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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내게 준 선물, 함께 배우고 나누기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남산공부모임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어떤 모임이 생기를 가지고 지속되는 기간은 한 삼 년이라고 한다. 남산공부모임은 비교적 오랜 시간 자기생명을 가지고 갔지만, 모든 것에 생로병사가 있듯 때가 되어 쇠퇴기를 맞아 끝이 났다. 하지만 오 년의 시간 동안 쌓아온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그 후의 삶으로 이어졌다.


일 년에 한 번 ‘겨울 축제’라는 형식으로 모여 서로 살아온 것을 나눈다. 음식을 나누고, 글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기를 꿈꾼다. “밥 먹으러 와~” 하면 밥이 식지 않을 거리에 살면서, 격려하고 돌보아주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 남산공부모임 3년차 기념 파티 ⓒ일다(김혜련)


여성주의 공동체의 경험, 내 인생의 화양연화!


어디 가서든 소수의 사람들과 연대하거나 함께 배우기를 청하는 나의 태도는 페미니즘이 선사한 선물이다. 연고 없는 경주에서 사람들을 찾아내고 설득하여 같이 밥 먹고 공부하며 삶의 의미를 묻고 생활을 나누어 온 내 삶은 ‘여성주의적 공동체’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주의적 공동체를 경험한 것은 내 삶에서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삶의 가장 큰 동력이기도 했고, 여전히 살아있는 동력이다. 당시 내가 속하거나 활동했던 공간은 대학원 여성학과와 ‘또하나의 문화’, 그리고 여성민우회 같은 단체와 ‘여성주의 소모임’이었다. 1990년대라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여성주의는 한창 자라나는 싱그러운 나무 같았다.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기도 했다.


여성학과에서 나는 여성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이 갖는 공통체적 경험을 톡톡히 했다. 동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늦은 나이에 직업을 가지고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강의 시간표를 내 시간에 맞추어 주고, 도서관에서 참고 도서를 찾아주고, 영어가 안 되어서 종합시험에 떨어져 재시험을 치르는 나를 어둑한 교정에서 기다려주었다. 세미나나 수업 때 학문적 언어도 없이 ‘상처받은 동물의 눈빛’으로 거의 반벙어리 수준으로 ‘어버버’거리는 나를 봐줬다.


연령과 경험의 차이가 다양했던 동기들은 싸우기도 잘 하고 협동도 잘 했다. 방법론 수업의 공동작업 때에는 수업이 거의 부흥회였다. ‘잘난 내’가 ‘못난 여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포부로 여성학과에 와서 실은 본인이 여성문제의 종합세트였음을 깨달았다는 간증들이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동기들 중 몇몇은 ‘못난 내’가 하는 ‘미워도 다시 한 번’식의 눈물콧물 짜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나오는 내 삶의 드라마를 듣고 또 들어주었다. 엄마가 되어주기도 하고 집이 되어주기도 했다. 후배들과 아이를 같이 길렀고, 함께 먹고 나누고 공부했다. 여성학과는 내게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다.


▶ 남산공부모임을 함께 한 사람들 ⓒ일다(김혜련)


‘또하나의 문화’(이하 또문)는 여성학과와는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또문’의 분위기는 많이 낯설었다.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공간, 그러나 정(情)적이지 않은 공간, 친밀한 느낌을 갖기는 어려운 공간이었다. 너무도 ‘잘난 분’들이 모여 있었고, 말과 행동이 당당하고 거침없어 나처럼 자기개념이 낮은 사람에게는 주눅이 드는 공간이기도 했다.


쭈뼛거리면서도 ‘또문’엘 들락거렸던 것은 ‘또문’의 주체들보다 ‘또문’을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힘든, 다양한 관심과 욕구를 가진 여자들이 모여 각자 관심대로 모여 이야기하고 놀고 공부하는 소모임이 좋았다. 직장인 소모임, 영화 소모임 등 여러 소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글쓰기 소모임’을 했다. 우리는 소설가 김형경의 집에서 한 달에 한 번 모여 하룻밤을 꼬박 새워가며 이야기하고 먹고 놀았다.


