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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에 대하여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하늘이 같은 생명력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연재 칼럼입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하늘이 ⓒ일다(김혜련)
하늘이의 ‘똥 몸’을 부러워하다
우리 집엔 ‘하늘’이라는 이름의 개가 있다. ‘하늘’이는 하루 종일 마당에서 먹고 놀고 오줌 갈기고, 똥 싸고 자고 짖고 한다.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면 따라가다가 ‘폴랑’ 허공으로 사라지면 멍하니 나비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거나, 여기저기 킁킁대며 냄새를 맡거나, 자기가 정한 장소에다 오줌 누고 똥 누고, 신나서 종종대며 돌아다닌다.
가끔은 요가처럼 고난도의 자세를 하고 몸을 털어대기도 하고 밭에 데려가면 어디선가 야성의 힘이 솟구쳐 나온 듯 미친 듯이 풀을 뜯어 대다가 조용히 앉아 있곤 한다. 저물녘 황혼 결에 어딘지 모를 곳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하늘이의 뒷모습을 보면 마치 오래된 성자의 뒷모습에서 느껴질 법한 무심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요즘 같은 봄이면 땅을 뚫고 나오는 싹들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는지 킁킁대며 여기저기 흙을 긁어댄다. 쉬고 싶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 이를테면 여름엔 서늘한 그늘이 지는 아궁이가 있는 낮은 흙바닥이나 뒷밭으로 나가는 쪽문 밑의 작은 공간이나, 신발장 아래 같은 자신에게 최대한 편한 장소(이런 장소를 찾아내는 데 거의 천재적이다)에 배를 좌악~ 대고 엎드려 세상에 더없이 편한 자세로 누워 있다.
그러다가도 지나가는 소리나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번개 같이 튀어 일어나 짖어대거나 뛰어다닌다. 늘어지게 누워 있다가도 "하늘아!" 하고 부르면 약간 옆으로 뛰는 듯이 앞으로 뛰는, 특유의 자세로 달려오는데 그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은 바람을 가르고 햇빛도 가를 만큼 강렬하고 아름답다. 솟구치는 생명력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경탄과 아름다움에 자신을 잠시 잊는데, 바로 하늘이의 달려오는 몸이 그렇다! 그 ‘통 몸’의 튀어오름이라니… 쉼과 움직임 사이에 어떤 삐걱임이나 부조화도 없다.
▶ 하늘이 ⓒ일다(김혜련)
하늘이의 몸이 정교함의 극에 이를 때는 똥눌 때다. 똥이 마려우면 킁킁 대면서 똥 눌 자리를 찾는다. 대충 아무 데나 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열심히 찾는다. 그러고는 몸을 활처럼 둥글게 만다. 그 몸은 정말 똥(을 누기 위한 가장 정교한) 몸이다. 몸을 말아 올려 활처럼 둥글린 등과 수축한 두 다리로 땅을 단단하게 짚는다. 힘을 준다. 온 몸이 팽팽하게 긴장된다. 쑤욱~ 미끈한 똥이 나온다. 겨울엔 갓 나온 따뜻한 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하늘이의 ‘똥 폼’을 볼 때마다 나는 부러움과 감탄을 동시에 느낀다. 똥 한 번 누는데 저렇게 완벽한 조형미를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이룰 수 있다니! 나도 하늘이처럼 온 몸을 활처럼 탄력 있게 만들어 시원하게 똥을 눠 봤으면… 늘 변비에 시달리거나 비실거리는 똥을 누거나 하는 나는 오직 부러울 따름인 하늘이의 ‘똥 몸’이다.
하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생명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제 생명에 충만한 움직임, 어느 순간에도 자기 자신일 뿐인 그 단순하고도 질서 있는 아름다움에 저절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정(靜)과 동(動)이 동시에 한 몸에서 튕겨 나올 듯이 팽팽하게 살아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하늘이를 보고 있으면 ‘아… 하늘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저렇게 근원적인 생명력 속에, 본원적 해탈의 평화 속에 살고 싶다.
‘문명’인 내가 천진한 ‘자연’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늘이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생명을 가진 나도 자연이지만 나는 결코 자연으로 살지 않는다. 나의 삶은 이미 언어적 삶이고 문명이다. 하늘이의 단순함은 언제나 도달하고픈 눈앞의 궁극처일 따름이다.
‘저 작위 없는, 정예로운 단순성의 아름다움이라니!’
하늘이를 볼 때마다 내 몸엔 어떤 절실한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일어난다. 하늘이가 지닌 ‘직접적 단순성’에 다다르고 싶은 갈망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늘이처럼 될 수가 없다. 언어를 쓰는 인간, 문명인인 나는 이미 생명 그 자체로 사는 하늘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근원전 생명력 ⓒ일다(김혜련)
인간인 내가 하늘이처럼 ‘자연’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어를 버리고, 무지해지고, 문명을 포기하는 것일까? 짐승처럼 살거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가난하게 살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문명인 내가 하늘이 같은 천진한 단순성에 도달하려면, 역설적이게도 다시 문명을 통할 수밖에 없다. 삶의 단순화는 고도로 세련된 문명적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유위(有爲)/문명의 극점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무위(無爲)/자연이다.
추사가 말년에 쓴 글씨는 마치 어린 아이가 쓴 글자 같이 천진난만하다. 수많은 벼루와 붓을 닳아 없앤 희대의 명필이 다다른 최종점이 바로 모든 작위가 사라져버린 경지다. 어눌한 어린아이의 첫 붓놀림 같은 것이다. 그 어눌함은 평생의 수련으로 이룬 정예로운 작위/지성의 힘이 문명적 세련을 하나하나 지워나감으로 도달한 것이다.
삶에서 수준 높은 자기절제와 수신(修身)으로 다다를 수 있는 정예로운 경지, 그것이 단순함의 세계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이상은 지성으로 스스로를 벼리는 지난한 과정 끝에 문득 보이는 희망의 빛일 것이다. 그러나 그 궁극의 모습은 내 눈 앞의 ‘하늘이’이고, 저기 느티나무 고목이고, 봄날 어여쁜 수선화이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랑스런 몸짓의 찌르레기이기도 하다. 내가 도달하고픈 궁극적 삶의 모델들이 내 눈앞에 가득하다.
▶ 추사판전.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글씨
내게 있는 모든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다 지워 가 보자. 딸, 엄마, 파트너, 전직 교사, 페미니스트, 작가, 늙어가는 여자… 그러면 내게 남는 건 무엇인가? 어떤 사회적/문명적 옷도 입지 않은 생명, 하늘이 같은 생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생명력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싶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사라진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노년이 힘든 것 또한 사회적 쓸모가 사라진 자가 느끼는 고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년은 존재 그 자체, 자신의 생명과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당을 통통거리며 돌아다니는 하늘이를 보거나 봄날 땅을 뚫고 솟아나는 작약 싹을 보고 있으면 내 몸 가득 평화롭고도 안타까운 그리움이 차오른다. 근원적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는 내 몸 속 깊이 (언어와 문명의 세련에 의해 덮여 있는) 걸림 없이 단순한, 약동하는 생명력을 느낀다. 추사의 글씨가 천근의 밀도로 단련된 붓의 힘으로 작위적 세련을 지워 어린아이다운 무위의 천진성으로 나아갔듯이, 나도 내 일상의 질서와 규율을 스스로 만들고 싶다. 쉼 없는 공부를 통한 농축된 지성으로 문명/언어적 세련/수식을 지워 근원적 생명의 질서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달밤에 피어난 함박꽃처럼 충만하길, 하늘이처럼 ‘통 몸’으로 뭇 존재들과 교감할 수 있기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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