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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차별을 금지하지 않으면, 고통은 대를 잇는다

유년의 트라우마를 그린 그래픽노블 『바늘땀』


『바늘땀』의 화자인 ‘나’는 여섯 살, 늘 침묵과 전운에 휩싸인 집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툭하면 문짝을 후려치듯 닫고 혼자 방에 숨어서 흐느끼거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빠져있다. 의사인 아빠는 모르는 척 방관하고, 지하실로 내려가 샌드백만 때릴 뿐이다. 형은 시끄럽게 북을 두드리고 ‘나’는 자주 아프다.


▲ 데이비드 스몰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노블 『바늘땀』(이예원 옮김, 미메시스)


‘나’는 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한창 부흥하는 시기의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의사들은 과학의 전사이자 영웅처럼 보였고, 엑스선이 어떤 병이건 말끔히 치유할 기적의 광선이라고 믿었다. 아빠는 부비강과 소화계가 약했던 ‘나’를 치료한다며 엑스선을 수차례 쏘았다.


열한 살 때 ‘나’는 목에 혹이 발견된다. 엄마는 걱정은커녕 병원비가 든다느니, 찬물을 끼얹었다느니 하며 ‘나’를 비난한다. 지인들은 서둘러 병원에 가라고 당부하지만 정작 엄마아빠는 자동차와 가구를 사들이느라 ‘나’의 치료를 보류한다. ‘나’는 삼 년 뒤에야 수술을 받는다. 간단한 혹 제거술이라고 했는데 깨어보니 갑상선과 성대 한쪽이 사라져 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퇴원 2주 뒤 ‘나’는 우연히 엄마가 쓴 편지를 발견한다. ‘내’가 암에 걸렸었고 엄마와 아빠가 비밀로 했다는 것. 그리고 엄마는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반복되는 악몽과 밤 공포증에 시달린다. 실험실 포르말린 병에 담겨있는 태아가 뒤쫓아 오는 꿈, 동굴에 갇히는 꿈, 헤매다가 당도한 곳이 무너진 폐허인 꿈. ‘나’는 학교의 권유로 상담을 받게 되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면한다. 그리고 그 즈음 엄마가 레즈비언인 걸 목격한다. 또, 그동안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외할머니의 정신 질환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집을 나오고 차라리 덜 외롭다. 서른 살,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간다. 엄마의 임종을 마주한다.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기묘한 심리스릴러 같은 이 책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작가의 인터뷰를 뒤졌다. 작가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 어려워서, 피해왔다고 했다. 엄마를 그리는 중에도 화면 속 엄마가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고, 실제로 발작처럼 식사하는 도중에 자기 목이 어릴 적 그때처럼 부풀어 오르는 걸 경험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 드러났던 그 순간, 자신이 더 제대로 고통을 직면해야 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작가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고통을 기록하는 일이 고통의 전파가 아니라 고통과의 화해가 될 수 있을까? 그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

▲ 데이비드 스몰 지음, 이예원 옮김, 『바늘땀』(미메시스) 중에서.


누군가 고통에 빠져있다면 데이비드 스몰이 청년기에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홀로 오래 거리를 배회하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도하는 게 비책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기호 씨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앞 챕터에서 말한 것처럼, 너무도 이해받고 싶은 것이 고통의 속성이지만, 고통은 말하면 할수록 온전히 전하거나 이해받을 수 없어서 더 괴로워지고, 주변 관계를 무너뜨리고, 가까운 이들마저 멀어지게 하니까.


그런데 스몰은 여섯 살의 자신과 그때의 어머니를 그래픽노블 안에 그려 넣으면서, 새로운 눈이 생겼다고 했다. 여섯 살 아이에게는 어른들이 거대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것. 동시에 엄마 역시 불행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아이인 내가 책임지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로 보였다고.


『바늘땀』의 맨 뒤에는 작가의 부모 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는 거기에 썼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여유가 생긴 뒤 가족사를 뒤적거려 본 결과, 과묵하고 까다롭게만 보였던 엄마가 조금 다른 빛으로 보인다고. 엄마는 자신이 인지한 것 이상으로 심장과 허파가 많이 아팠다는 것, 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면 레즈비언으로서의 일생에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됐을 거라고. <아무도 그녀의 눈물을 듣지 못했다. 심장은 세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하염없이 흐느끼는 분수와 같다.> 에드워드 달버그의 글이 자꾸 생각난다고.


고통을 발설하는 것 자체가 치유나 예술은 아니지만, 고통이란 것이 아주 사적인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해서,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화해의 비책이기도 한 것 같다. 거기까지 가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 아직은 겁이 나지만 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스몰의 부단한 트라우마 극복과정이 있기 전에, 그러니까 고통와 예술의 상관관계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은 고통의 이유와 책임에 관한 것이 아닐까?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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