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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가 끝이 아니야…패러다임을 바꾸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운동>③ 성/재생산권을 위한 과제


※한국의 낙태죄 현황과 여성들의 임신중단 현실을 밝히고, 새로운 재생산권 담론을 모색하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운동’ 기사를 3회에 걸쳐 싣습니다. 이 기사의 필자 ‘앎’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앞선 기사에서는 재생산권이 어떻게 우리 삶 전반과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낙태’죄를 정당화하는 주장들의 허구성을 밝혔다. (관련 기사: ‘저출산 문제’ 해결하려면 ‘낙태죄’가 필요하다고? http://ildaro.com/8136)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가 끝은 아니다. 더 많은 논의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낙태’죄가 폐지되면 모자보건법 전면 개정에 대한 논의가 뒤따를 것이다.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단도 본격적으로 도입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야 할까? 이번 기사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더 논의해나가야 할 지점들을 몇 가지 짚어보려고 한다.


상세한 피임법, 안전한 임신중단 정보가 담긴 포괄적 성교육


학창시절에 받은 성교육 중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동영상이 있다. 영상의 주인공은 여자고등학생인데 어느 날 남자친구의 집으로 놀러가게 된다. 여학생은 남자친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그러자 남자친구는 ‘오늘 아무도 없어’라고 말하며 방문을 잠근다. 암전. 다음 화면에서 여학생은 울고 있다. 임신했다고 한다.


자, 나는 이 동영상을 통해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이것은 계획적인 데이트 강간의 정황일 수 있다? 합의하여 성관계를 하게 된다면 피임을 잘하자? 아니다. 정답은 ‘남자친구 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마치 원치 않는 임신의 책임이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학생에게 있다는 듯이 말이다.


당시 나는 동영상 속 남자친구가 문을 잠그는 장면에서 심각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돌이켜 떠올려 봐도 주인공은 성폭력으로 인해 임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아무도 ‘암전’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설령 성폭력이 맞다 하더라도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 피해자의 탓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


▶ 교육부가 2015년에 발표한 ‘학교성교육표준안’ 중 발췌


그로부터 십 년쯤 지난 2015년에 교육부는 ‘학교성교육표준안’을 발표했다.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주의를 강화하고 잘못된 성폭력 예방법과 대처법을 가르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많은 비판과 조롱을 샀다. 그 중에는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이성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거나, 피임이 필요한 이유는 ‘미혼모/미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교의 성교육 내용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에는 새로운 성교육 패러다임이 마련되어야 한다. 더 이상 임신에 대한 공포로 여성의 성을 억압해선 안 된다. 그동안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억지로 출산을 해야 하거나, ‘낙태’죄라는 불법 행위를 저질러야 하는 이중구속에 시달렸다. 완벽한 피임법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낙태’죄는 여성에게 금욕주의를 강제하는 수단이 됐다.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자기통제감을 떨어뜨리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이 가능해지면 여성들은 지금처럼 심리적, 정서적으로 위축되지 않고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성관계와 피임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 없이 임신 가능성에 대한 위협만으로 성교육을 ‘퉁’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상호 평등하게 합의한 성관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임은 왜 필요할까? 올바른 피임법은 무엇일까? 콘돔이 찢어지는 등 피임에 실패하거나 예기치 않은 성관계 등으로 인해 피임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출산을 할 지 혹은 임신중단을 할 지 결정할 때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삶의 조건들을 고려하면 좋을까? 출산을 하고 싶다면 향후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만일 양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출산을 하길 원한다면, 입양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임신중단을 하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러한 내용들은 반드시 미리 구체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막상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당사자가 적절하게 대응하기란 매우 어렵다. 성폭력 예방교육이 성폭력을 조장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고, 재난안전교육이 재난을 조장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듯,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포괄적 성교육은 ‘문란한 성 문화’나 ‘무분별한 임신중단’을 조장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다. 실제로 누군가가 겪고 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교육이다. 오히려 포괄적 성교육이 이뤄져야 온라인과 포르노 등을 통해 형성되는 왜곡된 성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피임 실천율과 성공률을 높여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임신중단을 하게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비혼의 출산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


2005년 고려대학교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수립’ 보고서에 따르면,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받은 비혼 여성의 대다수인 93.7%가 ‘미성년자 혹은 혼인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답했다(다중 응답). 2011년 연세대학교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를 보더라도 비혼 여성의 70.1%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49.3%가 ‘미혼이어서’, 16.4%가 ‘경제상 양육 힘듦’, 13.4%가 ‘사회활동 지장’을 인공임신중절 사유로 답했다(중복 응답).


