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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재개발 현장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다
을지로 보존 활동을 펴고 있는 <범을지로여성연대> 인터뷰
“여성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을지로에도 여성들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역사를 기록을 하고 싶어요.” (범을지로여성연대)
충무로 역부터 을지로3가까지 신성상가, 삼풍상가, 청계상가, 세운상가로 이어지는 길의 골목골목엔 공구, 금속, 조명, 타일, 벽지 등의 가게들이 가득하다. 제조 산업의 메카라고 불리는 을지로. 처음 그곳을 떠올렸을 때 연상된 것은 울림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기계와, 그걸 다루는 작업복 입은 ‘남성’의 이미지, 그리고 쇳가루와 먼지가 쌓인 탁한 색감의 공간이다.
을지로 일대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 이상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만큼 노후하고 오래된 길과 골목으로 만들어져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1960-1970년대 간판에선 기시감이 느껴지고, 좁은 골목을 지나면 말끔히 정돈되지 않은 물건들, 먼지가 수북이 쌓인 기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지저분하다고 표현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재정비해야 할 곳으로 논의되어 왔고, 2014년 서울시가 수립한 ‘세운 재정비촉진 지구 정비사업 계획’도 그 과정이었다.
▶ 범을지로여성연대 드랙킹 퍼포머 아장맨과 문상훈 작가 ⓒ일다(박주연)
하지만 현재 철거가 진행 중인 그 공간을 그렇게 ‘밀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을지로와 그 역사를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는 이들은 이 공간을 일터로 삼아오며 살아온 이들이기도 하지만, 그 뿐만 아니다. 많은 ‘청년 예술가’들이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을지로를 지키고자 하는 ‘여성 청년’들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을지로 보존연대 활동을 하고 있는 <범을지로여성연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재개발 전면 재검토 선언했지만 “철거는 진행 중”
“원래 처음 지었던 이름은 ‘범을지로폭력시위’였다”며 크게 웃음을 터트린 문상훈 미술작가는 드랙킹 퍼포머 아장맨과 함께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게 되면서 <범을지로여성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조금 더 젠더 정체성을 드러낸 ‘여성연대’라는 이름을 쓰고 있긴 하지만, ‘폭력시위’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정도로 이들은 을지로 재개발과 관련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재개발 반대 여론이 뜨거워지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음에도, 현재 을지로 재개발 관련 상황은 “여전히 철거가 진행 중”이며 “낮밤 가리지 않고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몇 십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있다”고 말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 철거가 진행 중인 장소 ⓒ일다(박주연)
철거 이후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인 계획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주상복합건물이라 주거 공간만 있는 게 아니니까 가게들이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공구 상가 쪽에 있는 가게들의 특징 상 기계 소음도 있고, 무거운 중금속 기계를 쓰는 경우엔 땅 밑의 기반이 매우 단단해야 해서, 그런 (주상복합건물) 공간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문 작가는 설명했다.
그런 가게를 운영 중인 곳들은 힘들게 이전을 해야 하거나 폐업해야 하는 상황이다. 을지로에서 보기 힘든, 여성 장인이 운영했던 ‘미광칠’도 이번 재개발 영향으로 폐업했다.
이주비용이나 영업보상 비용이 나온다 하더라도, 쉽게 이전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더 있다. 현재 을지로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은 서로의 작업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관계이기 때문에, 이 공간을 벗어나서 사업을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폐업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그걸 바라보는 ‘청년 예술가’들의 마음은 정말 속이 탄다.
장인과의 협업…청년예술가에게 을지로가 가진 의미
재개발이 계속 논의되는 오래되고 낙후된 공간인 이 을지로에 청년 예술가들이 모여든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저렴했고, 그건 돈이 없는 청년들이 자리 잡기 충분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을지로에 오면 주변에 장인들이 가득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고 진행해야 하는 예술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충무로 진양상가 쪽에 작업실이 있다고 하는 문상훈 작가는 “을지로가 있어서 서울에 사는 게 행복하다. 사실 서울에 사는 이유는 을지로 때문”이라며 “을지로가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미술 작가로 살아가는 그에게 을지로는 그야말로 ‘생명줄’ 같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하는 학생/사람들에게 을지로는 너무 소중한 공간”이라며, “어떤 작품이 머릿속에 떠올라도 그걸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은데 을지로에 오면, 다양한 기술과 오랜 경험을 가진 장인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주고 아이디어를 내어준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기술들을 을지로에서 배울 수 있다는 거다.
