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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위드 유’(#WithYou)를 읽다

미투(#MeToo)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 울산에서 열린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소식을 기록노동자 희정 님이 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잠시 망설였다. 화장을 해야 할까. 눈 화장을 좀 진하게 해볼까.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를 "못 생기고 외로운 여자들”이라 생각하니까.


여성혐오를 주제로 대중강좌를 열었을 때 인터넷 수강신청란에 누군가 이런 문구를 보내왔다. “사랑받지 못하는 년들.” 외모가 못나고 사랑받지 못해 반발심에 남성을 혐오하고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자들이라는 서프러제트(여성참정권 운동) 시절 인식은 1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역시나 길 가던 남자 둘이 떠든다. “미투? 메갈이잖아. 못생긴 것들이…” 어쩌고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눈살 한번 찌푸려주고 끝이다. 망설임은 집안에서나 하는 것. 우리는 지금 거리에 있다. 오늘 여자들은 당신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왜? 기분이 좋으니까. 왜냐고? 우린 혼자가 아니니까. 


▶ 울산 삼산 디자인거리에서 열린 ‘미투(me too)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출처: 울산페미기획단)


지금 이 순간은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열댓 명이 3월 18일 오후 2시 울산 시내에 모였다. 울산에 온 지 4년, 페미니즘 이름을 달고 거리에 선 것은 처음이다. 미투(me too)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처음일 경험이다.


행동 규칙은 간단하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페미니즘 책을 30분간 읽는다. 어떤 책이든 좋다. 살짝 떠들어도 좋고 책에 집중해도 좋다. 약속 장소에 온 사람들은 기대한 얼굴, 낯선 얼굴들을 반기다가 가져온 책을 편다.


누군가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를 읽는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양성평등을 반대한다>를, <페미니즘 리부트>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읽는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를 지탱해주던 책들. 우리는 종종 잃어버린 언어를 책 속에서 찾았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끊임없이 물었지만,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았다.


“결혼 안 할 거니? 애는?” 

“화장이 왜 이렇게 진하니?” 

“왜 싫다고 얘기하지 않았니?”

 

아이를 낳으면 직장생활을 어떻게 할 거냐 하고, 안 낳는다 하면 이기적이라 했다. 꾸밈노동 안 한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하고, 꾸밈노동을 하면 소비주의에 물든 ‘된장녀’라 했다. 왜 말을 안 했냐고 하고, 말하면 그렇게 까칠해서 되겠냐고 했다. 기억 못하면 사실이 아니라 했고, 기억을 정확히 하면 공작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그 질문들은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어떤 대답을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자들을 궁지로 몰았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 ‘오빠’를 찾기도, ‘개념녀’가 되기도, ‘슈퍼우먼’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봤자 궁지로 몰리는 일만 더 잦아졌다.


“제 20대 연애는 된장녀가 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에 늘 주눅 들어 있었어요. 개념녀가 되어야지. 손가락질 받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에. 계산대에만 가면 눈치보고, 내가 돈을 더 내는데도 주눅 들고. 그러다 몇 년 사이 페미니즘이란 걸 알게 되고. 요새는 마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미투 지지 독서 행동 참가자. 이 기사에 인용된 구술은 모두 울산페미기획단과 당일 행사 참가자들의 말을 빌렸다.)


애초 세상의 질문은 우리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침묵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언어는 우리를 잇지만, 침묵은 우리를 나누어 말이 호소하거나 끌어낼 수 있는 도움, 연대, 그도 아니면 단순한 교감조차 잃은 처지로 내몬다.”(리베카 솔닛/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울산의 ‘현대 가족 이야기’ 


▶ 울산 삼산 디자인거리에서 열린 ‘미투(me too)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출처: 울산페미기획단)


소위 ‘지방’은 더 외로운 곳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지. 사람이든 언어든 모두 서울에 있었다. 말은 더 이상 제주도로 가지 않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로 갔다. 사람도, 정보도, 어떤 자본이든 서울 중심지로 몰렸다. 서울 하늘 아래 나머지 ‘지역’들은 식민지를 면치 못했다.


그 중 울산이라는 곳은 독특한 식민지 형태를 띠는데, 현대 왕국의 소유라는 점에서 그랬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그리고 거대 기업을 떠받치는 수많은 협력업체들. 사람들은 서울로도 가지만 울산으로도 왔다. 이곳에는 일자리가 있다.


