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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한…이동하는 북한여성, 내 ‘집’은 어디인가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북한 이탈 여성의 친밀성 재구성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남한에 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북한 여성 P씨


중국 접경지역에는 북한 여성들의 아지트가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북한 여성들이 잠시 쉬어가는 그곳은 중국에서 이제 꽤 자리를 잡은 A씨의 집이자 직장이다. A씨는 중국 대체의학을 배워 발마사지를 겸한 자그마한 병원을 자신의 집에 차렸다. 고단한 타국살이에 지친 북한 출신 여성들이 하나둘씩 그곳에 모여들었다. A씨의 집에서 발마사지도 받고, 몸에 좋다는 약도 나눠 먹으면서 잠깐 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리는 대부분은 북한 정부로부터 사사여행 허가증을 발급받아 중국으로 넘어온 이들이다. 중국 내 친척이 있을 경우 발급되는 사사여행증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 중국 체류를 허용한다. 하지만 사사여행자 중 기한 내에 돌아가는 이는 거의 없다. 어렵사리 중국에 온 북한 여성들은 체류 기한을 넘겨 가면서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운이 좋은 몇몇은 북한의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다른 몇몇은 중국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중국에서조차 살기 어려워진 또 다른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의 이주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곳을 스쳐 지나간 그녀들의 삶은 그렇게 같으면서도 다르게 진행되어 간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 ©김성경


아주 추운 겨울날, 그 ‘아지트’라는 곳에서 P씨를 만났다. P씨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면서 온갖 힘겨운 일을 하다가 작년에 한국으로 이주했다. 여기까지는 내가 그동안 만난 수많은 북한 여성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P씨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예전에 일했던 조선족 집에서 돌봄 노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그녀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라면, 이제는 합법적 신분으로 중국에 머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까?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서 이렇게 사는 거에요.”


별다른 질문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P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신세 한탄을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이 자식 버리고 중국에 나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중국에서 수년을 버티다가 한국까지 간 용감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힘이 없다.


“한국이 힘드셨어요?”


이제야 겨우 질문을 생각해내니, 너무 외로웠다는 답이 돌아온다. 죽을 고비를 넘겨 도착한 곳인데, 이제는 작지만 살 집도 있을 것이고 본인이 열심히 일한다면 중국보다는 더 나은 임금도 받을 텐데. 중국에서도 혼자 삶을 꾸려갔던 그녀가 ‘고작’ 외로워서 다시 이곳을 찾아오다니. 한국 사회가 각박해서일까? 아니면 중국에서의 삶이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마음속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중국을 오가면서 장사로 가족 생계를 꾸려왔던 P씨는 불법 도강으로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보내졌고, 이후 그곳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다시 월경하였다.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에는 북한에 머무는 것이 힘들어져 더이상 북한을 오가며 장사를 못 하게 되었다. 중국에 남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북에 남겨진 딸과 아들에게 돈을 보내며 수년을 살았다. 하지만 결혼한다는 딸아이와의 연락이 끊기면서 점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몇몇 집을 전전하면서 노인 돌봄을 하면서 살아가던 중 한국으로 갈 기회가 생기자 미련 없이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P씨가 한국에서 마음 붙일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 의지하고 살았던 친구들도 그리웠고, 자신이 돌보던 조선족 할머니가 잘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불법적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국에서도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는데 한국은 뭔지 모르게 답답하고 주눅 들기 일쑤였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다시 중국으로 가서 지내보자는 심정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는 북한 소식을 전달해주는 “선”도 훨씬 더 많다. 알음알음으로 연결된 화교들이 소식이 끊긴 딸을 수소문하고 있다. 여기서 겨울을 따뜻하게 나고, 딸 소식도 기다리면서 지내다가 곧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정말 열심히 살겠다는 결심 또한 잊지 않는다. 다른 생각 말고, 한국에 적응하겠다는 그 다짐 말이다.


