밝히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신체건강을 5점에 가까울수록 나쁘다고 할 때, 성폭력 피해 이전 평균이 2.15인데, 피해 이후는 3.20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신건강과 관련해서 일반인의 우울증 경험이 26%인데 성폭력 피해 경험자는 69.8%이고, 자살 생각 경험도 일반인은 23.9%인데 반해 성폭력 피해 경험자는 63.5%나 된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2년)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성폭력은 여성건강권을 해치는 고위험군 유해 요소로서, 공중보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성폭력 피해 현실에 대해, 정부나 기업 등이 책임을 다하는 태도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오랜 여성운동의 노력으로 성폭력 관련 법, 제도, 정책들이 마련된 것은 역사적 성과지만, 그게 적절히 작동하는가에 대해선 안타까울 뿐이다. 이를테면 최근 한샘, 현대카드, 검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고발되고 있는 직장 내 성폭력을 보자. 피해자들은 신고하지 못하거나, 신고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으며, 많은 경우 피해자가 불이익을 당한다.


이런 현실이지만 오랫동안 정부는 성폭력에 대해 주로 ‘엄벌’만을 이야기해왔다. 물론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엄벌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처벌제도가 있지만 작동하지 않음으로서, 피해는 넘치게 존재하는데 엄벌은 거의 이뤄지는 않는 이 기이한 현상이 어디서 왜 발생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 엄벌만을 강조함으로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어 보이는 효과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성폭력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결과물임을 강조해왔다. ‘엄벌’만을 앵무새처럼 읊는 게 아니라, 성폭력이 일상에 만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어떻게 해체 재구성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유지되는 사회


앞서 말한 2001년 직장 내 성폭력 현실과 지금,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았을까? ‘강간도 아닌데 분란’ 일으킨다는 의식은 상당히 줄어든 것 같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겨난 건 1990년대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가 용기 있게 나선 결과였다. 이후 여성단체가 중심이 된 노력으로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에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법제화될 수 있었다. 그게 강간이든 아니든 성적인 괴롭힘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처벌 대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 현대 아산에서 피해자의 긴 싸움으로 ‘직장 내 성희롱’이 최초로 산재 승인을 받기도 했다. 최근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의 경우, 검찰이 사건을 4년 넘게 방치하고 있지만 피해자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싸우고 있다. 심지어 사측의 괴롭힘에도 퇴사하지 않고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정년퇴직하는 선례를 만들겠다며, 그 존재만으로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용기가 되고 있다. 작은 변화의 기반 위에서 누군가 적극적으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 용기에 강고하게 연대하면서 전진시켜온 역사의 결과다.


▶ <민우회 카드뉴스> 중에서 성희롱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불이익 조치에 관한 내용 ⓒ한국여성민우회

 

그럼에도 2001년 당시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우선은 역시나 성폭력에 대한 이 사회의 잘못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성폭력 관련 ‘제도’보다 더욱 강력하게 잘(!) 작동하고 있다. 즉 피해자 책임론을 중심으로 한 내용들 말이다. ‘여자가 알아서 조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여지를 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네가 예민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자의 성적 충동은 통제하기 어렵다,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 이런 믿음이 성폭력 발생의 토대가 되고, 피해자가 우울감, 자책감, 자존감 저하 등을 겪게 만들며, 2차 피해를 형성하면서 피해자의 건강을 더욱 해친다.


