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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들의 경험’이 소통되는 사회로!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를 마치며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긴 시간 소중한 이야기를 나눠준 반다님과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미니즘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로 질병을 읽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알다시피, 페미니스트는 ‘몸’이라는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다. 몸에 대한 관심은 ‘정상성’에 대해 질문하게 했고, 여성운동을 확장하고 장애인운동을 만나게 했다. 몸에 근거한 인종이나 민족 개념의 의미를 추적하게 했고, 이주나 전쟁(팔레스타인 등) 같은 주제로 내 운동과 삶이 확장되어 갔다. 질병은 그 주제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이 아프게 되자, 질병을 피상적으로 읽어왔던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의 무지를 철저히 인정해야 했다. 내 몸과 삶에 스며든 질병은 해독 불가한 언어였다.
더 정확히는 언어가 없었다. 나의 질병 경험을 설명하고 소통할 언어의 부재와 공백이 막막했다. 소통할 언어가 없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편함과 답답함에 대한 감각은 존재하는데, 그게 무엇 때문에 왜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다. 주위에서 건강을 염려해서 해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과도하게 예민하기 때문인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자기 검열을 반복했었다. 질병이 온 것만으로도 힘든데, 차별까지 함께 오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안과 답답함을 오가기도 했었다. 지난 3년 동안 <질병관통기> 연재를 통해 그 수많은 혼돈을 자원 삼아 언어를 만들어 보고 싶었고, 공백에 길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 나의 질병 경험을 설명하고 소통할 언어가 없어 막막했다. (이미지 제작: 조짱)
‘아픈 몸의 언어’를 찾아서
우선 아픈 몸들의 경험을 가시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해 보았다. 세상에는 이토록 아픈 몸들이 많지만, 사회는 아픈 몸의 경험에 대해 무지했다. 마치 성폭력 피해자가 넘치게 많지만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말이다. 아픈 몸의 경험은 집 담장을 넘지 못하거나, 애초 쓸모없는 경험, 듣기 피곤한 이야기로 치부되곤 했다. 나는 아픈 몸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가져와서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젠더, 빈곤, 주거 형태에 따라 더욱 차별 받는다는 간단한 결론으로 흐르는 것은 가능한 피하고자 했다. 그보다는 젠더가 질병 경험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형시키는지, 질병과 차별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양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드러내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픈 몸은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갖게 되는데, 그것의 형성 방식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했다. 이 과정은 우리 사회가 아픈 몸에 대해 갖고 있는 상상력이 얼마나 납작한지에 관한 구체적인 폭로이기도 했다.
가능한 일상의 사소한 사례들을 가져와 이야기해보려고 했다. 나는 언제나 일상의 작은 단면들이 엄청난 ‘정치’를 담고 있다고 여긴다. 그 안에서 권력의 작동 방식이나 문화적 태도, 우리 내면의 감정이 흐르는 과정을 관찰하고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단면 안에 숨어들어 있는 위계, 권력, 정치를 드러내는 게 모든 변화의 출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끌어오지 않고 오로지 일상의 언어를 통해서 설명해보려고 했다. 개념이나 이론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아주 직관적으로 분석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아픈 몸에 대한 무지는 차별과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무엇이 아픈 몸에 대한 차별이고 배제인지 잘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매끈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고민을 드러내고 함께 풀어가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미투(#MeToo) 운동 속에서 새삼 이야기됐지만, 성폭력은 해석 투쟁이기도 하다. 성폭력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억압을 해방으로 바꿔가는 사회운동’이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동일한 경험도 누구의 시선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억압받고 차별 받는 존재들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위한 논리를 ‘개발’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 언어를 해석하는 시선을 사회가 공유하고 인정하도록 해나가는 과정. 그게 바로 운동이다.
이것은 몸(삶)과 세상의 언어가 불일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침묵에 가두거나 세상에 일방적으로 꿰맞추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평등하게 더 좋은 쪽으로 변혁된다는 것은 여성, 흑인, 장애인, 성소수자들처럼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가 없던 이들이 언어를 획득해 가는 것이다. 자신 몸의 경험을 반영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세상에 제시하며, 그 언어가 힘을 갖고 존중받는 과정에서 가능해진다.
