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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몸의 재발견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몸 탐구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평생 제대로 걸을 줄도 몰랐다니…
“상체는 거만하게, 하체는 힘차게!”
“허벅지와 무릎, 발목이 다 함께 움직이게!”
“발꿈치부터 땅에 닫게! 발꿈치, 중간, 발가락 순서로! 원, 투, 쓰리!”
‘불독’ 선생의 무뚝뚝한 구호에 맞춰 걷는다. 허리에 철갑처럼 된 기구를 차고, 런닝 머신에 올라서서 걷고 또 걷고, 육 개월을 걸었다. 재활치료에서 한 운동 중 걷기 운동이다.
삼 년간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허리가 몹시 아파졌다. 아프고 나서 비로소 젊은 시절부터 허리가 아팠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허리 통증으로 이 주간 학교를 못간 적도 있었다. 자주 허리가 아팠었는데 몸에 워낙 관심이 없는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허리는 잠시 괜찮아졌다가 다시 아파지기를 반복했다. 디스크 4, 5번이 협착되어 있고 척추 전방증까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을 권하기도 했으나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아봤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허리를 보호하고 단련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재활치료에서 운동을 시작한 이유다.
▶ 이른 봄 저녁, 소나무와 진달래가 어우러진 정강왕릉 길 걷기. ⓒ일다(김혜련)
걷는 연습을 하루도 빼지 않고 육 개월 간 했다. 굳어버린 걸음을 바꾸는데 그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평생 제대로 걸을 줄도 몰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거의 허벅지와 무릎을 쓰지 않고 걷고 있었다. 걸으면 늘 내 다리가 남의 다리 같았다. 고무다리를 달고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걸으면서 비로소 다리를 찾은 듯 했다. 다리와 몸이, 몸과 땅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수십 년 아팠던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아프고, 물 먹은 솜 같았다. 다리가 무겁고, 아프고 쓰렸다. 그런데 걸음이 바뀌니 그 통증들이 사라졌다. 놀라웠다. 결국 제대로 못 걸어서 그랬단 말인가?
호흡 바라보기를 처음 할 때 기억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하던 숨쉬기를 의식하는 훈련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는 걸 알아채고, 내쉬는 걸 알아채는 것이다. 미세한 수준까지 그 알아챔을 이어간다. 내 숨은 가슴이나 목 수준에서 맴돌았다. 고르지도 않고 들쑥날쑥이었다. 그 때 ‘나는 숨쉬기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이 왔었다. 걷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삶의 기초가 부실한 사람이었다.
몸의 기쁨, 사계절 걷기
걷기는 몸의 재발견이자 몸의 기쁨이다. 가슴을 쫘악 펴고 턱은 살짝 목 쪽으로 당긴다. 어깨엔 힘을 빼고, 다리는 힘차게 내딛는다. 무릎과 허벅지, 발목 모두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뒤꿈치부터 땅에 닫는다. 몸 전체가 활짝 펴진다.
▶ 걸으며 마주한, 안개 낀 여름 풍경. ⓒ일다(김혜련)
걷는다. 아침 해 뜰 무렵, 저녁 해질 무렵. 하루 두 번, 매일 걷는다. 많이 아프거나 비가 심하게 오거나, 너무 춥거나 하지 않는 한.
마을 안쪽으로 걷고, 산 쪽으로 걷고, 들판 쪽으로 걷기도 한다. 정강왕릉에서 헌강왕릉을 연결하는 숲 속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날이 아주 좋으면 멀리까지 걸어 나가기도 한다. 수목원을 지나 보리사, 탑골까지….
몇 년 동안 매일 걷다보니 저절로 어떤 규칙이 생겨났다. 이른 봄 진달래가 필 무렵에 걷는 길이 있고, 너른 들판에 벼가 심어져 자라는 시기에 걷는 곳이 있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걷는 장소가 따로 있다.
봄은 어느 길이든 다 좋다. 어느 곳이나 아름다운 시기다. 겨울 내 낡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에 산수유가 노란 빛으로 피어나면 골목길은 요정이 다녀간 듯 갑자기 눈부시고 다정해진다. 봄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만 있어도 아름답다. 그래도 봄에 걷고 싶은 곳이 있다.
이른 봄에는 왕릉 길이 좋다. 울울한 소나무 숲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멀리서 보면 어둠 속에 불을 밝힌 듯하다. 크고 검은 소나무와 작고 화사한 진달래꽃의 조화, 거기 이른 아침이나 석양의 빛이 깃들면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사월 중순이 지나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하면 벌판을 걷는다. 봄이 와 땅이 녹으면 논의 흙들을 간다. 부드러운 흙의 살들이 갈아엎어진 너른 들에 물이 대어지기 시작한다. 논의 물은 깊지 않다. 벼 모종을 심어야 하니 땅이 바로 밑에 보이는 깊이다. 그러니 가까이 살(肉)로 다가온다. 내 살과 가득 찬 논의 물이 서로 다정하게 교감한다.