사회적으로 꽤 회자된 통계지만, 다시 한 번 보자. 경찰관 182명을 대상으로 성폭력에 대한 의식 조사를 한 결과, 여성의 심한 노출로 성폭력 발생한다(53.8%), 술 취한 여성이 성폭력 피해자가 됐을 경우 그 책임은 피해여성에게 있다(37.4%), 피해 발생 즉시 신고하지 않은 경우 진술에 의심이 든다(24.2%),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을 경우 피해자보다 가해자 말에 더 신빙성을 느낀다(12.1%)고 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3년) 당연히 경찰 직군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 사회의 광범위한 ‘믿음’을 반영한 결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직장 안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자신이 더 조심하지 못한 걸 자책하느라 신고를 못하거나, 동료들이 자신을 피해자가 아닌 꽃뱀으로 생각할까봐 주저하게 된다. 신고를 하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거나, 여지를 줬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며, 조직에 분란을 만들고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면서 왕따를 당한다. 가해자는 이런 ‘믿음’ 안에서 보호 받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기보다 ‘예민하게 굴어서 남의 앞길 망친다’며 오히려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무고죄로 고소한다. 그렇다. 이런 ‘믿음’이 변화하지 않는 한 성폭력 신고는 어렵기만 하고, 신고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범인은 가해자지만, 성폭력을 둘러싼 이 사회의 뿌리 깊은 ‘믿음’이 공범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성폭력이 여성에게만 발생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맞다. 명백히 남성피해자가 존재하고, 그것은 성폭력이 권력의 문제임을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이고,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인 것은 반드시 여성(성)/남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야 함을 의미한다. 남성의 성기나 몸이 ‘무기’가 되어, 남성이 옷을 벗는 것만으로 여성에게 위협되고, 여성의 벗은 몸은 ‘눈요기’가 되는 동시에, 사진만으로도 그 당사자에게 엄청난 협박이 되는 이 문화적 비대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함께 질문해야 한다.


여성성/남성성의 각본을 벗어나야 한다


더해서, 그 질문을 던지는 우리 또한 이 사회 구조 안에서 탄생한 기성품이자 구조의 일부임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오랫동안 ‘정상성과 표준 몸’에 대해 문제 제기해왔다. 몸이 아프게 되면서는 내 안에 남아 있는 정상성이나 표준 몸에 대한 환상을 더 적극적으로 부수고 재구성해왔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정상성과 표준 몸에 내 몸을 끼워 맞추고 있는 자신을 수 없이 발견한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페미니스트로 살았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각종 코르셋을 새롭게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아마 나만의 한계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변화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에게도 지속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여성(성)/남성(성)에 관해 우리는 어떤 ‘믿음’과 ‘각본’을 가지고 있으며,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전면적으로 의심하고 재구성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천상여자, 진짜남자’라는 말이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지도를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이야기되는 ‘기사도 정신’같은 것들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그 뿌리에는 여성을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보는 여성혐오가 있다. 여성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될수록, 여성은 약자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다 명징하게 인식해야 한다.


또한 성폭력 이슈가 기사화 될 때마다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강화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 맞서는 용기가 강화되는 방식으로 물꼬를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보호받아야 하는 몸에서 우리의 성적 권리, 시민적 권리, 안전할 권리, 건강할 권리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몸이 될 때에야 비로소 성폭력 없는 세상을 향한 보다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

▶ ‘#OO내_ 성폭력’에 대한 말하기가 이어지고 있다. (원 그림 출처: pixabay)

 

마지막으로 우리를 계속 뜨겁고 울컥하게 만들어 온 ‘#OO내_ 성폭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해 전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폭로, 말하기(Speak Out)는 그간 피해자 책임론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라고 드러내기 어려웠던 현실을 밀쳐내며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낯모르는 이의 폭로 속에서 자신 그리고 자신 친구의 현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다.


이 흐름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표리부동한 현실의 그 강고한 ‘믿음’에 상당한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나 저항의 목소리를 틀어막는 기제가 존재해왔다.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입을 열 때마다, “왜 이제야 말하나”, “그때 제대로 저항한 것 맞나” 등의 말로 입막음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피해자를 향한 그런 질문은 틀렸다. 우리는 질문의 내용과 방향을 바꿈으로서, 목소리를 틀어막는 걸림돌을 제거하며 더 힘차게 전진할 수 있다. “왜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았나”, “상대방을 존중하고 동의를 구한 행동이었나” 질문은 가해자에게 향해야 한다.


<덧붙임> 서지현 검사님의 용기에 지지를 보내며, 더 명민하고 강인하게 싸워나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동시에 최근 몇 년간 지속되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을 보면서, 피해 사실을 고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피해자 분들에게도 온기 담은 마음을 보냅니다. 성폭력 피해 경험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일상을 살아내는 것, 그게 바로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라고 믿습니다. 자신이 했거나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한 일체의 자기 비난을 내려놓고,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 또한 몸이 아프게 된 과정 어디 즈음에, 성폭력 피해 후유증이 연결되어 있는 피해자로서,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응원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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