나는 아픈 몸, 질병과 관련해서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건강을 추구해야 하고, 건강한 몸이 ‘윤리’이자 ‘스펙’이 된 사회에서 아픈 몸으로 사는 경험과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했다. 의료인이나 건강한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라, 철저히 아픈 몸의 관점에서 다시 경험을 읽어 보려고 했다. 막연히 답답한 느낌은 존재하지만 그게 무엇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유를 추적해보고자 했다. 억울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왜 차별인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답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언어를 끌어와서 깁거나,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질병권’(疾病權) 같은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아픈 몸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빠르게 건강해져야 한다는 의무가 사회적으로 부과된다. 그러나 나는 아플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질병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에겐 잘 아플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권리를 막아서는 장벽이 무엇인지 고민을 던져보고자 했다. ‘질병의 개인화’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했다. 우리 사회에도 질병의 사회적 맥락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건의료운동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일상에서 질병은 놀라우리만큼 철저히 개인화되어 있다.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수많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아픈 몸들에게 자책감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자책감을 걷어치우기 위해, 질병을 개인화하는 여러 말과 문화적 태도를 들춰내보았다.
아픈 몸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어떤 윤리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주요하게 말해보고 싶었다. 아픈 몸들이 질병을 자신 삶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 짓고 싶은지에 대해, 사회가 좀 더 경청하길 바랐다. 사회에는 치료자(의사)가 환자에게 질병 코드를 부여하는 것과, 사회가 병명을 통해 아픈 몸의 삶을 재단하는 목소리만 크게 존재한다. 나는 그게 늘 숨 막혔다. 인류는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질병을 형벌로 여기는 서사를 만들어왔고, 신자유주의는 건강을 스펙으로 간주하며 아픈 몸을 더 철저히 배제하고 ‘루저’로 낙인찍고 있다. 아픈 몸에 대한 논의가 의료에 과도하게 한정되어 있는 사회에서, 아픈 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책감을 축소하고, 경험을 설명할 언어가 절실했다. 사회적 윤리는 당사자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 위에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픈 몸과 관계 맺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윤리가 필요한지 말해보고 싶었다. (이미지 제작: 조짱)
잘 아플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완결된 결론을 갖고 연재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매번 원고를 쓰며 생각이 정리되어 갔고 사고가 성장하기도 했다. 또한 아프다는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도 지겹고, 빨리 건강해져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싫었지만, 동시에 그런 목소리는 내 안에도 존재했다. 나의 내면은 자주 충돌했다. 아프다는 정체성을 빨리 벗어던지고 싶고, 건강해지지 않으면 삶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오갔다. 그런 나 자신을 텍스트 삼아 관찰하며 그 불안과 충돌도 자원으로 삼아보고자 했다.
나는 우리가 ‘탈-코르셋’하듯 ‘탈-건강’했으면 한다. 건강을 벗고 질병을 입자는 게 아니라, 건강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자는 의미다. 여러 차례 이 지면을 통해 말했지만, 건강을 추구하는 건 생명체의 작동 원리다. 하지만 강박적인 건강 추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사회적으로 반드시 고민해야 할 중요한 주제다. 사회가 여성에게 거대한 코르셋이라는 그물망을 던지고 개인이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서 그 코르셋이 비로소 실질적 힘을 얻게 되는 구조를 건강에 적용시켜 생각해 보면 쉬울 것이다.
질병으로 내가 규정되는 게 아니라, 질병이 내 삶의 일부임을 존중 받고 잘 아플 수 있는 권한이 존중 받기를 원한다. 아파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은 ‘정신승리’로 쟁취되는 게 아니다. 질병을 ‘극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정상’으로 교정하지 않아도, 자책감이 들 필요 없이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가능하다. 질병이 ‘자기 관리의 실패’로 인식되지 않는 사회에서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결국 아픈 몸도 이 사회에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병에 대한 가치창조와 의미생성 과정이 필요하다. 의료인과 함께 질병을 치료하는 것 이외에 질병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설명과 규정, 가치부여를 말한다. 당연히 질병도 삶의 선물이라며 긍정으로 봉합해버리는 서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질병을 겪고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픈 몸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질병을 ‘극복’하지 않고 질병과 함께 산다는 게 낙인이 아니라 프라이드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픈 몸이나 취약한 몸으로 산다는 게 불행이나 수치가 아닐 수 있을까? 그리고 질병을 겪는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고, 벗어나고 싶은 정체성이라는 문화를 우리가 언젠가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건강한 표준의 몸을 욕망하는 나의 감정을 관찰하고, 사회를 면밀히 분석해보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가보려고 한다. <끝>
▶ 질병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의미를 생성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미지 제작: 조짱)
[에필로그: 독자들에게 쓰는 편지]
오랜 친구나 연인과의 헤어짐을 앞둔 사람처럼 서운했습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을 앞두고, 아직도 이토록 쏟아지는 말을 끊고 어떻게 종지부를 찍어야 할까? 마지막이니까 꼭 이 말은 해야겠다고 문장을 넣고 빼고를 반복했습니다.
