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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그대로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태국 무에타이 캠프 수련기(상)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행자, 탐구자, 수련자로서 태국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절부터 나는 호기심이 많고 질문하는 걸 즐겼다. 다행히 지금도 여전히 늘 질문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배우고 경험하길 몹시 좋아한다. 그리고 아마 그보다는 행운이 따른 덕분에 취미를 직업으로 만들 수 있었다.
현재 나는 요가, 명상, 타이 마사지, 케틀벨 운동, 움직임 교정, 달리기, 셀프 디펜스, 폭력 예방을 교육한다. 관련해서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강연을 한다. 그래서 현재 내 직업을 간결하게 소개하는 말은 ‘건강과 안전 전문가’쯤 될 것이다.
나는 지금 태국 동북부의 이싼(Isaan) 지방, 산골 마을에 있다. 태국에 배우러 다닌 지는 벌써 십 년이 됐다. 처음에는 타이 마사지를 배우기 위해, 나중 5년은 무에타이 캠프(체육관)에서 훈련하기 위해 태국을 오가고 있다.
▶ 집에서 이곳까지 대략 만리(4천km) ⓒFlightera.net
거의 30회쯤 해외를 다녔지만, 신혼여행만 빼고 나머지 스물아홉 번쯤은 전부 배우고 수련하는 여행이었다. 내겐 직업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수련해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여행이 그냥 여행보다 더 재밌다. 대부분 관광지가 아니고 도심이 아닐 때도 많지만, 대신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이것저것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찾아온 국적, 인종, 언어가 다른 학생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며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다.
한 달 동안 여행자, 탐구자, 수련자로서 이 칼럼을 연재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행기도 아니고 운동일지도 아니고 무자수행기도 아닌, 그저 자유로운 산문일 것이다.
산골짜기 무에타이 캠프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세 시간 쌩쌩 달려 이싼 지방 초입에 있는 코랏 (Khorat) 지질공원에 닿았다. 그리고 산속에 있는 무에타이 캠프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지난 4년은 방콕 외곽의 캠프를 찾아가 지냈지만, 이번에는 도시생활을 접고 자연 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인터넷에 어렴풋이 나온 전경 사진에 비해 실제 환경은 훨씬 낙후했다. 그래도 3년 전, 한 달 숙식하며 수련했던 중국 시골의 태극권 학교보다 나아보여서, 이만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샤워기를 트는 순간 아찔했다. 갈색 물이 쫄쫄쫄 흘러나왔다. 변기 물을 내려 보니 아예 시뻘겋다. ‘헉, 이 산골에 내가 또 뭔 고생을 하려고 왔지?’
저녁 시간에 타이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방콕 시내에 유명한 음식점들도 가봤지만, 여기야말로 맛집이다. 음식 맛 좋기로 유명해 한국인들에게 태국의 전라도라 불리는 (그러나 환경은 훨씬 더 척박하다) 이싼 지방의 오리지널 집밥을 맛본 것이다.
캠프에서 지내고 있는 여러 나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시드니에서 왔고, 일 년 넘게 여기서 훈련 중인 싸커스에게 물어봤다. “물이 다 빨간데, 괜찮을까?” 그랬더니 좋은 호텔이나 리조트에 가도 이 동네는 물색이 다 좀 그렇다고 했다. 아마 흙 색깔 같은데, 먹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란다. ‘다들 피부와 건강 상태가 좋은 거 봐선 녹물은 아니겠구나.’ 일단 안심했다.
덧붙여 그가 주요 일정을 알려줬다.
“아침 운동은 6시 30분 시작, 아침 식사는 10시, 오후 운동은 3시 시작, 저녁 식사는 7시!”
▶ 무에타이 캠프에서 오후 운동을 마치고. ⓒ스쿨오브무브먼트
새벽 달리기
나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달릴 때 내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웃고 있다. 그걸 보면 내가 달리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까지 달리다가 힘들어서 걸었던 적은 내 기억에 한 번도 없다.
맹꽁이차가 올라가는 길고 긴 하늘공원 오르막도 끝내 달려 올라갔는데, 여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아침 달리기는 12km다. 그런데 코스가 중턱에 풍력발전기도 있는 지질공원(Geo Park) 산등선이다. 말 그대로 지질학적으로 귀중한 자산이란 뜻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오르막 내리막이 너무 많아서 선정된 것일까?
도저히 앞에 가는 ‘낙무아이’(태국어로 무에타이 선수)를 따라 달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빨리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갈림길을 앞두고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행히 길을 걷던 아주머니에게 손짓발짓으로 선수들 저기로 달려갔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끄덕거리셔서 아무도 없는 길을 묵묵히 경사가 심한 곳은 걷고 내리막은 내달리면서 쫓아갔다.
