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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민주화, ‘우산혁명’의 현장을 찾아서

자치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다 (구리하라 준코, 시미즈 사츠키 정리)



홍콩에서는 중국 중앙 정부의 선거 개입에 반대하며 2014년 9월 28일부터 12월 15일까지 시민들이 거리를 점거한 채 비폭력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홍콩 전 지역에서 1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시위를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 경찰이 최루액과 살수차를 동원해 진압하자 시민들이 우산을 들고 이를 막아낸 것에서 기인한 이름)이라고 부른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은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를 적용하지 않고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최소한 50년간 유지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표방했다. 그러나 현실은 베이징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선거 제도도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자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들불처럼 번져나간 우산혁명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국 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하였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홍콩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2014년 홍콩 전역에서 불붙은 민주화 운동은 ‘우산혁명’이라고 불린다. 예술가들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비폭력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우산이 그려진 로고를 만들어 온라인 상에 공유했다.  (Ger Choi 제작)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시점인 2018년 11월 9일,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의 회원과 독자 19명이 새로운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 홍콩을 방문했다. 다음은 홍콩에서 우산혁명에 관련된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가 교류한 내용을 기록 정리한 것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우산혁명 이후, 홍콩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일본 나리타 공항과 간사이 공항에서 각각 출발한 팀이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해 합류했다. 그리고 이번 투어의 코디네이터와 통역을 맡아준 홍콩중문대학 일본연구학과 강사 고이데 마사오 씨와 함께 홍콩 입법회(국회)로 향했다. 고이데 씨는 홍콩에 18년간 살면서 다양한 시민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우산혁명에도 관여했다.


입법회는 홍콩의 중심부인 금종(Admiralty)에 자리하고 있다. 2016년 입법회 의원 선거에서 선거구 최고 득표수로 당선된 ‘민주파’(민주화를 요구하는 의원)의 에디 추(朱凱迪) 의원의 안내로, 입법회 관내를 견학하고 정치 상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 홍콩인들은 베이징 정부의 감시와 정치 개입에 반대하며, 자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사진: pixabay)


우산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민주파’는 우산혁명 이후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일국양제(一國兩制) 속에서 베이징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진정한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노년층 중심의 그룹과,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홍콩에 관한 일은 홍콩인 스스로 정하고자 하는 젊은이 중심의 그룹이다. 청년들 중에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민주파는 2016년 선거에서 70 의석 중 20석을 차지했지만, 그 중 6명이 정치적 이유로 부당하게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또한 젊은 활동가들에 대한 베이징 정부의 단속도 엄해지고 있으며, 정치 상황 역시 혼란스럽다.


‘청년층이 정치에 눈을 뜬 것’이 큰 성과


이틀 차에는 신계(新界)에 있는 중문대학으로 향했다. 이 대학의 준교수이자 우산혁명에서 활약한 정치학자 저우바오쑹(周保松) 씨로부터 우산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 이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우바오쑹 씨를 비롯한 교수들과 학생들은 우산혁명 직전 일주일 간, 대학 캠퍼스와 입법회 앞 광장 등에서 ‘자유에 대해’ 등을 테마로 가두 연설을 진행했다. 역사적인 9월 28일 ‘센트럴 점거 운동’에 호응해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을 해산시키려고 경찰은 최루탄을 발포했는데, 그 첫 최루탄이 저우 씨의 바로 곁에 떨어져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결국 79일 간의 점거는 끝났고, 천 명 가까운 시민이 체포되었다.


▶ 우산혁명에서 활약한 정치학자 저우바오쑹 씨 인터뷰(오른쪽). 저우 씨는 홍콩의 청년들 전체가 정치에 눈을 뜬 것이 민주화 운동의 큰 의의라고 말했다. ⓒ페민 제공


저우 씨는 “우산혁명은 홍콩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주화 저항운동으로 젊은이들 전체가 정치에 눈을 떴다는 큰 의의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체포된 민주화 운동의 리더들에 대한 첫 공판이 2018년 11월 19일부터 시작된다는 소식을 알리며, “우산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누구든 출마할 수 있는 진정한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계속된다”고 강조했다.