돌봄 노동, 결혼, 식당, 유흥업소…조선족 여성의 빈 자리


북한 여성의 이주는 다층적이다. 언론이나 학계는 이들의 이주의 복잡성에 주목하기보다는 특정한 이미지나 고정관념을 생산하는 데 급급했다. 배고픔, 인신매매, 강제 북송과 고문 등과 같은 ‘폭력’은 이들의 삶에 대한 키워드가 된 지 오래다. 참혹한 ‘폭력’을 가시화하면 할수록 이들의 주체성과 끈질긴 삶의 전략은 자취를 감춘다. 불쌍한 피해자라는 고정관념에 적합하지 않은 그 어떤 모습도 허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나타난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며 무시하거나, 한국 사회가 믿어온 그 모습으로 행동하도록 강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가 제한된 북한을 떠나와 중국에서 불법 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살아온 그녀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재이주를 떠난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가 ‘믿어 온’ 혹은 ‘믿고 싶었던’ 북한 여성의 이주가 결코 하나의 형태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태국의 북한 난민 보호소. ©김성경


그렇다면 그녀들은 왜 이동하는 것일까? 우선 북한에서 중국으로의 이주를 감행한 이유와 배경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1990년대 북한의 최악의 식량난은 북한 체제 전반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구축된 ‘계획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배급제가 무너졌다. 그나마 계획경제체계 내 직장을 가진 남성노동력 대부분은 경제난의 상황에서도 국가의 통제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여성노동력 특히 결혼한 여성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이에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는 여성의 책임이 되어버린다.


초기에 북한 여성은 원시적 형태의 장마당을 만들어 집안의 물건을 내다 팔거나 음식을 만들어 팔아 가족이 먹을 식량을 구하는 것에 머물렀다. 하지만 더이상 팔아 치울 것조차 없어지자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가능하지 않았던 몇몇은 돈을 벌고자 국경을 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의 대부분은 가족의 생계였다. 집에 있는 아이들과 늙어 움직일 수 없는 부모, 혹은 무기력하게 술만 마시는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성들은 국경을 넘게 된 것이다.


때마침 중국 내 대도시 혹은 한국으로 노동 이주를 떠난 조선족 여성들의 빈 자리가 북한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남겨진 아이나 노인을 돌보는 돌봄 노동, 식당이나 공장의 일자리, 조선족이나 한족 남성과의 결혼, 맛사지 숍, 노래방, 술집에서 일하는 유흥업종까지 북한 여성이 자신의 불법적 신분을 숨길 수 있는 곳은 하나같이 ‘젠더화 된 공간’이었다.


중국에서 북한 여성에게 허용된 공간은 비가시적이다. 공적 영역의 이면에 숨겨진 영역이라는 뜻이다. 불법적 신분인 이들은 국가의 통제나 공식 시장이 아닌 사적 공간을 파고들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예컨대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돌봄 노동은 작은 살림집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그 누구도 이들의 존재를 감지하기 어렵다.


가끔씩 방문하는 조선족 노인의 자녀들은 그녀들이 불법적 신분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한다.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데다, 갈 곳이 없는 북한 여성들은 쉽사리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점 또한 장점으로 작동한다. 한 달에 중국 돈으로 2천~3천 위안이면 북한 여성을 구할 수 있다. 지낼 곳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북한 여성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숙식을 해결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돌봄 노동을 선호한다.


식당 일자리의 작동도 비슷한 구조다. 깊은 산속 관광지 식당 같은 경우에는 여관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곳에서 북한 여성은 역시 비슷한 임금을 받으면서 청소, 빨래, 음식, 그리고 심지어는 텃밭 농사까지 도맡아 한다. 적은 돈이지만 받는 임금은 꼬박꼬박 모아 북한으로 송금하고, 인심 좋은 주인집에서 내놓는 옷가지나 기타 생필품도 고스란히 북한으로 넘어간다.


조선족이나 한족과 결혼한 북한 여성의 경우에는, 중국에서의 결혼으로 아이를 출산하기도 한다. 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농촌 지역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은 터라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그녀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진다. 북한에 남겨둔 자녀에게 정기적으로 송금하는 것도 점차 어려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사일에 앞이 막막해지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북한 여성이 교육 정도가 낮은 조선족이나 한족 남편에 만족하며 사는 것도 점차 어려워지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이들일수록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난 북한 여성은 두 가지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는 어떻게든 중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는 자녀와 남편이 있으면 이 결정은 비교적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자녀가 성장해서 독립을 했거나, 자신의 부재로 가족이 해체된 경우에는 북한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또 다른 결정은 더이상 불법적 신분으로 가슴 졸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이주해서 ‘합법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삶, 모든 것을 유예한 채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 살아왔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이행하기란 쉽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보위부와 법관에게 줄 뇌물과 가족과 이웃들에게 줄 선물까지 마련해야 한다. 귀환 결심을 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북한 여성이 많은 이유다. 한국행도 마찬가지다. 수소문해 적당한 브로커를 구했다고 해도, 수천 킬로에 달하는 길을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북한으로, 남한으로 다시 발걸음을 뗀 이들은 이제 행복해질까? 이제는 자신들의 장소를 만들고, 그곳에 가족과 정주하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그녀들의 집은 어디인가?