내 몸을 설명할 ‘질병 언어’의 부재 속에서, 어두운 길을 더듬거리며 걷듯 한편 한편의 글을 써왔습니다. 혼돈과 공백의 길에서 하나씩 주제를 선택하고 언어의 블록을 쌓는 과정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당시, 누가 이런 글을 읽을까 염려도 있었습니다. 질병이라는 불쾌하고 눅눅한 주제, 질병을 피할 수 있는 건강정보가 아니라 질병을 둘러싼 문화를 헤집는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들어주기 힘든 게 ‘아픈 사람이 하는 말’이라던 할머니의 푸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가 ‘미투’에서 다시 한 번 경험했듯, 듣는 이의 태도가 말하는 이의 태도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이따금 독자들의 반응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봅니다. 중증질환으로 투병 중인데 더 이상 침묵하기 싫어서 가족들에게 이 연재 글을 보여줬다거나, 자신이 불편하게 느꼈던 것을 설명할 언어를 발견해서 눈물이 났다, 이제 그만 자책감이라는 거울을 깨버릴 용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들을 보았습니다. 이 연재에 쓰인 언어는 제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지만, 글을 경청하고 필요로 하는 이가 있어서 그 언어가 제 안에 고여 있다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소통 할 수 있는 언어형태가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의미 있는 글이 되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떠올려보면, 쉽게 써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글을 쓸 때가 많았습니다. 저의 경우 몸이 아프면 집중력은 물론 글에 대한 해석 능력도 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통증으로 자주 집중력을 잃는 아픈 몸들이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도록 쓰고 싶었습니다. 장애차별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써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반대의 마음도 한 번씩 들었습니다. 쉽게 쓴다는 게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편하게 읽히는 글은 가볍게 여겨지거나, 더 예사롭게 전문가 집단들에게 도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글은 초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으로 여깁니다.
또 한편 질병과 연관지어, 세상의 다른 차별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써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 시작한 독자들도 자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라서 이렇게나 차별받는다는 선언에 머물지 않고, 젠더가 질병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얼마나 많은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지 조금이라도 사유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무의적으로 ‘꿘페미’라는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게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한계였겠지요. 돌아보니, 정말 많은 바람과 고심 속에서 글을 써나갔습니다.
어쨌거나 질병이라는 주제에 대해 마음껏 여러 결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일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일다>는 일상의 정치성과 작은 목소리(소수자)의 급진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가장 잘 다루는 매체입니다. 일상에서 사소하게 치부되는 것이 얼마나 ‘근원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으며, 그런 문제를 발화하는 게 얼마나 급진적이고 정치적 행위인지 잘 알고 있는 매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003년 <일다>가 창간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해온 매체에 글을 연재해서 행복했습니다. 최근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다시 많은 독자들이 <일다>를 찾는 것 같아 기쁘고, 어려운 세월 속에서 지금까지 <일다>를 지켜온 분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꽤 긴 시간 <질병 관통기> 연재를 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던 당시는 몸이 한참 아픈 상황을 어느 정도 빠져나왔을 때고, 어느새 40대가 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인생의 정점을 찍은 적도 없는데 세상에서 한껏 밀려나 은퇴당한 삶을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사회생활을 천천히 시작하던 때이고, 아픈 몸에 대한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에서 당혹감을 느끼던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픈 몸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전히 알지 못한 채 흔들리며 세상을 살고 있긴 합니다. 아무튼 돌아보니 <질병 관통기> 연재를 하며 뭉뚝해져있던 사고가 조금씩 감각을 되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상처와 무력감으로 힘들었던 일상에서 <질병 관통기>가 인공호흡기처럼 나를 잡아준 순간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연재했던 글을 다시 다듬고, 망설이다가 미처 못 담았던 말들을 더해서 단행본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연재를 마치는 아쉬운 마음이 큰 만큼 그리고 책의 종이가 되어 준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 마음 담아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연재는 마치지만 새로운 시작이라고 여기면서, 십년 넘게 써온 ‘반다’라는 활동명도 이참에 떠나보냅니다. 단행본은 조한진희라는 이름으로 내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과 어딘가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조우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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