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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를 주파하는 ‘몸의 힘’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몸 탐구③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풀 뽑는 할머니의 고요하고도 단단한 몸짓


아침부터 뒷집 할머니가 밭에서 풀을 뽑고 계신다. 그 뒷모습이 마치 움직이지 않는 정물 같다.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조금 후에 보면 저만치 가 계신다. 분명 움직이고 있는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다. 밭을 매고 있는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저 고요함은 무엇일까?


지금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그리하여 자신이 바로 그 일이 되어버린 자의 모습. 풀을 뽑으면서 마음속으로 여기도 뽑아야 하고 저기도 뽑아야 하는, 머릿속이 분주한 내게는 없는 온전한 현존(現存), 거기서 나오는 고요이리라.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땅처럼 고요히 햇살 아래 엎드려 밭을 매고 있는 풍경. 여든일곱 해를 농사짓는 일로 살아 온, 멀리서 보면 땅인지 사람인지 구분하기도 힘들 만큼 작고 마른 한 존재를 곁에서 바라보는 일은 경이롭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밭을 매시는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좀 쉬셔요~”


그러면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신 채로, 온 얼굴로 웃으며 말씀하신다.


“놀맹놀맹 하는 거로, 뭐 힘이 있어야지, 이래 쉬엄쉬엄 하고 있다.”


할머니의 ‘놀이’를 나는 온 몸으로 따라가려 해도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다. 저 온전한 순종과 고요의 경지로 나아갈 수가 없다. 평생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쉼 없이 하면서 몸에 익힌, 어떤 유행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고요, 몸이 경전이 되어버린 몸짓. 이런 몸짓이 몹시도 드문 세상에서 그런 몸짓을 그리워한다.

<2014 여름 일기>


▶ 봄의 밭. ⓒ일다(김혜련)

 

이런 현존의 순간의 고요를 문경에서 문종이를 만드는 ‘삼식지소’ 할아버지에게서도 느꼈다. 그가 닥종이를 거르고 채질할 때, 그 몸짓에는 단단한 고요가 있었다. 삶에 대한 깊은 순종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단단한 고요가 일상의 힘, 몸의 힘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내가 호미질을 하거나 마당에 풀을 뽑을 때 느끼는 기쁨이 몸의 기쁨이고, 그 일이 몸에 쌓여갈 때 내 몸 또한 그들처럼 단단하게 고요해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


‘몸에 쌓인 힘’을 보여주는 사람들


몸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밀양 할매’라는 상징적인 언어를 만들어 낸 할머니들의 힘은 놀랍다. 칠십, 팔십이 넘은 할머니들이 십년 이상을 국가권력에 맞서 싸웠다. 우리나라 투쟁의 역사 속에 새로운 장을 연 분들이기도 하다. 그 분들의 힘은 어떤 이론이나 관념에서 나온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들의 일상적 삶에서 나온 거다. 밥 해먹고 농사짓고 자식 기르는 그 일상이 전부인 사람들의 힘, 몸의 힘이다.


피해를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경이롭다. 그 분들이 살아온 것을 보면 이삼십 대에 이미 죽었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든 아흔을 넘어 살아남아 싸운다. 이렇게 오래 사는 데에는 뭔가가 있다. 일상 속의 삶이 고난을 뚫고 나오는 힘이 됐을 것이다.


몸에 쌓인 힘이 있을 때, 세상이 슬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우울해지지는 않는다. 우울은 무기력하게 한다. 그러나 슬픔은 힘이 된다. 세월호 부모들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이 분들이 우울해졌다면 싸울 힘이 없었을 게다. 이 분들이 싸우는 힘은 일상의 힘이다. 슬프지만 매일매일 몸을 일으키고, 밥을 꾸역꾸역 챙겨 먹는다. 이게 안 되면 활동할 수 없다. 배를 땅에 깔고 몸으로 가지 않으면 삶이 무기력해진다.


