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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여성’이라는 이름의 내 친구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생활권을 공유하는 사이로 만나기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안영미. 평화활동가, 여성운동가, 수도권의 소도시에서 여성단체 활동가와 대안학교 교사로 한참을 지냈으며, 현재는 회복적 정의 전문가(갈등조정, 서클진행 등) 활동을 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실천여성학 전공 석사논문 「‘유목적 주체’의 관점으로 본 남·북한 출신 여성들의 여성주의적 연대에 관한 연구」가 있다.


북한이탈여성 A씨의 전화 연락


“선생님 바쁘시죠? 죄송해요. 아~ 나 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멘붕이에요.”


이렇게 시작되는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장 선생이다. 장 선생은 이웃에 살고 있는 북한이탈여성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정을 가진 북한이탈주민이기 때문에 장 선생을 A씨로 소개하고자 한다. 덧붙이자면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탈북민의 위치가 익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가장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 A씨와 경험하고 있는 일상을 통해, 북한에서 온 여성과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A씨는 올해 몇몇 북한이탈여성들과 함께, 지방자치단체의 ‘공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동아리 대표이기도 하다. A씨는 자신을 자꾸만 주눅 들게 하는 생소한 행정 용어와 절차에 부딪힐 때마다, 그리고 사업을 진행하면서 버거운 순간이 올 때마다 나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며 전화를 한다.


특히 A씨의 첫마디가 내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보통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구별하여 이름 붙인 ‘북한이탈여성’인 A씨가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이웃이지만 ‘우리’와는 구별된 존재


A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내가 일하던 여성단체에서 북한이탈여성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부터다. A씨도 처음에는 경찰의 협조로 ‘동원’된 사업의 대상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이제는 A씨와 나와의 만남은 자연스러워졌다.


A씨가 속한 북한이탈여성들의 동아리 모임, 북한 음식(두부밥과 인조고기밥) 만들기에 한창이다. (안영미)


A씨는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처럼 내 어려운 형편을 잘 알아차리고 밥값을 먼저 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친인척이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한 친구처럼, 마음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땅, 여기에서 어딘가 모를 쓸쓸함을 안고 살아온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내게 마음껏 털어놓기도 한다.


우리가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된 데에는 A씨의 경제적 형편이 나보다 훨씬 좋다는 점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A씨가 선뜻 다른 사람을 대접하거나 사례를 하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집에서 동아리 모임을 마친 후, 점심때가 되어도 식사를 준비하거나 음식을 주문하는 일이 없다. A씨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또 정기적으로 영어공부를 무료로 도와준 선생님과 약속된 과정을 마치고 났을 때도 ‘감사하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A씨의 상황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기에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걱정스럽기도 했었다. A씨의 배경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북한에서 국경을 넘어 제3국을 거쳐 남한에 입국한 이들은 이후 우리 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구별된 존재로 명명되고, 그에 따른 다양한 지원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독특한 인식과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집단화되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념체제와 문화가 크게 다른 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들은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지역사회의 분명한 구성원이지만,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경계’ 너머에 살면서 남한 사회 보통의 구성원들과는 다르게 부정적이거나 그들만의 책임과 역할의 임무를 부여받은 위치에 있다.


이웃의 자격?


여섯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A씨가 가장 신경 쓰고 조심하는 것은 자녀와 관련한 일이다. 비교적 익명성이 보장되는 신도시 중심부의 아파트로 이사를 온 이유도, 아이가 북한 출신 엄마를 둔 것에 대해 주변의 편견이나 낙인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간절함에서라고 했다.


한때는 자신이 가진 특징들이 드러날까 두려워 집안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교류에서도 최소한의 접촉만 했었다. 특히 금방 자신의 출신지를 눈치 챌 수 있게 하는 말투를 고쳐보려고 아이와 함께 학습지 공부를 했을 만큼 고단한 시간을 보냈다. 참 놀랍고 미안한 일이다. A씨가 이런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내막을 알 수 없었기에, 그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오며 겪었을 부당한 대우들이 그저 새삼스러울 뿐이다.