갑자기 눈앞이 붉어진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따라서 사방이 불그스름해진다. 그리고 저기 경사 끝에 두 점으로 달리는 낙무아이들이 보였다. 찾았구나! 하는 기쁨에 내달렸다. 세상 처음 가장 힘들었던 12km 달리기를 마치고, 스파링 5분 4라운드로 시작해 무에타이 기술 훈련을 하고 세 시간의 오전 훈련을 끝냈다.
익숙해지자 눈에 보이는 것들
나는 정신력을 강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 게다가 특히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문제를 개인의 노력과 정신력 문제로 돌린다. 완전히 부당하다! 이 점을 먼저 밝히고 다시 이어가면, 정신의 힘이 있긴 있다. 그리고 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이럴 때에도 정신력보다는 익숙해지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첫날 난생 처음 접하는 길고 긴 가파른 오르막들을 달리면서 괴롭고 당혹스럽고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그런데 한 번 가 본 길이고 한 번 경험해 본 느낌이라고, 둘째 날은 좀 달랐다.
달리는 길옆으로 자유로이 거닐며 건초를 먹고 있는 소와 송아지가 보였고, 뒷모습만 보고는 말이 틀림없다고 단정 짓게 만들었지만 앞모습까지 보니까 말인지 소인지 고민스럽다가 마침내 소라는 걸 알아차리고선 화들짝 놀라게 만든 다리가 길고 몸통이 늘씬한 회색소도 보였다. 풀만 먹고서도 어떻게 저렇게 우람한 근육질이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커다란 물소도 봤다.
나무가 많지만 건기라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고 붉은 흙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게 마치 사막을 달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 지 30분 쯤 되는 4~5km 사이 어딘가에서 언덕 너머 길 위로 붉은 해가 뻘겋게 달아 온다. 완만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인데, 뭔가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바다가 아니라 산이고 일몰이 아니라 일출이지만, 영화 <칼리토>(Carlito’s Way, 브라이언 드 팔마, 1993)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 새벽 언덕 달리기 ⓒ스쿨오브무브먼트
여전히 달리기 코스를 내내 달릴 수는 없었지만, 첫날에는 그렇게 힘들었던 오르막을 때로는 전봇대, 때로는 나무를 이정표 삼거나 혹은 걸음수를 세며 더는 못 달릴 것 같을 때 걷고 힘이 좀 나면 다시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날은 걷지 않고 내내 달릴 수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는 식상한 이야기가 와 닿는다. 익숙해지면 더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소소하지만 즐거운 것들이 느껴진다.
발란스! 발란스!
“발란스! 발란스!” 무에타이 훈련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균형을 잡지 못 하면 제대로 킥을 할 수 없고 날아오는 킥도 제대로 막을 수 없다. 어찌어찌 킥을 하거나 펀치를 해도 제대로 파워가 실리지 못한다. 무에타이는 서서 하는 레슬링이기도 하다. 중심을 잃으면 바닥으로 휙휙 내쳐지고 나자빠지기 일쑤다.
태국 낙무아이들의 균형 잡힌 움직임을 보면, 넘치는 파워가 딱딱하고 둔탁한 게 아니라 부드럽고 사뿐해 보인다. 마치 한국 야구선수들의 스윙이나 피칭이 그러하듯 말이다. 미트나 헤비 백 훈련을 할 때의 모습은 무시무시하면서도 정말 아름답다. 발끝에서 머리끝과 손끝까지 하나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힘을 발사한다.
물론, 외국인 수련자는 결코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 엘리트 스포츠(야구, 축구 등)가 그렇듯이 어릴 때부터 삶을 온전히 기술에 헌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다섯 살이면 (판잣집 같은) 시골 체육관 한 켠에서 무에타이 연주곡 박자에 맞춰 발을 까딱까딱 구르며 놀다가, 여덟아홉 살이면 흔히 아버지나 친인척을 따라 엄격한 훈련에 돌입하고, 열두 살이나 그보다 더 어려서 전문 체육관에 차출돼 집과 가족을 떠나 다른 선수들과 합숙생활을 해야 한다. 이미 십대에 프로 전적 세 자리수를 훌쩍 넘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훈련하면서 힘이 들면 억지로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스파링 하면서 상대를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집념(사실은 잡념)이 아니라 웃으면서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 무에타이 시합 전에 하는 와이크루 람무에이 ⓒ스쿨오브무브먼트
익숙함과 낯섦을 오가기
내가 익숙하게 하는 것들만 한다면, 나무랄 데 없이 잘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잘 하는 것만 하면 실력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즉 내가 실력 좋은 셀프 디펜스 강사일 수는 있지만, 무에타이 캠프에 오면 뭐뭐 조금 할 줄 아는 초보자일 뿐이다.
운동 능력 향상을 위한 운동과학 프로그램을 보면, 익숙함과 낯섦을 오갈 것을 권한다. 익숙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점점 실력을 기르다 정해진 어느 시점에 낯선 즉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는 것으로 퍼포먼스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익숙함과 낯섦을 오가는 것이 단지 육체적인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는 효과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체 삶에도 분명 좋은 효과가 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 내가 꾸준히 해오던 것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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