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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여성이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러있길 바라는가
‘초등학교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세상구경을 해보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30대 이상 장애여성들 사이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경우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많이 배워봤자 써먹을 데가 없는데다가, 좋은 신랑감 만나 결혼할 수 있는 몸도 아니라는 이유로, 장애여성 중 많은 이들이 정규교육과정에서 소외돼왔다.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장애여성 중에는 무학과 초졸 이하가 전체의 62.5%나 차지하고 있다. 장애남성 34.5%, 전국여성의 29.6%(2000년 통계)에 비해 학력이 현저히 낮다.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장애여성들
그렇지만 장애여성들은 어려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직 그녀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장애인단체나 복지관 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장애인단체와 복지관들은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집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여성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장애여성들은 처음엔 수동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외출’에 도전했고, 점차 자신들이 처한 문제에서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기 시작했다. 장애여성운동의 역사는 그렇게 조심스레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애인단체와 복지관의 프로그램 속에서 장애여성은 여전히 대상자일 뿐 온전히 주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우선 '장애여성을 위해' 만들어준 프로그램의 기획과 관련해 장애여성 자신은 아무런 권한도 가질 수 없는데다가 설혹 불만이 있거나, '이건 영 아니다' 싶어도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 때문이었다.
성장과정 내내 한번도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한 장애여성에게 있어서, 장애인단체의 남성활동가나 복지관 사회복지사의 위치는 도저히 넘지 못할 산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장애여성 자신은 언제나 프로그램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의견을 조율해볼 기회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단한 시행착오를 통해 주체로 서게 되는 과정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장애여성 관련 프로그램이 해를 거듭날수록, 장애여성들을 프로그램의 대상자로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조모임을 통해 주체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성활동가나 사회복지사들과 장애여성 사이 간극은 좀처럼 좁아지지 않았고, 우후죽순처럼 시도되었던 자조모임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장애여성운동의 독자적인 역사는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이 우리의 권익을 대변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장애여성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장애여성들은 자조단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대표하면서 장애여성 개개인의 삶의 변화와 사회 전체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 장애여성 단독조항이 만들어졌으며, 장애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애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의존적이거나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장애여성들 스스로의 이름으로 조직한 자조단체를 지원하고 육성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여성을 권리를 지닌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장애여성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해 장애여성 자신이 아니라, 복지관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을 장애여성 권익을 옹호하는 대변자로 여기는 풍토가 남아 있어 안타깝다.
변화하는 장애여성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부
지난해 존폐위기를 맞았다가 소외계층을 위한 부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여성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09년에 장애여성 상담사업을 추진하면서, 여성부는 전국 4개 기관 중 한곳을 제외하곤 모두 ‘복지관’을 수행기관으로 선정했다.
과연 복지관에서 이제까지 병리적 관점의 상담기법과는 달리, 내담자의 강점을 살려 장애여성 스스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자조모임을 활성화하며 장애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을까? 과연 장애여성들의 “완전한 발전, 진보 및 권한강화(empowerment)를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6조)여야 하는 정부의 적절한 조치인지 묻게 된다.
이미 상담 등의 고유업무 명목으로 인건비 등의 예산을 지원받는 복지관에, 또다시 상담사업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것도 문제가 되려니와, 장애여성 관련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정부는 복지관과 손을 잡고서 어떻게 하면 당사자 자조단체를 배제할까 골몰하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 사회와 정부가 변화하고 있는 장애여성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장애여성 집단을 평가절하하고,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복지의 수혜대상으로만 여기는 관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여성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복지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복지관과 자조단체는 갈 길이 다르다. 이제는 장애여성인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서 우리에 대해 논하거나 행하려는 어떤 시도도,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성부는 지금이라도 구태의연한 관점에서 벗어나 소외계층을 위한 부처로 거듭나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김효진/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 일다는 어떤 곳?