A씨가 북한에서 나와 제3국을 거쳐 지금 이곳 우리 곁에 정착해서 살아가게 된 그동안의 과정을 알고 나면, 한국 사회의 무심한 시선에 대해 더없이 큰 미안함이 밀려온다. 내가 알기로 많은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제 한 몸 잘살아보겠다고 북한 당국을 배신하고 남한으로 탈출한 이기적인 존재’ 정도로 치부해왔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살아온 것처럼, A씨도 자신만의 사연과 사정을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A씨는 북에 있던 시절에 자신이 ‘가족을 영영 떠나 남한에 정착하겠다.’는 고단하고 위태로운 미래를 꿈꿔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일상 속 한순간의 선택이 월경(越境)으로 유인되었고, 인신매매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 살아온 여성들과 북한이탈여성 A씨가 학습모임을 통해 만나는 자리. (안영미)


여성의 빈곤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이자 과학기술연구자인 로지 브라이도티(네덜란드 유트레히트대 교수)는 「유목적 주체」(부제: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 이론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진행형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되기’로부터 새로운 여성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바로 ‘유목적 주체’다. 가령 북한을 떠나 제3국을 거쳐 남한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마치 유목민이 양질의 목초지를 향해 이행하고 생성하며 생존하는 것과 닮아있다. ‘유목적 주체’의 관점에서 이들의 이주는 떠 밀려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다음으로의 이행이며 ‘~되기’의 생성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목하는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특별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국내외 구분 없이 다양하게 이주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에서 말이다. 넓은 의미로, 조금은 가볍게 접근해 본다면 우리 대부분은 이주한다. 학업과 직업, 그리고 주거환경을 따라 수시로 새로운 곳을 향해 이동하고 적응해 간다. 물론 북한으로부터의 이주가 같은 무게감과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을 위한 이동에서 겪어내야 하는 낯선 환경 적응 과정이 고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편견과 낙인, 그리고 정치적 의무까지 부여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자신들에게 익숙한 체제를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새로운 체계와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이니만큼 치러내야 할 당연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A씨가 생존을 위해 겪어내야 했던 일들이 과연 정당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누구나 경험하는 것처럼 일정의 과정을 지내고 나면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는 ‘이웃의 자격’이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남한 정착 생활이 10년이 훌쩍 넘는데, 아직까지도 A씨가 출신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A씨의 두려움과 당혹감


또다시 A씨의 전화다. “아~ 나…. 정말 멘붕이에요.”


시간을 약속하고 만나서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기로 했다. A씨가 올해 초 공부를 시작한 사이버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수강 신청을 차근차근 진행해나가니 등록금을 납부하라는 결재 창이 뜬다. “학기마다 돈을 내는 거예요? 아~ 내 돈! 이 돈을 내면서 이걸 계속해야 하나요?”


그렇다. 어쩌면 남한에서 태어나 주욱 살아온 우리에게는 특별한 안내가 없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매 학기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이 A씨에게는 여전히 새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을 당혹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조금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이기도 하다. 남한 사회의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A씨는 운 좋게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인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애초에 그는 이 공부를 왜 시작했던 것일까?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A씨와 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개인 차이를 넘어 이질적 문화와 다른 이념에 따른 또 다른 차원의 차이다. 통일된 독일의 동,서독 여성들이 통합의 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접할 때면 우리들 사이에서도 작동될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A씨를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듯, A씨는 나를 비롯한 남한 출신 사람들에게 수많은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많은 순간들이 A씨를 어리둥절하게 했을 것이다. 때론 무력감, 각박한 태도, 그리고 생존을 위한 극단의 강박적 기준을 가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 생기지 않는 일에는 아주 인색해 보이는 지금 A씨의 모습을 보면, 그는 인생에서 중장기적인 플랜을 갖기 어려워 보인다.


부푼 마음으로 시작한 공모사업은 자괴감만 남겼다


앞서 말했던 공모사업 실행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이다.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생활환경과 문화가 고루 갖추어져 주민의 정주(定住) 의식이 높은 마을’(지방자치단체 조례, 2013)을 정의하고 있다. 평소 가끔씩 만나 교류해 오던 북한이탈여성들이 좀 더 친밀한 관계를 꾸려보려고 이 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작은 규모의 소소한 동아리 모임이다. 설령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해도 이렇다 할 모임이나 조직을 잘 형성하지 못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지역의 당당한 주민으로서 정주 의식을 높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됐다.


생사의 고비를 혼자서 지탱해 온 북한이탈주민들은 이곳에서 의지할 만한 인적 자원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대개는 깊은 고독감과 함께 필요 이상의 긴장감을 지니고 산다. 스스로를 배제하기도 하며 단절된 생활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끼리 신뢰를 쌓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일은 절실한 필요일 수 있다. 스스로를 ‘새터민’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에 A를 비롯한 북한이탈여성들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최소 규모의 소모임 운영비를 지원받게 된 것에 환호하며, 기꺼이 적지 않은 회비를 내면서까지 부푼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점점 취지와는 다른 결과를 향해 가게 되었다.


