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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내게 쉼이고, 로망이다”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셀프 디펜스를 하는 여성들(1)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


사십대 프리랜서 디자이너 A의 운동 이야기


우리 체육관에는 오랫동안 꾸준히 운동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연령대로 나누기로 했다. 40대, 30대, 20대 각 학생들의 이야기 세 편을 연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만날수록, 누구에게나 평범해 보이지만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가 있었다. 세 명의 이야기, 상/중/하로 끝맺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인터뷰 시리즈에 숫자를 붙여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른 이야기들을 더 길어올리기 위해서다.


운동하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른 이들이 읽을 수 있게 기꺼이 허락해 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인터뷰는 4년 동안 함께 운동하고 있는 사십대 여성 A의 이야기다.


-우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벌써 4년이네요.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삶은 어떤가요? 일하는 날, 쉬는 날 잘 지키면서 일하세요?


“디자인 일이라는 것이 마감 기한에 결과물을 내면 되는 일이예요. 제대로 풀면 정확한 답이 나오는 수학 공식처럼 한 가지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쉼이 어려운데요, 제가 일하는 스타일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작업 일정을 체크해 미리부터 고민하고, 계속 고민하고… 뭔가 더 나은 솔루션이 없을까, 뭘 고치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끝까지 의심하는 편이거든요. 요새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 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이라고 많이 말하잖아요. 저는 워라밸이 잘 안 되는 사람, 일이 우선인 사람이죠.”


▶ 책과 어울리는 사람, 프리랜서 디자이너 A씨. ⓒ인터뷰이 제공


-회사가 딱 좋아할 사람인데요? 회사 그만둘 때 사장이 붙잡았을 것 같아요.


“일을 하면 돈을 벌잖아요. 대가를 받고 하니 당연히 책임감을 느끼게 되죠. 한참 일할 때에는 일 잘하는 게 먼저가 되더라고요. 일에서 오는 성취감이 제일 큰 삶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 다닐 때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 ‘번 아웃’(Burn Out)이 온 거죠. 사장님은 더 같이 일하고 싶어 하셨지만, 그 상태로는 회사에서 제 일을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회사를 나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필라테스도 하고, 피트니스에서 개인레슨도 받아보고 했는데요. 스쿨오브무브먼트는 제일 꾸준히 다니고 있는 곳입니다.”


-어렸을 때 도장이나 체육관을 다니거나 운동을 배워본 적 있나요?


“아뇨. 전혀 없어요. 내 자신이 완전히 지쳤다고 느낀 사십대에 운동을 시작한 거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일을 제대로 떼어두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도 운동 덕분에 예전처럼 소진되지 않고 일할 수 있어요. 운동할 때가 정말 좋아요. 저에게는 운동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입니다. 일에 대한 끝없는 생각을 멈추게 해줘요.”


-운동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었군요. 생각을 쉬게 하는데 운동이 제일 도움이 되나요?


“일에서 좀 물러나 있고 싶을 때 운동하는 것 말고도 영화나 미드, 영드를 보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운동만큼 일 생각을 싹 잊게 하는 것은 없더라고요.


책 읽는 것도 참 좋아하는데요. 책 읽는 걸 제 쉼 목록에 넣지는 않아요. 제가 책 디자인을 하잖아요. 그러다보니 서점에 가면 나도 모르게 읽고 싶은 책보다는 일과 관련된 책을 손에 들고 있더라고요. 표지 디자인에 눈이 먼저 가고요. 막상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어도 어느 순간 본문 디자인이 보인다든가, 띄어쓰기가 눈에 들어와요. 그래서 생각거리가 많을 때는 예전만큼 책을 집중해서 볼 수가 없더라고요.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볼 때도 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원작이 있는 걸까? 저 내용은 책에 어떻게 표현돼 있을까? 저런 미술적 요소는 내가 하는 디자인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이러죠.


