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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고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셀프 디펜스를 하는 여성들(2)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삼십대 물리치료사 B의 운동 이야기
그를 생각하면 반달눈에 웃는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눈이 마주치면 반달눈으로 싱긋 웃는다. 그때마다 입 꼬리도 살짝 올라가서 참 순한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그래서 그의 매서운 눈빛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크라브 마가(Krav maga, 현대 셀프 디펜스 개념을 시작한 호신술의 일종) 승급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쨍!”하는 효과음이 날 것 같은 초집중 눈빛이 보이는 순간, 달리는 자세도 방어와 반격의 기술도 스파링을 할 때의 모습도 확 달라졌다.
이 글은 이십대 후반에 나와 함께 운동을 시작해 4년 동안 함께 하고 있는 삼십대 여성의 이야기다.
▶ B의 운동 이야기 ⓒ스쿨오브무브먼트
-왜 운동하러 왔어요?
“몸을 좋아지게 하는 운동을 배우러 왔어요. 제 직업이 물리치료사잖아요. 주로 근골격계 환자분들을 치료하는데, 의료기기를 사용해서 치료도 하지만 신체 교정을 위한 운동치료도 하거든요. 환자분들께 운동을 잘 알려드리려면 운동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고, 그러려면 제가 직접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같이 스터디 하던 물리치료사 분이 선생님의 스쿨오브무브먼트를 소개해주셨어요. <움직임>이라는 책을 번역했고 몸을 좋아지게 하는 운동을 교육한다고요. 그래서 직업적으로 도움받고 싶어서 찾아오게 됐어요.”
-원하던 대로 몸이 좋아지는 운동을 배울 수 있었나요?
“네 맞아요. 여기서 처음으로 힙 힌지(hip-hinge)를 제대로 배웠고요. 발가락을 느끼게 됐어요. 책으로 공부해서 환자들에게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직접 운동하기 전에는 코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도 몰랐고 발의 중요성도 몰랐던 거예요. 직접 운동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정말 많이 넘어졌는데 지금은 안 넘어져요. 일 년에 서너 번은 횡단보도에서 뛰다가 넘어지고 지하철 들어오는 거 보고 달리다 넘어지고 버스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요.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벌러덩 넘어지기도 하고… 낙상사고를 많이 경험한 거죠. 그럴 때마다 신발이 미끄럽다면서 애꿎은 신발 탓만 했어요.
신발을 벗고 맨발로 수련하는 것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됐어요. 쏨(스쿨오브무브먼트 School of Movement의 앞글자를 딴 줄임말)에서는 맨발로 모든 운동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발을 느끼게 됐어요. 신발을 신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맨발로 하니까 발의 한 부분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어요. 발을 움직일 때 엄지발가락이 힘을 잘 써야 하는데 제가 새끼발가락 쪽으로만 딛고 있더라고요. 이런 걸 알고 바꿔가면서 움직임이 좋아지고, 이제 안 넘어지게 된 거예요.”
-교정운동, 운동치료에 대한 관심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셀프 디펜스(Self-Defense)를 하게 된 건가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운동을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출석하는데 그날 시간표에 크라브 마가 수업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하게 됐어요. 해보니까 ‘이거 나한테 필요한데?’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1년 반 정도는 ‘필요하니까’ 한다는 생각으로 했고요. 지금은 ‘재미있어서’ 하고 있어요. 운동하는 날도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늘었고요.”
-왜 셀프 디펜스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해서 이제 10년 차예요. 저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나 혼자 대처해야 하는데 셀프 디펜스를 배워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지금은 괜찮은데 예전에는 무서운 게 정말 많았어요. 밤길에 혼자 다니는 것도 무서웠고 택시 혼자 타는 것도 무섭고 집에 있을 때도 무서웠어요. 집이 3층인데도 밖에서 누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커튼을 걷어서 밖을 보지도 못했어요. 내가 여기 혼자 있는 걸 보고 범죄를 저지르러 올까 봐 불안하기도 했어요.
위험한 일을 직접 겪은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과 미디어를 통해 여성에 대한 범죄나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남자들이 다 싫고 나도 피해자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심각한 두려움을 느꼈던 거예요.”
▶ 스파링 ⓒ스쿨오브무브먼트
-지금은 안 무서워요?
“택시 혼자 타는 것 빼고는 괜찮아요. 혼자 택시 탈 때도 지금은 어떤 게 더 안전한지 아니까 전보다 훨씬 덜 무섭고요.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연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전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무서웠던 거예요. 주먹과 킥이 오가고… 갑작스럽고 놀라는 상황에 놓이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스파링을 하면서 아무도 안 맞을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맞는 게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맞지만, 때리고 찰 수도 있게 됐어요.
