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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침묵시켜온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

[성폭력 무고 다시 보기] 사회적 통념과 경찰의 수사 원칙


※ 사회 각 영역으로 번져가는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방관하고 조장하면서 피해자를 고립시켜왔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다>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성폭력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성폭력 무고’에 관한 문제를 4편의 기사를 통해 다룹니다. 첫번째는 공정한 수사에 관한 내용으로, 필자 허민숙씨는 여성학자이자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무고,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성폭력 가해자들


성폭력 역고소란, 성폭력 가해자가 피소된 이후에 피해자를 ‘무고’(誣告, 허위 사실을 신고하는 죄)로 고소하는 것, 또는 성폭력 피해자의 고소와 상관없이 피해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거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도록 협박하기 위해, 혹은 더 이상의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수단으로 역고소를 활용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실제 역고소를 실행하지 않더라도 그 위협만으로도 피해자를 침묵시키고 위축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페미니스트 국가에서 성폭력 무고를 피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 사랑에 배신당한 남성의 좌절이 성폭력 무고의 본질인 양 묘사하고 있다.


유명 연예인이 연루된 성범죄 사건으로 인해 성폭력 무고라는 용어는 ‘억울한 남성 피해자’를 곧장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일명 ‘꽃뱀’에 의한 성폭력 조작 사건으로 ‘순진하고 어리숙한’, ‘여성을 믿었던 평범한 남성’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도 있는 무섭고도 억울한 일이 바로 성폭력 무고 사건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 무고는 물론 ‘억울한 무고 피해자’와 관련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고로 내몰린 사람이 실제 피해자인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가 다른 방식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당하게 피해자를 처벌함으로써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며, 나아가 실제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법적 보호와 구제 조치를 받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폭력 사건 및 그와 연루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대중적 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성폭력 무고를 ‘죄 없는 선량한 남성 피해자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하고도 악랄한 범죄’로 접근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충분히 합리적인지를, 비판적으로 논의해 보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국제사회가 정한 성폭력 무고 기소 요건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성폭력 무고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어왔던 일이다. 무고한 자를 수사기관에 고소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성폭력 무고에 있어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고소된 사건이 실제 ‘성폭력’ 사건인지, 아니면 무고한 사람을 악의적으로 고소하여 피해를 입히려 한 ‘조작된’ 사건인지를 규명하여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중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부설연구소 울림 & 한국여성의전화)


실제 발생한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인지, 아니면 무고한 사람을 성폭력 가해자로 둔갑시키려 한 범죄의 피의자인지를 판단하려거든 철저한 수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성폭력 무고의 피의자로 기소하는데 있어서 “철저한 수사”를 더욱 강조하는 이유는 성폭력 범죄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다른 범죄에서 보기 드문 이례적인 비난과 추궁에 시달리기 쉬운데, 이는 성폭력 범죄에 대한 통념과 관련이 있다. ①정신이상자거나 저소득층인 낯선 이로부터 무차별적인 폭력과 함께 야심한 시간에 갑작스럽게 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폭력 이미지의 전형성, ②적극적으로 저항한다면 피해를 모면할 수 있음은 물론 ③사건 발생 후 경찰에 즉시 신고하고 ④일생일대의 사건이기에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오류 없이 진술할 것이라는 피해자 이미지의 전형성은 이러한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을 성폭력 범죄에서 제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성폭력 피해를 수사기관에 신고하였다가 수사과정에서 검사에 의해 ‘무고의 피의자’로 인지되거나, 혹은 성폭력 가해자로부터 무고로 피소되는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때문에 무고 피의자가 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관한 통념과 전형성의 피해자가 아닌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수사기관이 성폭력 무고의 피의자로 기소하기 위한 수사 원칙을 마련해 놓고 있다. 국제경찰장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Chief Police: 이하 IACP)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 기소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찰은 반드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도 완벽한 수사를 완료해야 한다. 즉 성폭력 범죄에 대한 수사가 모두 완료된 이후에야 피해자에 대한 무고 수사를 개시할 수 있다.


둘째, 철저한 수사 결과 어떠한 성폭력도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았고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물리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피해를 입었다고 진술한 그 시각에 피해자가 다른 장소에 있는 모습을 담은 CCTV 등의 증거를 말한다.


셋째, 경찰은 피해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피해자 행동과 반응에 의존해 무고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피해자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거짓 신고가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라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경찰이 피해자인 자신을 믿지 않고 비난할 때 침묵하기 때문이다.


※ 1893년 설립된 국제경찰장협회(IACP)는 경찰 대상 교육훈련 자료와 범죄수사 및 조사 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가이드라인 등을 개발, 보급해왔으며 한국 역시 회원국이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수사 및 피해자 조사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는데 있어 상당한 수준의 성인지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theiacp.org)


IACP의 세 가지 요건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신고된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완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사관의 편견과 통념에 의해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로 인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 수사 및 기소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부실한 수사는 제대로 된 증거 수집이나 증인 확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때문에 지연되고 부실한 수사로 인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정이 내려지는 것을, 피고에 대한 ‘무죄’ 선고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무혐의는 수사를 하는 자가 그 사건이 허위일 것이라 생각해서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고 있다.


▶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중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부설연구소 울림 & 한국여성의전화)


‘꽃뱀’ 통념 대신, 치밀하고 공정한 수사를!


수사의 초기 단계부터 피해자를 의심하는 것은 단지 수사가 게을리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오히려 표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격은 피해자에게 진술을 철회하거나 고소를 취하하도록 종용하여 이를 무고 기소의 이유로 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성폭력 사건을 ‘꽃뱀’ 사건으로 의심하는 입장에서 피해자의 진술 철회, 그리고 고소 취하는 피해자 자신의 거짓 진술을 스스로 증명하는 매우 결정적인 증거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피해자인 자신을 의심하고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 자신이 오히려 비난받을 때, 수사 과정에서 다시 성폭행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때, 수사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이 조사받고 진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담감, 최종 결과에 대한 경찰의 부정적인 언질,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주변인들의 설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내기 버거운 심리상태로 인해 피해자들은 고소를 취하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성폭력 신고의 대부분은 허위일 것이라는 면밀히 검토되지 않은 믿음, 그리고 이에 관한 여과 없는 미디어 보도는 사건 자체에 대한 철저한 수사보다는 사건에 대한 편견과 전형성에 의존해 성폭력을 마치 날조된 허위 신고로 판단하려는 정서를 보편화시켰다. 그러는 사이, 여성들은 성폭력을 포함한 강력 범죄의 최대 규모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성폭력 신고율이 2.2%에 그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있지도 않은 성폭력 범죄를 꾸며내는 자들이기보다는 성폭력 피해를 함구하는 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성폭력 범죄가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범죄라는 모호한 태도로 여성들의 침묵을 은근히 기대하거나 위협하기보단, 치밀하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수사 절차를 수립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그래야만 무고한 피해자가 몇 배의 희생을 치르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허민숙/여성학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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