그런데 운동은요, 크라브 마가(Krav maga, 현대 셀프 디펜스 개념을 시작한 호신술의 일종. 1930년대 동유럽의 이미 리히텐펠트(Imi Lichtenfeld)가 창시, 1970~1980년대 전 세계로 퍼져나감) 시간에는 온전히 운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집중하지 않으면 크라브 마가 기술을 배울 수가 없고요. 또 집중하지 않으면 훈련하다 다칠 수 있으니까요. 일 생각이 끼어들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운동은 제 삶의 ‘쉼’입니다.”


▶ 크라브 마가(Krav maga) 수업 ⓒ스쿨오브무브먼트


-처음에 어떻게 크라브 마가를 배우게 됐나요?


“제가 요가 수업하고 툴 수업(체력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건 선생님이 크라브 마가 수업은 왜 안 들으세요? 한 번 들어보시죠! 하시는 거예요. 궁금하긴 했는데 두려움이 좀 있었어요.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나 싶어서요.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운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사십대 여자가 격투기술이 있는 운동을 배운다는 건 흔치 않잖아요.


격투나 무술은 주로 영화나 드라마 액션 장면, 경호원 또는 체육 전공자들이 하는 걸로 접하고, 여성의 경우 더 특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보통 사람들도 운동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거죠. 어릴 때는 누구나 한 번쯤 태권도, 쿵푸, 합기도, 특공무술, 검도 도장 등에 다닐 수 있지… 하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선뜻 들지 않았어요.”


-크라브 마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네 살 더 나이 들었잖아요? 나이를 더 먹고 있는데 왜 계속하고 있는 건가요?


“나한테 무척 도움이 되고 필요한 운동이니까요. 재미도 있고, 성취감도 느껴요. 예전에는 안 되던 게 어허! 이제 되는구나 하는 걸 느껴요. 성장하고 있는 거죠. 눈에 보이게 쭈욱 계속 올라가는 성장은 아니고, 계단식 성장이요. 변하는 것, 잘하는 것 하나 없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한 계단 쑤욱 올라가는 그런 성장이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같이 하는 운동의 즐거움도 있어요.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치면서 하는 운동의 묘미가 있어요. 친구가 되고 동료의식을 느껴요. 일이 힘들고 또 사람관계가 힘들기도 해서 제 자신을 닫아놓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닫힌 부분이 좀 열린 것 같아요. 서로 도우면서 좋은 에너지를 받습니다. 함께 해나간다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있어요. 이런 게 나이를 먹어도 즐기면서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나 봐요.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많이 걷는 날은 혼자 15km를 걷고, 해외여행도 주로 혼자 다녀요. 그럴 때 크라브 마가를 배우기 전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준비돼 있는 기분이 들어요.”


▶ 레벨 테스트 ⓒ스쿨오브무브먼트


-아무래도 우리가 사십대다 보니, 이삼십대 때의 컨디션과 지금을 비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올해 46세가 되었는데, 예전과 비교해서 어떤가요?


“한동안 몸 움직이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어쩔 수없이 차를 몰고 다녔고,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또 차에 익숙해지니까 잠깐 걷는 것도 힘들었죠. 체력은 운동과 상관없이 살았던 이십대보다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아요.


기계를 안 쓰고 그냥 두면 빨리 녹슬잖아요. 몸도 비슷한 것 같아요. 계속 적절하게 쓰고 활동해주면 더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머리도 마찬가지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어떤 한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능력이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기억력이 감퇴했더라도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 능력이 길러질 수도 있고요. 몸과 정신이 나이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갈고 닦아서 더 오래 가려고요.


집에 가서 남편 세워놓고 기술 연습할 때가 있어요. 레벨 테스트 기간이 되면 더 자주 연습하는데요. 그럴 때면 남편이 여기가 태릉선수촌이냐고 농담을 해요. 때로는 ‘그게 뭐냐’면서 놀리기도 하는데요… 킥이나 펀치 폼이 훨씬 나아졌다고 하고, 푸쉬업하면 이제 제대로 올라온다고 하고, 실력이 늘긴 늘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가 운동신경 없는 게 아니라고 인정하더라고요.