‘초등학교는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세상구경을 해보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30대 이상 장애여성들 사이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경우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많이 배워봤자 써먹을 데가 없는데다가, 좋은 신랑감 만나 결혼할 수 있는 몸도 아니라는 이유로, 장애여성 중 많은 이들이 정규교육과정에서 소외돼왔다.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장애여성 중에는 무학과 초졸 이하가 전체의 62.5%나 차지하고 있다. 장애남성 34.5%, 전국여성의 29.6%(2000년 통계)에 비해 학력이 현저히 낮다.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장애여성들
그렇지만 장애여성들은 어려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직 그녀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장애인단체나 복지관 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장애인단체와 복지관들은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집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여성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장애여성들은 처음엔 수동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외출’에 도전했고, 점차 자신들이 처한 문제에서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기 시작했다. 장애여성운동의 역사는 그렇게 조심스레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애인단체와 복지관의 프로그램 속에서 장애여성은 여전히 대상자일 뿐 온전히 주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우선 '장애여성을 위해' 만들어준 프로그램의 기획과 관련해 장애여성 자신은 아무런 권한도 가질 수 없는데다가 설혹 불만이 있거나, '이건 영 아니다' 싶어도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 때문이었다.
성장과정 내내 한번도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실현해보지 못한 장애여성에게 있어서, 장애인단체의 남성활동가나 복지관 사회복지사의 위치는 도저히 넘지 못할 산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장애여성 자신은 언제나 프로그램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의견을 조율해볼 기회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단한 시행착오를 통해 주체로 서게 되는 과정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장애여성 관련 프로그램이 해를 거듭날수록, 장애여성들을 프로그램의 대상자로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조모임을 통해 주체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성활동가나 사회복지사들과 장애여성 사이 간극은 좀처럼 좁아지지 않았고, 우후죽순처럼 시도되었던 자조모임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장애여성운동의 독자적인 역사는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인해 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이 우리의 권익을 대변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장애여성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장애여성들은 자조단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대표하면서 장애여성 개개인의 삶의 변화와 사회 전체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 장애여성 단독조항이 만들어졌으며, 장애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장애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의존적이거나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장애여성들 스스로의 이름으로 조직한 자조단체를 지원하고 육성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여성을 권리를 지닌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장애여성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해 장애여성 자신이 아니라, 복지관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을 장애여성 권익을 옹호하는 대변자로 여기는 풍토가 남아 있어 안타깝다.
변화하는 장애여성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부
지난해 존폐위기를 맞았다가 소외계층을 위한 부처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여성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09년에 장애여성 상담사업을 추진하면서, 여성부는 전국 4개 기관 중 한곳을 제외하곤 모두 ‘복지관’을 수행기관으로 선정했다.
과연 복지관에서 이제까지 병리적 관점의 상담기법과는 달리, 내담자의 강점을 살려 장애여성 스스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자조모임을 활성화하며 장애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을까? 과연 장애여성들의 “완전한 발전, 진보 및 권한강화(empowerment)를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6조)여야 하는 정부의 적절한 조치인지 묻게 된다.
이미 상담 등의 고유업무 명목으로 인건비 등의 예산을 지원받는 복지관에, 또다시 상담사업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것도 문제가 되려니와, 장애여성 관련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정부는 복지관과 손을 잡고서 어떻게 하면 당사자 자조단체를 배제할까 골몰하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 사회와 정부가 변화하고 있는 장애여성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장애여성 집단을 평가절하하고,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복지의 수혜대상으로만 여기는 관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여성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복지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복지관과 자조단체는 갈 길이 다르다. 이제는 장애여성인 우리 자신을 배제하고서 우리에 대해 논하거나 행하려는 어떤 시도도,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성부는 지금이라도 구태의연한 관점에서 벗어나 소외계층을 위한 부처로 거듭나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김효진/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 일다는 어떤 곳?
[관련 기사] “시설과 골방에서 희망없이 살지 않겠다” / 윤정은 | 2006/10/11/ |
[관련 기사] 당신은 장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 이희연 | 2007/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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