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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그가 받은 편견을 재현하며 함께 겪기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⑤ 배우들의 팀워크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드, 다리아, 목우, 쟤, 희제 그리고 수영. 첫 워크숍에서 우리가 나눈 것은 그 이름들뿐이었다.(희제는 아파서 오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함께했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진들 중에서 현재 자신의 상태와 앞으로 변화되고 싶은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각각 두 장씩 골랐다. 그 사진들을 고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고, 설명을 토대로 즉흥적인 극을 만들었다.
▲ 첫 워크숍에서 고른 카드다. 닫힌 창, 그 안에 소리 없이 쌓인 시간. ©사진: 솔라리움 카드
까만 하늘 위 색색의 폭죽이 터지는 사진을 고른 다리아는 원하는 바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마음껏 꿈꾸는 삶으로 변화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리아의 열망을 내 손에 쥐고 일어나 다리아가 되어 말했다.
“나, 더이상 어떤 시선도 의식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이 하는 말을 쫓아갈래. 이제 자유로워질 거야.”
즉흥연주를 하듯, 소통하며 조금씩 움직이는 몸
처음부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로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러다 누군가 불완전한 몸짓으로 극을 시작했고, 대답을 하듯 다른 사람이 불쑥 일어나 새로운 움직임과 언어로 나아갔다.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머뭇거리다 의자에서 일어나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온 목우가 주먹 쥔 손을 치켜올렸다. 내가 ‘지금의 상태’를 대변하기 위해 고른 사진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사진 속에는 마구 자라난 억센 덩굴에 덮인 창문이 담겨 있었다. 안에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창이었다.
“답답해.”
그녀의 첫 마디에 가슴이 자근자근 밟힌 것처럼 아파왔다.
보이지 않는 창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두드리며 허공을 내리치는 손짓에 속도가 붙었다.
“나가고 싶어. 열어줘! 거기 누구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녀가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자 곧 나드가 합류했다. 목우의 조용하고 구슬픈 목소리가 나드의 쩌렁쩌렁한 고함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소리들이 융화됐다. 그에 대비되어 두 팔과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자신의 몸을 벽으로 만들어 끈질기게 두 사람을 가로막는 쟤. 우리는 즉흥적인 재즈 연주를 하듯 악사가 되었다.
▲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최종 리허설. 몸에 고여 있던 말들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사진: 김덕중
▲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신청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아무런 논의나 계획 없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고, 창조적으로 기능하며, 서로의 몸짓들을 뒷받침하고 엮어나갔다. 다른 사람이 어떤 움직임으로 나의 경험을 묘사하는지, 지금 내 마음이 그런 묘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충실하게 느끼려고 노력했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이 완결되는 기묘한 안정감과 함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타인의 체온처럼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소통을 위해 움직이는 몸이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 미끄러지는 대화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어느 날부턴가 수업이 시작되고 대략 20분 정도가 흐르면 고개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등이 구부정해졌고 몸의 왼쪽과 오른쪽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정자세로 똑바르게 앉아있을 수 없을 만큼 목이 흔들렸다. 거기에 갑작스러운 가정의 불화, 학우들의 집단 따돌림. 마음과 몸은 함께 휘청거렸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안면이 찌그러졌으며 연하장애로 인해 음식물을 잘 삼킬 수 없어 죽만 먹었다. 약을 복용하면서부터는 낮부터 저녁까지 어지럼증과 구토감에 시달렸다. 누워 있어도 통증으로 잠들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됐다. 암기능력이 떨어져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외워도 다음 날이 되면 희미해졌다. 학업을 이어갈 도리가 없었다. 가장 두려운 점은 바로 그것, 기억력이 쇠미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떠올릴 수 없는 장소와 얼굴이 눈앞을 부유스름히 스쳐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메모장에 하루의 일과를 눌러 적는 것뿐이었다.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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