▶ ‘을지로 골목 탐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철거가 한참 진행 중이다. ⓒ일다(박주연)
서울시와 중구도 청년 예술가들이 을지로에 모일 수 있도록 도왔다. ‘다시 세운 프로젝트’, ‘중구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제조업 장인과 젊은 예술가가 만나 협업할 수 있는 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믿고 을지로에 모인 청년 예술가들은 지금 자신의 창작을 도와줄 수 있는 많은 가게들이 부서지고 장인들이 자리를 떠나는 걸 목격하고 있다. 주상복합건물이라는 말끔한 건물이 생긴다고 해도, 장인들이 없다면 청년 예술가들에게 그 공간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영국에서 예술 공부를 했다는 드랙킹 퍼포머 아장맨은 “장인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과 태도가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영국에선 예술대학들이 급여 및 주거비를 주고 장인을 고용해서 학교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거나, 기술 팁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할 정도로 장인의 능력을 높게 산다”고 한다. “또한 장인의 기술이 굉장히 비밀스러워서 계약서를 써야만, 그것도 핵심 기술을 제외하고 배울 수 있는데, 을지로에선 예술가가 장인과 함께 작업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공간은 정말 보기 드물다. 지금 이 공간이 사라지면 장인들이 본인의 기술을 어떻게/어디서 전수해야 할지 모르고 예술가들이 그걸 배우지 못하는, 서로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거다.”
을지로에도 분명 ‘여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이 장소가 ‘여성’인 청년 예술가에게 늘 친화적인 건 아니다. 오랫동안 을지로의 많은 공간들이 ‘남성중심적’ 공간이었다. 중년 남성들과의 대화가 썩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도 있다. ‘전통’이라는 명목 아래 을지로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는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범을지로여성연대>는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범을지로여성연대 트위터 계정엔 ‘여성 노동력으로 쌓은 모래성 을지로를 사수하자; 을지로를 사수하기 위해 모인 페미니스트 연대; 을지로 여성 예술가 연대; 을지로 여성 장인 연대; 을지로 여성주의 퀴어 연대’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을지로에도 분명 있을 ‘페미니스트, 여성 예술가, 여성 장인, 퀴어’를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는 건,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안다는 거다.
“을지로를 떠올리거나 재개발 이슈를 떠올렸을 때 남성의 이미지가 생각나지만, 분명 이곳에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는 문상훈 작가는 “이 공간이 남성의 힘(노동)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걸 꼭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 딱 봐도 오래된 간판들이 을지로의 역사를 보여준다. ⓒ일다(박주연)
설사 기술을 가진 장인이 남성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밥 먹이고 일터로 내보낸 존재 혹은 작업장을 운영하고 돌보는 일을 한 존재는 여성이었을 텐데 그 노동력의 가치는 현실 속에서 너무 쉽게 묻힌다. 여성의 숨은 노동이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채, 남성의 목소리만 남게 들려오고 을지로가 사라진다면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직접 을지로 보존연대 활동에 나섰다. 여성의 목소리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흥미롭게도, 현재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로 전면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박은선 활동가를 비롯하여 을지로 보존연대 활동가들 중엔 여성이 많다. 과격한 이미지가 강한 재개발 현장에선 보기 드문 현상이다. 왜일까? ‘낙후되고 저렴한’ 을지로로 들어온 청년 예술가 중에서 많은 비율이 ‘여성’이었던 영향이 컸다. 문상훈 작가는 “여기 예술가를 다 아는 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여성 예술가의 비율이 60~70%는 되는 것 같다”며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청년 예술가와 을지로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을지로는 여성들의 공간이기도 한 거다.
누가 그 자리를 뺏겼고, 누가 사라졌는가
<범을지로여성연대>는 재개발을 완전히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의 재개발이 ‘역사 보존’ 등의 대책 없이 진행 되고 있기 때문에, 그 논의가 중요하다고 말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문상훈 작가는 “이 재개발이 단순히 오래된 곳을 재정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국가/지자체가 이런 건설에 매달리는지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고 제언하며 활동가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아장맨은 “‘남성’ 장인의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여성의 노동을 조명해 보는 비디오 작업을 해 보고 싶다”며,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고 무엇을 기록하고 저장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 1월 29일 밤 기습철거 된 독립운동가 전기종, 전현철의 하숙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입정동 135번지) 입정동 독립운동가들의 주소와 정보는 여기로 http://bit.ly/2sSiI1z ⓒ자료 제공: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날, 을지로 일대를 돌아다녔다. 골목골목까지 다 들어가 본 건 처음이었다. 철거가 한참 진행 중인 공간을 지나가며 여기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건가 싶어 그 건물을 상상하던 찰나 리베카 솔닛이 쓴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창비)에 나온, 노후한 동네와 노숙인을 바라보는 어느 스타트업 기업 창립자의 글이 떠올랐다.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유시장 사회입니다. 부유한 근로자들은 일해서 이 도시에 살 권리를 번 것입니다.’
도시 한가운데 낙후한 동네, 사람들은 그 공간이 사라지고 크고 멋진 새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라는 걸 안다. 누군가는 그 새로운 공간을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유한 근로자’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될 때마다 ‘누가 그 자리를 뺏겼고, 누가 사라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를 추적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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