‘또문’은 나같이 목마른 사람들에게 ‘제각각 알아서 마음껏 말하고 놀면서 뭔가 해보라’고 장을 펼쳐주는 품이 넓은 마당 같았다. 또문 캠프에서 공동체를 주제로 사람들과 토론하고, 그 시대만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던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자들이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었다.


여성민우회에서는 이혼여성들과 ‘자조모임’을 했다. 서울과 군포에서 모였는데 군포에서 더 활발했다. 이혼여성들과 이런저런 모임을 하고, 아픔을 나누고 아이 양육 문제를 의논하고, 밥 먹고 놀고 했다. 이혼여성들을 만나면서 친구가 생기기를 기대했는데 친구가 된 사람은 드물었다. 친구가 되기에는 이미 나는 너무 잘나져버렸던 것도 같다.


우리끼리 모여서 소모임을 한 것도 참 진한 경험이었다. 여성주의자들 중 심리학이나 영성에 관심을 가진 몇몇이 우리 집에서 모였는데, 그 중 하나가 ‘꿈모임’이었다. 텍스트를 읽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모임이었다. 다들 진지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만나고 드러내곤 했다.


누구는 별거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꿈을 가져와서 자신이 얼마나 남편과 경쟁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누구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꿈을 통해 드러나고, 누구는 항상 집이 사라지거나 귀곡 산장처럼 되는 꿈으로 오랜 고아의식이 드러나기도 했다. 모임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모색한 것도 의미 있었다.


여기저기서 여성주의가 꽃처럼 피어나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서로 연대하고 나누고 공감하는 시간과 공간들, 방랑자와 구도자, 탐구자들… 몸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벅찬 시절이었다. 상처와 고통, 깨달음과 자유, 희열이 함께 반짝거리던 시절,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그 경험은 지금의 나에게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내 삶이 달라지면서 내 안의 페미니즘도 달라졌지만, 그리고 남자 대신 품었던 여자에 대한 환상도 깨지고, 영성공동체에 대한 꿈도 초라하게 무너졌지만, 환상이 깨지는 고통만큼이나 지혜도 얻었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이루어가는 노력을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열정과 기쁨의 한 부분이다.


▶ 남산공부모임 마지막 모임  ⓒ일다(김혜련)


나이테가 많은 고목 같은, 그런 할머니 되기


<집으로>(2002, 이정향 감독) 영화 생각이 난다. 그 영화의 흥행에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근원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누구나 그런 고향을 가슴 속에 묻고 산다. 내게도 그런 그리움이 있었다. 시골 외할머니에 대한 환상. 내가 언제든 가면 늙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서서 날 따뜻하게 맞아줄 외할머니, 그런 할머니 한분만 있다면 삶이 이토록 공허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할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그 할머니가 되지 않는 한, 그런 할머니는 없다는 깨달음 같은 것이 왔다.


영화 속 할머니는 벙어리였다. 입을 봉한 자연의 상징 같았다. 언제든 가서 필요한 것을 얻고, 언제든 버리고 떠나와도 되는 말 못하는 존재. 그러나 지금 내가 되고자 하는 할머니는 ‘자기인식을 획득한 자연’과 같은 존재다. 착취당하고 대상화되는 무의식적 자연이 아니라 그 쓰라린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기탐험의 힘을 길러낸, 상처와 지혜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다.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하강하는, 내 생명과 세계의 신성성에 눈뜬 존재 말이다. 자연을 일상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삶으로부터 일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일이다.


‘자기 인식과 자기 언어를 가진 자연지(自然智)’는 어쩌면 근대가 버린 것들에 대한 재발견의 자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나이테 없는 어른’들을 양산하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후지타 쇼오조오) 사회에서, 온 몸에 나이테를 새겨 늙은 고목 같은 존재가 되기, 지친 누군가 와서 기대어 쉬면서 새로운 언어와 인식의 눈을 뜨는 공간되기, 그런 사람과 공간이 하나 둘 늘어나기, 그게 지금 내가 그릴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이다. 내가 그런 존재가 되든 못 되든, 나는 이미 그 길로 들어 서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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