‘민초(民草)는 밟혀도 죽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백성의 질긴 생명력을 잡초에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왜 안 죽는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 일상이 계속 있는 거다. 밟히면서 밥을 하고, 밭을 갈고, 자식 기르고… 계속 하는 거다. 관념적으로 거창한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힘이다. 이 세계를 근원적으로 형성해가는 밑바탕이 되는 힘이다.


좌절은 관념적 지식인들에게나 있는 거지 ‘밀양 할매들’ 같은 민초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힘들지만 그냥 사는 거다. 밥 해먹다 나가 싸우고 또 밭 매고, 싸우다 울고, 울다가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해 나고, 비 오고, 바람이 불듯이 몸으로 사는 거다. ‘몸에 쌓인 힘’은 난세를 주파해가는 힘이 된다.


▶ 늙은 왕버드나무. ⓒ일다(김혜련)


일상을 사는 몸, 깨어있는 시간들


아침에 별채 청소를 한다. 방문을 활짝 열고 빗자루로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쓸어간다. 빗자루의 부드러운 결이 단단한 방바닥을 쓸어내는 감촉이 손바닥과 손목, 팔꿈치, 어깨를 통해 느껴진다. 쓸고 난 뒤 물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걸레를 잘 접어 정성들여 구석구석 닦는다. 햇살이 들어와 콩댐한 바닥이 말갛게 투명하다.


청소는 언제나 할 수 없이 하는 지루한 노동에 불과했다. 청소기를 돌리면, 돌리는 기계적 행위 밖에 없다. 그 소리에 허겁지겁 따라가다 보면 내가 뭘 하는지도 잘 몰랐다. 오로지 편리하게 먼지를 제거한다는 것 외에는 내 몸과 사물 사이에 어떤 관계도 생기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청소기를 돌리지 않게 된다. 청소기가 내는 굉음과 이 집이 지닌 고요가 너무도 불일치해서 일까? 아니면 한옥 구조상 청소기를 돌리는 일이 힘들어서일까, 청소기는 저절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비로 쓸면 천천히 내 속도대로 일을 하게 된다. 내 몸을 느끼고, 방바닥의 느낌을 느낀다. 엎드려 걸레로 닦으면 허리와 무릎, 팔 모두를 느낀다. 청소와 청소하는 내 몸이 분리되지 않는다. 청소를 하면서 나 자신이 맑고 단단해진다. 단정해진 방에서 나 또한 단정해진다.


밭을 갈 때 경운기로 갈면 땅과 나 사이에 어떤 공감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편리할 뿐이다. 호미나 괭이로 밭을 갈면 비로소 내 몸과 땅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 호미질을 할 때 흙 의 냄새를 맡는다. 흙의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손과 발, 온몸으로 감촉하게 된다. 그럴 때 몸의 즐거움이나 든든함이 생겨난다. 몸으로 살면 다양한 감각과 감수성이 살아난다. 내 생명과 타 생명, 사물과의 공명대가 생긴다.


▶ 갈아엎은 땅. ⓒ일다(김혜련)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 이를테면 차를 마시거나,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하거나 마당의 풀을 뽑을 때 내 몸과 함께 있으면 일상의 순간순간이 빛난다. 지루한 일이 되기보다 깨어있는 순간들이 된다.


일상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것과 그 의미를 자각적으로 알고 하는 행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각적 앎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일상의 행위의 의미를 자각적으로 알고 하는 행위-이것을 통한 자기 내면의 고양(심화)이 일상의 성화(聖化)다.


나는 평생 특별한 무엇을 통해 고양되려고 했다. 죽어도 일상에서 고양을 이루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상에 발 딛는 행위가 없다면 허망한 삶일 뿐이다.


몸의 힘은 정신의 밀도를 높인다. 내 몸에 밀도 깊은 응축된 시간의 정수를 쌓고 싶다. 느티나무 고목 같은 시간을 살고 싶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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