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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에게 상처를 주는 ‘악역’을 연기하며 깨달은 것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⑥ 그 일은 사소하지 않았다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에게 연극은 초등학교 학예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대학에서 PPT를 띄워 두고 발표하는 것도 연극이라면 연극이겠지만, 거기서는 머리에 정리된 말들만 또박또박 전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은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내야 한다.


쟤, 목우, 다리아, 나드. 배우들이 각자 연습실 바닥에 앉거나 엎드려서 흰 종이에 무언가 쓰고 있는 모습. 출처: 다른몸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짧은 연극에서, 여섯 명의 배우는 모두 자기 연극의 주연이자 다른 연극의 조연이다. 인물들의 역할을 선악으로 나눈다면, 타인의 연극에서 맡는 역할은 악역이 좀 더 많다. 나는 딸의 임신 가능성이 건강보다 궁금한 아버지이기도 하고, 요양병원에 새로 들어온 ‘젊은이’에게 훈수를 두고 TV를 보며 드라마 속 며느리를 꼴도 보기 싫다며 욕하는 꼴통 환자이기도 하다.


이 역할들은 어느 정도 무난하게 넘어갔다. 내가 주연일 때도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나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 때, 나는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원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예상치 못하게 경험한 일들이었지만, 연극에서는 내가 편집하고, 파악하고, 조정할 수 있다. 편집권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연극을 준비하며 가장 힘들었던 날은 아파서 빠진 날도 아니고, 9시간 동안 내리 연습한 날도 아니었다. 타인의 이야기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만약 나와 그가 단지 경험을 나누기만 하는 자리였다면, 우리는 “저도 그랬는데! 그때 많이 힘드셨겠어요.”라는 말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 위로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주인공인 연극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낸 말을 내가 남에게 해야 했다.


 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신청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 몸이 낫기만을 바랐다. 아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그러지 말라고 했고,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내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했다. 나의 질병은 본인이 내킬 때만 수용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아픈 내가 건강해져서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잘 벌길 바랐다. 나의 질병은 그에게 부담이었다. 그는 안 아픈 나의 모습만을 사랑했다. 건강하지 않고 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나는 사라져야 했다.


홍수영 배우(의자에 앉은 이)가 주인공인 연극에서, 나는 그에게 상처를 준 전 애인 역할을 했다. 출처: 다른몸들


이번 연극에서, 나는 한 사람의 전 애인 역할을 맡았다. 서툴게 진심을 표현하고 사랑을 말하며 행복을 주었지만, 끝내 아픈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 어느 대사를 마주한 후, 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표정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말에는 망설임이 묻어 나왔다.


그: (천진한 얼굴로) 아까 터미널에서 너랑 닮은 여자를 봤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 네가 나으면 그런 모습일 것 같아서 자꾸 돌아보고, 보고, 또 봤어. 너무 예쁘더라.


나는 애인의 나을 수 없는 몸이 낫기만을 바라며, 주인공의 질병이 티가 나지 않는 모습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이어지는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은 마치 나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저 대사에 이입해야 했다. 그를 사랑한다면서 그의 삶을 부정하는 말을 천진하게, 진심으로 해야 했다. 나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연습이 끝날 때까지도 나는 그 말에 이입하지 못했다.


내가 실수를 반복해서 주인공은 그 말을 세 번이나 들어야 했다. 마지막 시도가 끝난 후 그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스트레스로 심한 두통을 겪었다.


나는 연출을 맡아 우리를 지도해 주는 분께 나의 기억, 경험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 묘책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수정해야 할까. (기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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