▶ 보건복지부와 연세대학교에서 발표한 ‘2011년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 중에서 (출처: 보건복지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주요한 임신중단 사유가 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결혼한 부부만이 당당하게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 비혼 여성의 임신은 오로지 남성 파트너와 결혼하여 ‘정상 가족’으로 편입할 때에만 용인된다. 본인 또는 파트너에게 결혼할 의사가 없는 경우에는, 설령 출산을 하고 싶다 하더라도 혼외 출산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현실적인 양육 부담 때문에 임신중단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실제로 임신중단을 하는 비율은 기혼 여성이 비혼 여성보다 더 높다. 그럼에도 임신중단과 관련된 담론에서는 미성년자이거나 사실상 남성 파트너가 없는 여성의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된다. 일부 남성들은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에는 동의하지만 ‘미래의 남편에게 임신중단 경험을 절대 숨기면 안 된다’는 조건을 붙이기도 한다. 이때 기혼 여성의 임신중단은 논외로 취급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비혼 여성에게 집중되는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비혼 여성의 임신은 혼전 성관계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치부된다. 임신중단을 한 여성에게는 ‘성관계는 하고 싶고 책임은 지기 싫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성관계는 하고 싶고 임신은 하기 싫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류가 피임법을 개발했는데 말이다. 임신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성관계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은, 마치 교통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동차를 운행하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국가는 혼외 출산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비혼모/비혼부를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법으로 임신중단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혼인율이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혼외 출산을 배제하고서 출생률을 증가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는 결혼 여부, 가족형태, 사회경제적 조건 등과 상관없이 출산과 양육을 할 수 있는 사회보장체계를 마련하고, 실효성 있는 보육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이 가능할 뿐 아니라 누구든지 임신중단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될 때, 비로소 개인은 출산 또는 임신중단 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혼외 출산은 ‘무분별한 성관계의 결과’로 낙인찍히지 않고 당사자가 결정한 삶의 형태로서 존중받게 될 것이다.


양육과 입양에 대한 인식 개선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발생한 영아유기 사건은 연평균 100여 건에 달한다. 산모가 미성년자이거나 그 밖의 사정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경우에 영유아를 길거리, 쓰레기장, 화장실 등에 버리는 것이다. 2009년 12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는 국내 첫 ‘베이비박스’(유기되는 영유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동 알림 장치, 온열 장치, 환기 시설 등을 설치한 아기 보관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베이비박스가 긴급 생명구호장치냐 영아 유기를 조장하는 불법 시설이냐 하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매년 200여 명의 영유아가 베이비박스에 버려지고 있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유기되는 영유아 수는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출산 후에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므로, 그에 대한 제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가령 어떤 여성이 종교적 이유 등으로 임신중단은 원하지 않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양육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파산한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아무리 독촉해봐야 소용없듯이, 양육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아이를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헛된 도덕론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임신중단을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다. 양육을 원하지 않거나 부득이하게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서 출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태어나는 아동의 권익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안전장치도 만들어져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양육 책임을 전적으로 떠안기고 있다. 이로 인해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아동들은 열악한 성장환경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 방안이 연구되고 있으나, 우리 사회는 ‘핏줄’을 중시하는 가족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도 말라’며 입양을 기피한다.


▶ 보건복지부와 보건사회연구원의 ‘2012년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 자료 중 (출처: 보건복지부)


올해 난임 진료 환자는 22만 명을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난임 부부가 입양을 하는 비율은 0.8%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 입양 가정은 흔히 사회적 편견에 시달린다. 입양 부모는 양자를 잘 키우지 못하거나 학대할 것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하고, 입양 아동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거나 배은망덕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동을 국외로 입양 보낸 나라이다. 국내 입양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2016년도에도 전체 입양 아동의 38%가 국외로 입양되었다. 한편으로는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며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만들지만, 이미 태어난 생명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낙태’죄가 폐지되기 이전부터 같이 논의하고 변화해나가야 하는 이슈들이다. 어떤 내용은 ‘낙태’죄 폐지와 무관한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다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은 올해도 ‘낙태’죄 폐지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공론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정부에서 8년 만에 재개하는 ‘임신중절 실태조사’가 현실적인 여성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현재 진행 중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의 위헌성을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운동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실질적으로 형법 개정을 통해 ‘낙태’죄가 폐지되는 그 날까지 함께 목소리를 높여주길 바란다. 모낙폐에서 주최하는 각종 활동, 검은 시위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길 바란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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