누군가 위협적으로 보이기만 해도 무서웠는데, 이제는 한 대쯤은 맞아도 이성을 잃지 않고 대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과 위험에 대한 상상은 더 구체적으로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뒤에서 누가 나를 덮치면 어떻게 하지? 계단 밑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하면?…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오히려 더 무섭지 않아요. 뭘 어떻게 할지 대비책이 떠오르니까요.
지금은 재미있어서 계속하고 있어요. 오래 같이 하는 사람들, 같은 레벨의 동기들이 생겨서 좋아요.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운동이라 더 재밌어요. 제게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 느낌입니다. 저는 이 사회가 마음에 들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도 계시지만 넓게 보면 모두 운동친구예요.”
-또 하나의 사회에서 만난 운동친구라는 표현이 흥미로워요. 운동친구에 대한 얘길 더 듣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흩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려면 날짜를 잡고 시간을 맞추고…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특별한 만남이 돼요. 그런데 운동친구는 일상이 되더라고요. 운동하러 오면 친구들이 있어요. 만나면 좋은데 만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할 것도 없어요.
못 하는 게 부끄럽지 않아요. 나는 당장 못 하더라도 운동친구가 기술을 성취하면 같이 기뻐요.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서로 잘 한다 잘 한다 응원하죠. 그러다 보니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웃겨서 재밌어요.
저는 우리가 초식동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초원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육식동물이 초식동물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언제나 그런 건 아니죠. 흔히 초원의 왕은 사자라고들 생각해요. 그렇지만 초식동물인 기린이나 코뿔소, 코끼리가 과연 사자에게 만만한 동물일까요? 하란 선생님을 보면 돌진하는 코뿔소가 생각나요. 풀을 뜯고 있을 때는 평온한데 건들면 안 되는… 화 나면 장난 아닐 것 같은 느낌이요. 저는 영양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스파링 할 때 서로 맞고 때리다가도 종이 울리면 서로 끌어안으며 씩 웃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돼요. 파트너가 한 대 쳐주는 것이 ‘같이 싸우자. 힘을 내서 나랑 싸우자’라고 북돋아 주는 것 같아요.”
▶ 운동친구 ⓒ스쿨오브무브먼트
-저번에 ‘쏨’에서 몸무게 재는 것 봤어요. 운동하면서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이 커졌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쏨에서 운동하기 전에 살 빼려고 3개월 동안 헬스장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몸무게가 52kg이었는데 48~50kg 정도로 빼고 싶었어요. 연예인 같은 잘록한 몸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절대 더는 안 빠지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마를 대로 말라서 더 빠질 데가 없었던 거죠.
지금은 58~60kg 정도예요. 하지만 살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이 안 빠져서 포기한 게 아니라 제 생각이 변한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몸보다 기능과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몸이 건강하게 커지니까 킥 할 때 소리가 달라요. 파워도 더 있고 안정감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머리카락이 다 갈라졌는데 지금은 모발도 매우 건강해졌어요.”
-다른 여성들에게도 셀프 디펜스를 권하고 싶나요?
“엄청요. 모든 여성이 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정해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랍니다.
위험 상황에 대비도 되고, 다양한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어 매우 좋습니다. 우리는 성장기 때 너무 오래 앉아 지내요. 계속 앉아서 공부하고… 덕분에 매우 제한적인 움직임만 겨우겨우 하면서 자라요. 태어나서 몇 년 동안을 인간답게 움직이기 위해 목 가누고, 뒤집고, 구르고, 기고, 앉고, 서고, 걷고… 그렇게 연습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서서 일하며…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다니요. 결국 좋은 움직임도 다 잃어버리고 건강도 잃게 돼요.
크라브 마가를 하면서 제 삶의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이제 운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제 일상이 됐어요. 운동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요. 운동하면 지치고 힘들 것 같지만... 발전기를 돌리는 것처럼 오히려 활력이 더 생깁니다. 정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아요. 일에 지치면 운동하러 가기 싫을 때도 있는데, 하고 나면 힘이 생기고 마음이 편해지고 좋아요. 운동은 제 삶의 활력소예요.”
▶ 초원의 왕은 정말 사자일까?
B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초원의 왕은 정말 사자일까? 라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로 시작되는 B. 브레히트의 시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 떠올랐다. 몇몇 영웅과 왕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듯, 셀프 디펜스도 강해 보이고 운동을 잘 할 것 같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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