홍콩에서는 언론의 베이징 정부 친화적인 편파 보도가 극심해졌고, 저우 씨 역시 중국 본토의 학술회의 등에도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산혁명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소설, 예술 등이 다수 창작되고 있다. 저우 씨는 이의 기록과 보관에 힘을 쏟고 있다.


“세계는 움직이고 있고, 중국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청년들은 앞으로 나오지는 않을지언정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산혁명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들을 지원하고 싶다”고 저우 씨는 이야기를 맺었다.


정치탄압 속 지역 사회에서 움트는 ‘자치’


전 입법회 의원인 라우시우라이(劉小麗) 씨의 이야기도 들었다. 역시 ‘민주파’인 라우 씨는 2016년 입법회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됐지만, 취임 선서가 형식에 어긋난다는 트집을 잡혀 ‘무효’ 처리되고,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2018년 봄과 가을에 치른 보궐선거 입후보도 무효가 되었다.


▶ 정치탄압으로 의원 자격을 박탈한 라우시우라이 씨 인터뷰. 라우 씨는 현재 자신의 이름을 건 민주교실을 열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치 교육을 하고 있다. ⓒ페민 제공


그녀는 베이징 정부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 우산혁명의 점거지 중 하나인 번화가인 몽콕(Mongkok)에서 ‘시우라이 민주교실’을 열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치윤리 등을 강의하고 있다.


라우 씨는 “홍콩은 맞벌이 비율이 높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주변국에 비해 높지만, 여성정치가가 외모나 결혼과 출산 유무로 평가 받으며, 공격도 받는다. 언론에 의한 성차별도 있다”고 여성의 지위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사노동자들이 홍콩에서 저항운동을 배우고, 자국에 돌아가 그룹을 조직해 성평등을 호소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등, 홍콩의 문화와 사회적 활동이 해외의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도 말했다. 라우 씨가 다시 의원이 되어 홍콩의 정치 영역에서 활약하길 바라본다.


오후에는 홍콩의 구룡 번화가에 있는 비영리단체 ‘픽싱 홍콩’(Fixing HongKong, 維修香港)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픽싱 홍콩은 우산혁명에서 만난 사람들이 함께 시작한 조직이다. 지역 사회를 돌면서 냉장고와 텔레비전 같은 가전제품과 주택설비를 수리하면서 주민 네트워크를 만들며, 나아가 홍콩 자체를 ‘고치고’(fixing) 민주화하고자 하는 단체다.


이 지역에는 새로운 지하철역이 건설되고 있어 땅값이 올랐다. 주민들은 집세가 올라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되는 한편, 철거 압박도 받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집주인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지만, 임차인에게는 어떤 보상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픽싱 홍콩’ 활동가의 안내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는 거리를 둘러본 후, 마침 사무실에서 진행 중이던 지역민 대상 요리교실에 함께 참여했다.


▶ 우산혁명에서 만난 사람들이 조직한 단체 ‘픽싱 홍콩’(Fixing HongKong). 홍콩 구룡 번화가에 있는 낡은 아파트 옥상에서 활동가들이 설명하는 모습. 낡은 가전제품과 주택 뿐 아니라 홍콩 전체를 고치고(fixing)자 한다고. ⓒ페민 제공


즐거운 집회문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는 분위기


사흘 차 오전에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관한 전시 코너도 있는 홍콩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오후에는 우산혁명의 점거지구였던 곳을 돌았다. 코디네이터인 고이데 씨가 직접 경험한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에, 우리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며 우산혁명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이번 홍콩 투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산혁명 이후 베이징 정부의 압력이 점점 강해져 홍콩인들이 무력감을 느끼며 압도당하는 듯한 엄혹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망은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입 모아 말했다.


지금도 집회의 참여인원은 줄었을지언정, 집회가 열리는 횟수는 줄지 않았다고 한다. 또 정치적 저항운동 자체를 즐기는 홍콩 사람들의 밝은 집회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포용력 있는 사회 분위기는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자세에 용기를 얻고, 많은 것을 배운 여행이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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