오월 말쯤 되면 거의 모든 논에 벼가 심겨진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갓난아기 머리카락 같은 보드랍고 가는 어린 벼들이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연두 빛으로 바람에 살랑거린다. 개구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가슴은 한없이 가슴이 부드러워지고 발은 유쾌하다. 개굴개굴개굴… 개구리 소리에 발맞춰 걷는다.
벼 잎이 거의 검은 빛 가까운 초록이 되면 여름이다. 아침 일찍 들녘에 서면 태양이 어찌나 투명한지, 햇살이 온 세상을 속살까지 비추는 듯 선명하다. 늘 보던 풍경이 문득 낯설다. 이국의 땅에 와 있는 듯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낯선 시간이 만들어진다.
▶ 익어가는 벼. 노란 연두의 계절, 초가을 ⓒ일다(김혜련)
구월 말쯤 되면 마을의 넓은 뜰은 다시 연두 빛으로 부드러워진다. 손을 베일 듯 거칠고 검푸르게 자라던 볏 잎이 어느 순간 여린 연두 빛으로 돌아온다. 봄의 연두와 다른 건 모든 것들을 익혀가는 노란 빛이 곁든 연두다. 꿈에 부풀었던 여린 소녀가 다시 소녀가 되듯. 이 때 소녀는 삶을 겪어 익은 소녀다. 부드럽지만 겹겹의 색을 품고 익어가는 풍성한 소녀다.
가을은 벌판 뿐 아니라 수목원을 걷는다. 수목원의 메타세콰이어들은 이국적인 큰 키로 서서 처음엔 붉은 색이 많은 갈색, 담갈색으로 빛난다. 그 나무들 사이로 석양이 질 때면 투명한 붉은 갈색의 바다 같다. 짜면 붉은 갈색 즙이 나올 듯하다. 내 몸에도 농익은 갈색 빛이 물든다.
겨울이 오면 산길을 걷는다. 산은 어느 계절이나 아름답지만 겨울 산을 좋아한다. 모든 잎을 떨구고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묵상하는 수행승들 같다.
겨울 산의 고요도 좋지만, 바람소리도 좋다. 바람 부는 날, 산은 포효하는 짐승처럼 엄청난 소리를 낸다. 들어가는 게 겁나지만, 실은 허깨비다. 겁쟁이들은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 같은 소리를 뚫고 들어가면, 산은 시치미를 뚝 뗀 듯 잔잔하고 다사롭다. 차고 맵싸한 겨울 냄새, 그레고리안 찬트 같은 나무들 서걱대는 소리…
수년 동안 사 계절을 매일 걸으면서 내 몸엔 많은 것이 쌓였다.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벼들의 일생이, 바람과 개구리 소리, 벼 익어가는 냄새, 스러져 말라가는 억새를 한 순간에 황금 깃털로 바꾸는 가을 햇살, 겨울의 독경하듯 낭랑한 개울 물소리,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새들의 날개… 온갖 소리와 냄새와 촉감과 빛깔들, 숱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인 것이다. 내 몸은 깊은 풍요의 곳간이 되었다.
▶ 겨울 마을 풍경 ⓒ일다(김혜련)
걷는 것이 가난과 불편함의 상징이 된 시대에…
걷는 행위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는 사람은 걷는 것만으로도 선(善)해진다, 기뻐진다고 한다. 인간은 수백 만 년 동안 걸어왔으니, 인간의 몸은 걷는 경험을 갈망할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찰스 몽고메리)에 나오는 한 인물은 어느 날 차를 버리고 직장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정체된 차들이 꽉 막혀 있는 다리 아래를 뛰어가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걸어서 직장에 도착한다.
그 때 경험을 그는 ‘마치 영웅이 된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매일 걸어서 직장에 다니면서 차를 팔아버리고, 일을 줄이고, 사람들과 더 많이 놀고 연대한다. 돈을 적게 벌자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요즘처럼 걷기 힘든 세상은 걷는 것도 일종의 상품이 된다. 그 많은 ‘걷기 답사’ 프로그램이 그렇다. ‘트래킹’이라는 희한한(?) 상품이 개발된다. 그러나 큰돈을 들여 몇 박 며칠의 히말라야 트래킹의 ‘심오한’ 경험을 하고 와서도 여전히 일상을 걸을 수 없다면, 그것은 소비다. 경험은 삶의 일상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캠프에 갔다. 숙소에서 캠프 장소까지 걸어서 십오 분 정도가 걸렸다. 지름길로 가면 십 분이 채 안 되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로 이동했다. 그게 익숙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오 분 거리에 있는 밭이나 논에 갈 때도 자동차나 트랙터를 타고 간다. 일상에서 걷는 것은 가난이나 불편함의 상징이 된 듯하다.
걸음을 잃어가는 시대에 수 백 만 년 인간의 몸에 쌓인 ‘웅장한’ 느낌체계를 살려내고 싶다. 왜소해진 몸의 느낌구비를 살려 성덕대왕 신종이 울리듯 겹겹이 울리는 풍성한 몸이 되고 싶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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