운동하는 동안 오롯이 집중하고, 내 몸을 잘 쓰고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를 쉬게 하고요, 땀 흘릴 때의 개운함, 소소한 성취감 등이 재밌어요.


제가 또 육체적으로 강한 여성에 대한 로망도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친구네가 서점을 했는데, 저한테 <영웅문>을 빌려줘서 18권을 2박3일 동안 잠도 안 자고 다 읽었어요. 검을 휘두르는 강한 여자 캐릭터에 엄청 빠졌어요. 대학교 때는 또 무술 게임에 꽂혀서 버추어 파이터(Virtua Fighter), 철권을 열심히 했는데, 꼭 여자 캐릭터로 싸웠어요. 머리 양 갈래 묶은 동양여자 캐릭터! 그렇게 해서 이기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여자 히어로를 좋아했네요.”


▶ 전방 낙법 ⓒ스쿨오브무브먼트


-강한 여성에 대한 로망, 그것에 가까워진 것 같나요?


“만 분의 일이라도, 아니면 그것보다 작더라도 예전보다 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아직까지 본격적인 크라브 마가 기술을 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을 겪은 적은 없어요. 그리고 누구도 그런 상황에 놓일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것을 상상해본 적은 있어요. 그런 경우, 저는 첫 번째로 안전한 피신을 선택할 거고요. 피신할 수 없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무엇이든 해서 나를 지키려고 할 거예요.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약자가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도 상상해봤어요.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예전보다 자신감을 갖고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알지 못해서 도울 수 없었고 그래서 돕겠다는 생각도 안 들었는데, 이제는 도울 수 있는 것들을 알게 되니 조금이라도 더 용감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은 밤에 겁이 많은 친구랑 한적한 길을 걷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지나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친구를 그 사람과 먼 쪽으로 보내고 술 취한 사람을 주시하면서 친구를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서 걷고 있었어요.”


-다른 여성들에게도 셀프 디펜스, 크라브 마가를 권하고 싶나요?


“당연히 추천해요! 100프로 200프로요. 저처럼 셀프 디펜스에 관심은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계신다면, 일단 해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처음엔 당연히 잘 못할 거예요. 사실 잘 한다, 못 한다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요만큼이라도 늘었다면 잘 한 거고요. 컨디션에 따라서 오늘은 어제보다 못할 수도 있죠. 그래도 잘 즐겼고, 뭐라도 도움이 됐다면 참 잘 한 거예요.


우선 좋은 운동이니까 권하고 싶어요.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지’, ‘세상이 위험하니까 셀프 디펜스를 배워야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세상이 되길 바라지 않거든요. 셀프 디펜스 기술이나 킥과 펀치 말고도 구르기, 쫓고 달아나기, 이런 좋은 움직임들을 어디서 해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심리적, 정신적 준비가 돼요. 위험 상황에서 소리쳐서 도움을 구할 수는 있겠다, 주저하지 않고 도망갈 수 있겠다, 급소라도 차서 무조건 당하지는 않겠다는 준비가 돼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사회안전망이 매우 약해요. 부자들이 아니면 누구나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나라죠. 그래서 저는 건강하게 늙고 싶어요. 건강한 할머니, 운동 잘하는 할머니, 육십대에도 약자를 보면 도와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 “갈고 닦아서 더 오래 가고 싶습니다.” ⓒ인터뷰이 제공 사진


A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자신이 소심한 사람이고, 쓸거리 없는 인터뷰가 됐을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인생은 미스터리 같다’던 그의 말대로, 인터뷰 파일에는 분량 때문에 다 옮기지 못한 아까운 얘기들이 남았다. 같은 사십대 동지로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덕분에 건강과 운동에 관한 내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십대에 운동을 한다면 ‘열심히’보다 ‘적절히’가 중요하다. 사실은 이십대에도 그렇다. 아주 젊어서 영광을 누리고 보통 사람들이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하게 되는 엘리트 운동선수가 아니라면 모두 그렇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원래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평생 건강하게 운동하려면 먼저 그럴 수 있는 사회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개인의 열정과 노력은 그 다음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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