북으로 돌아간 그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무소식이 희소식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북한에 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왔다는 북한 여성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막상 북한으로 돌아가 보니, 가족들이 반기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이들도 있다. 정기적 송금이 끊기는 것을 아쉬워하는 가족들의 냉대에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다른 가족을 꾸린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껴 다시 중국행을 결심하기도 한다. 제한되어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까닭에, 다시 돌아간 북한 사회가 불편하게 느껴진 것도 크게 작용한다.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녀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집이 이제는 그리 편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북한 혜산의 전경. (2017)  ©김성경


한국으로 이주한 북한 여성의 삶이 고되기는 마찬가지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중국에서 꾸린 가족을 데려와 함께 정착하려 애쓴다. 하지만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인 남편과의 불화는 심해질 수밖에 없고, 중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까닭에 문화며 언어가 익숙하지 아이들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나마 임대아파트에서 주거할 수 있지만, 경쟁적인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닥치는 데로 일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비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삶을 유지하기란 턱없이 부족하다. 북에 남겨둔 자녀에게 송금이라도 하려 하면, 더욱더 치열하게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들을 이등 시민으로 대하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을 경험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불법적 이동을 경험한 이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장 경쟁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는 한국의 노동 강도를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북한에서도 살아나온 사람이 왜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만 한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혹은 합법적 신분이 보장되는 곳에 정주하게 되면 자신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 버텨온 의지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집’으로만 돌아간다면, 사라져 버린 ‘집’을 다시 만든다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텨온 이들이기에 그 실망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절망감은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 몸으로 전이된다. 상당수의 북한 여성이 한국으로 이주한 이후에 정신적, 신체적 질병을 호소하는 것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


P씨가 중국으로 온 이유도 바로 한국으로 온 이후에 심해져 버린 마음의 우울감 때문이었다. 작은 임대아파트에 누워 있으면, 북한에 두고 온 자녀만 생각났다. 이런 마음을 나눌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오롯이 혼자 있다 보니 자꾸 나쁜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중국에 있을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자신에게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그래서 P씨는 다시 중국으로 온 것이다. 돌이켜보니 중국에서 자신이 돌보던 조선족 할머니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줬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던 시간도 그리웠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이 어느덧 익숙한 ‘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나 행색 같은 것으로 사람 무시하지 않는 중국에서 이상하리만치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집’이라는 것이 뭐 별거인가. 잠시라도 그녀가 몸과 마음을 편안히 기댈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녀의 집일 것이다.


북한 ‘어머니’의 죄의식과 송금


북한 여성의 이동을 촉발한 것은 바로 가족의 생계이다. 처음에는 당장 먹을거리를 찾아 이동하던 북한 여성은 이후에는 자녀의 교육과 좀 더 나은 삶을 지원하기 위해서 중국에서의 삶을 버틴다. 중국에 머무는 대부분의 북한 여성의 삶의 목표는 바로 북한에 남겨진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이다. 먹을 것이 풍부한 중국에서 살면서 마음 편하게 식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북한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자녀도 모자라 친척부터 손주까지 부양하는 북한 여성도 있다.


중국에 살면서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북한의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북한에 남겨둔 가족 걱정 또한 쉽사리 멈출 수 없다. 북한에 자연재해라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더 많이 송금하려 애쓴다. 대부분은 자녀와 정기적으로 통화하기 때문에, 더욱 북한의 상황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녀들에게 송금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자, 삶의 이유다. 북한 체제에서 양육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왔기에 한국의 어머니와는 조금은 다른 결의 모성을 실천하지만,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남겨두고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은 씻지 못할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과 함께 있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올수록, 송금이 아이들에게는 더 필요한 것이라는 논리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마을에서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고깃국에 이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의 죄책감은 조금 누그러든다. 몇몇은 자녀들이 송금을 생활비로만 쓰지 않고,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장마당에서 장사를 시작했다는 자랑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다. 어떤 북한 여성은 때때마다 음식과 과일까지 아들에게 보낸다는 이도 있다. 아들이 ‘기죽고 살지 않도록’ 오토바이도 사주고, 전자제품도 중국에서 보낸다.