북한이탈여성이라는 그녀들의 특수성이 높은 점수를 받아서 공모사업에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행정기관의 업무처리 과정은 그 특수성에 대한 이해나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참여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정주 의식을 갖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높은 장벽을 실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특수성에 대한 이해’라고 해 봐야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알아듣게 천천히 설명해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면 충분히 의사가 전달될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도 모르면서 무슨 공모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냐’(필자의 해석임)는 식의 분위기가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A씨와 같은 위치에서 관청에 필요한 안내를 자세히 요청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문제를 발생시키는 내용이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이미 위축감을 갖게 된 A씨는 더이상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은 잔뜩 긴장하고 당황한 채, 매번 나에게 연락을 해서 문제를 떠넘겼다. 이는 정말로 복잡하거나 어려운 문제라서가 아니며,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A씨는 자신이 봉착한 문제가 아주 단순한 사안이었음을 나와 함께 확인하곤 했다. 이쯤 되면 속상함뿐 아니라 복잡한 심경에 빠져든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A씨는 문제가 해결된 것에 대한 안도감보다는 허탈함을 너머 자괴감, 그리고 분노를 느낄 만하다. 나도 그렇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거두고 ‘관계 맺기’


북한으로부터 이런저런 이동의 과정을 거쳐 지금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사연과 경험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 분위기는 한결같은 이미지를 씌우고, 임무를 부여한다. 남북한 분단체제를 전환하기 위한 어떤 책임과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일정액의 정착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남한에 입국한 그들을 ‘난민’에 준하는 위치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정착금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비용이다.


또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사회보장 서비스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 시스템 안에서 특별한 게 아니다. 사회적 기반을 갖지 못한 사람 누구라도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북한이탈주민이 임대주택에 거주하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 일반 국민과 북한이탈주민의 기초생계비 수급률 추이를 비교한 아래의 표를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현저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성재, 「북한이탈주민의 한국사회 통합제고를 위한 취업지원제도 개선방안」, 월간 노동리뷰, 2012)


표: 박성재, 「북한이탈주민의 한국사회 통합제고를 위한 취업지원제도 개선방안」, 월간 노동리뷰, 2012


이에 대해, 지역에서 마주치는 남한 사람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보다는 북한이탈주민이 그저 우리의 사회적 자원을 허비하는 것처럼 여기면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A씨, 그리고 A씨의 친구인 북한이탈여성들은 힘주어 항변한다. “무상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보장 수혜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일할 수 있고, 일한 만큼 나 스스로 살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여러모로 압박을 준다. 여기 와서 많은 혜택을 누렸으니, 남북관계에서 뭔가 정치적 임무를 다하라는 암묵적 요구를 한다. 무책임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하며, 마치 나의 것을 빼앗아 간 것처럼 배척하기도 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이주민보다 더 경계하고 불편하게 대한다. 그래서 A씨와 같은 북한이탈주민들은 한국에 와서 일상적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으며 주눅이 들고 소외감을 느낀다.


사실 나는 A씨로부터 많은 배움을 얻는다. 굳건히 하루하루를 살아낸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말이다. A씨와 만나면서 때론 옹졸하거나 겸손하지 못하고 못난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A씨는 나에게 좋은 친구다. 나도 A씨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걸 보면, 내가 조금은 어려운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A씨에게 나는 한밤중에 찾아와서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고, 망설임 없이 자기가 밥값을 내줄 수 있을 만큼의 위치에 있다. (A씨가 내게 밥을 사주는 일이 참 큰 의미를 갖는다.)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을 만큼 쉽지 않은 것이 남한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북으로부터 온 사람들 간의 관계다. 조심스럽게, 나는 우리가 남과 북에서 태어나 자라나면서 갖게 된 서로의 다름을 파악하고 인정하며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자주 수평적 구조의 원으로 둘러앉는다. (안영미)


아마 앞으로도 나는 가끔은 생소한 일들에 당황하고, A씨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거리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유목적 주체’들 간의 ‘~되기’ 과정은 계속 이어나가게 될 것 같다. 지역사회의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정주권자로서,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고 어울리면서 ‘여성연대’의 그물망 한 코를 또 꿰어 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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