산업자본주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공업도시는 국가가 인구를 통제 관리하고 국민을 훈육하는 목적이 ‘노동력 양성’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양육해왔다.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의 삶을 들여다본 <현대 가족 이야기>(조주은)에는 야간노동을 마치고 잠 못 드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잠마저 빼앗긴 채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들. 그들이 펼쳐든 우산 아래 보호되는 여자와 아이들. ‘스위트홈’은 그렇게 유지됐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유모차에 탄 아이들은 자랐다. 이들의 ‘아버지’는 더 이상 주야간 맞교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2교대는 여전하고 특근에 목을 맨다. 정년퇴임이 오기 전까진 벌 수 있는 만큼 벌고자 한다. 착실히 돈을 모은 ‘아버지’들은 원룸 건물 하나를 사들였다. 그러나 조선소가 자리한 동구에서는 원룸 값이 바닥을 쳤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영향 때문이었다. 실직이 또다시 현실로 다가왔다. 그럴수록 더 일했다. 한국 ‘가장’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의 아들들은 과거 아버지의 성공신화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생산직 정규노동자로 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비정규직 비율이 급속도로 늘었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하청업체에 넣었다. 그곳에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하며 아들들은 정규직 간택의 기회를 노리지만, 들려오는 구조조정 소식은 그들이 아버지 세대와 같은 역사를 누릴 수 없음을 예고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딸들. 그네들은 자기 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 타지로 가지 않는 이상 스물이 넘고 스물다섯이 넘어도 ‘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렀다. 집 밖에는 여자 취업할 곳이 없다. 그녀들의 어머니는 가족임금 수당 안에 머물며 ‘바깥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아이와 남편을 떼어놓고 나가면 스위트홈이 완성되지 않았다. “몇 푼이나 번다고”는 그런 의미였다. 세월이 가도 자동차와 조선소, 석유정제 사업은 울산의 모든 것이었다. 여자 갈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역사가 이들에게 강요됐다.


“울산에는 여자가 일할 데가 별로 없어요. 경리, 계약직 아닌 이상 일할 데가 없는. 들어가도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여자가 대리쯤 되면 빨리 집에 가야 한다고.”


여성들은 의문했다. 그 많던 여자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몇몇은 의심했다. 자신들은 설 곳조차 없는데, 아버지의 보편은 잘만 굴러갔다. 아버지의 우산은 아늑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설 곳 없는 사람들은 차별과 폭력에 더 잘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알게 되고 해쉬태그 운동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를 접했다. 의심은 아버지(어머니)의 삶 자체로 옮겨갔다.


“우리 아버지는 울산 남성의 전형이거든요. 대공장에 다니는 중년 남성. 자신은 옳게 잘 살아왔다고 굳게 믿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기 삶을 의심해 보라고.”


페미니즘을 알게 된 젊은 여성(과 남성)들은 아버지의 집을 나와 독립을 했다. 퇴사를 한다. 여행을 간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


그리고 말하게 된다. 어느 날은 ‘위드 유’라고 말하고 싶어 미투 지지 독서행동을 기획했다.(주최는 울산페미기획단, 아이디어 제공은 땡땡책협동조합) ‘위드 유’라는 언어가 생기고 여자들은 조금 덜 외로워졌으니까.


▶ 울산 삼산 디자인거리에서 열린 ‘미투(me too) 운동을 지지하는 독서행동’ (출처: 울산페미기획단)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뮤리엘 루카이저는 “아마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케테 콜비츠』)라고 했지만, 우리는 세상의 멀쩡함을 자주 목격해왔다. 말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없으면 혼잣말 그 이상이 아니다. 혼잣말을 오래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한다. “그 여자 원래 좀 이상했어.”


누군가 그랬다. 질문이 해맑아 기억에 남는다. “울산에 왜 미투 운동이 없어요? 그만큼 깨끗하다는 거 아니겠어요?” 듣는 이가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사람은 말하지 못한다. 그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미안하지만, 울산은 확신이 적은 동네일뿐이다.


대학이 적어 젊은 사람이 없는 것이 원인일까. 평생 우산이라 믿어온 ‘아버지’의 도시라서 그럴까. 인력과 정보의 부족 때문일지도. ‘지방’에서 페미니즘 행사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온라인을 넘어 내가 사는 공간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은 ‘시선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여자애가 머리만 짧게 잘라도, 색을 입혀도, 민소매만 입어도 눈총을 받는다. 어디에서든 하는 경험이지만 아무래도 지역이 더 횟수가 잦다. 실제 ‘그 꼴로’ 아버지 지인을 볼 가능성도 더 크다. 공간도 네트워크도 좁다. 이런 환경에서 ‘튀는 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도’(me too)라는 말은 혼잣말로 하기엔 허망하다. 아니 위험하다. 그래서 하지 못한다. ‘지방’은 더 조용할 수밖에 없다. 이날 미투 지지 독서행동은 혼잣말들을 위한 것이었다. 혼잣말들이 모이길. 모여 우리의 목소리가 되길 바라는 이들이 책을 들고 나왔다.


“젊은 사람들 아니고는 보통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만 미투(MeToo)를 접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밖으로 나옴으로 사람들이 내가 사는 지역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구나. 내 주변의 문제구나를 알게 되는 거잖아요.”


물론 이날 우리는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마스크를 끼고, 사진 촬영에 예민했다. 누군가의 사진이 온라인 공간에서 조리돌림 당할 위험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막상 거리로 나오니 괜찮았다. 어떤 평가도 비아냥거림도 여자들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미 책을 읽기 시작한 걸. 읽는다는 건 침묵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행인들은 우리를 궁금해 했다. 몇몇은 같이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서로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미투 운동이야?” 질문했다. “너 미투 어떻게 생각해?” 질문이 질문다워지는 순간이었다. 침묵이 아닌 의견을 듣기 위해 묻는 일.


우리가 서로 말하고 묻기 시작했음으로 괜찮았다. 그날의 거리에서 우리는 함께 읽는다는 건 질문을 만드는 일임을 알았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같은 질문이 아닌, 우리의 새로운 질문을. (희정/기록노동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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