그녀들의 죄의식은 적어도 두 개의 층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북한이라는 공간의 폭력성을 외부인의 시선에서 볼 수 있게 되자, 그곳을 자신만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근간을 둔 미안함이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밥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들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로 남겨져 있다. 두 번째로는 자녀와 함께 살지 못하는 어미라는 자책이다. 어머니라면 자녀 옆에 있어야 한다는 모성 이데올로기로부터 북한 여성 또한 자유롭지 못함을 드러낸다.


자녀를 향한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멀리서라도 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돈을 보내고, 음식과 옷가지를 사서 보낸다. 자녀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짜내는 데 골몰하기도 한다. 중국어나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습득하도록 자녀를 독려하거나, 중국에서의 돈벌이 정보 등을 자녀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초국적 연결망을 통해 자녀와 끊임없이 소통하려 애쓴다.


흥미롭게도 송금하는 북한 여성은 경제적으로는 어렵게 생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의 “작은 몸뚱이에 북의 가족 사십 명이 달려 있”다는 북한 여성의 말에서는 이상한 힘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말끝에 “나는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선언도 한다. 누가 떠넘긴 책임인지, 그리고 그 책임으로 인해 그녀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적어도 그녀는 먹을 것이 없어 죽어 나가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어쩌면 중국을 떠돌며 여전히 ‘어머니 노릇하기’에 골몰하는 북한 여성들로 인해, 북한에 남겨진 사람들의 생계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가 책임지지 못한 생계, 국제사회가 외면한 북한 사람의 생존, 정치적 정쟁으로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바로 불법 노동자로 떠도는 북한 여성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태국의 북한 난민 보호소 내부 모습. ©김성경


북한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은 P씨의 부탁


P씨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 사는 하나원(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동기가 큰 병을 얻었는데, 그녀에게 약을 좀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흘낏 보니 한쪽 구석에 커다란 비닐봉지 가득 약이 담겨 있는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슨 약이냐고 물었더니, 주섬주섬 봉지를 열어 약을 보여준다. 독일제 약이라면서, 이 약은 중국에서만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약봉지에 적인 영어 설명을 읽어보니, 병을 치료하는 약이기보다는 건강식품에 가까운 듯했다. 한국에 좋은 약이 많은데 굳이 여기서, 그것도 약도 아닌 것을 보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문다.


“혼자서 지금 잠도 못 자고, 아무것도 못 먹고. 불쌍해 죽겠어요. 이 약을 먹으면 그래도 순환이 돼서, 그럼 훨씬 편안해진다고 하니까…”


안타까움이 절절한 P씨의 얼굴에서 그녀의 마음이 읽힌다. 자신처럼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을 친구에게 뭐든 보내고 싶은 그녀의 마음 말이다.


도대체 어머니 노릇이라는 것이 뭐란 말인가. 꼭 생물학적 자녀에게 주는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이, 혼자 아파하는 이,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 내미는 것이 바로 어머니 노릇의 다른 말이 아닐까?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황에 내몰리더라도, 자기보다 약한 이를 돕고자 하는 P씨는 지금도 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서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그토록 자책했던 그 어머니 노릇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그 작은 방의 온기와 그녀의 깊고 까만 눈빛만이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이상하다. 돌이켜 보니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 북한 여성을 향한 내 생각이 참 많이 바뀐 것 같다.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도 ‘어머니 노릇’을 했었나보다. 내 마음이 이토록 따뜻해졌으니 말이다.


이제 P씨가 “지은 죄가 많”다고 자책하는 것을 멈추고, 지금 그녀가 매 순간 실천하고 있는 작은 사랑과 행동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각박해지지 않고, 여전히 주변의 힘겨움에 깨어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녀가 알아챘으면 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김성경. 문화사회학자. 북한사회문화 연구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북한(이탈)여성, 분단문화, 북한의 사회문화 등에 대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 최근 발표한 글로 「한(조선)반도에서 내셔널시네마의 정전을 기억하는 방법: 나/라운규<아리랑>에 대한 남북한 해석의 분단」(문화와 사회, 2019), 「북한 정치체제와 마음의 습속: 주체사상과 신소 제도의 작동을 중심으로」(현대북한연구, 2018), 「이동하는 북한 여성의 원거리 모성: 친밀성의 재구성과 수치심의 가능성」(문화와 사회,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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