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애도하기, 새로운 신뢰를 형성하기
저는 어느 종합병원에서 일을 합니다. 건물의 가 측으로 계단이 나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여러 병실로 연결되는 입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계단은 꽤 비좁고 어두컴컴합니다.
마음에 가장 남는 것은 그 차갑고 어둡고 좁은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잃은 듯한 슬픔을 왈칵 토해내지도 못한 채 소리 죽여 흐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 흐느낌은 텅 빈 계단에 울려 퍼지기도 합니다. 돌아선 채 구부러진 등이 괴로움에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차가운 계단 위에 방석이라도 깔아주고 힘없는 어깨 위로 담요라도 덮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등이 너무도 외롭고 슬퍼 보입니다.
그 계단은 어느 정도까지는 슬픔의 시간을 허용해주기 위해 자리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슬픔을 마음껏 느끼는 공간이 되기에는 너무도 어둡고 추운 것 같습니다. 그 계단에서 울던 분들이 아주 나중에 그 계단을 어떻게 기억할지요.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슬픔을 마주하며 살아가는데, 과연 슬픈 사람들이 오롯이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허용되는 공간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고요. 슬픔에 젖은 사람들은 왜 언제나 그 지독한 상실감을 보이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뒤 켠에서 삭혀야 하는가, 그럼으로써 슬픔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외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더군다나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공간이 없으니 우리는 슬픔을 억누르느라 늘 이를 악물고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실에 대해 말하고 감정을 표현할 기회 얻어야
"기운내!" © 정은의 빨강그림판
슬픔이란 곧 상실에 대한 반응과도 같습니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어느 존재의 텅 빈자리로 인해 슬픔을 느낍니다. 이제는 상대를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상대와의 경험은, 다시는 체험할 수 없는 과거의 어렴풋한 기억뿐입니다.
만약 외부의 대상이 또 다른 외부의 대상으로 채워진다면, 우리는 슬픔을 보다 빨리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또 다른 연인이 생기면, 과거에 사라져버린 연인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기가 더 쉽지요.
또한 외부의 대상을 잃었지만 그 외부대상이 내면의 표상으로 자리할 때,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가슴 속에 묻을 때’ 슬픔은 우리를 서서히 놓아주는 것 같습니다. 암으로 남편을 잃은 어느 중년의 여성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년이 더 지났지만, 매년 꽃피는 봄 때만은 가끔씩 슬퍼집니다. 그러나 더 많은 날을 그이는 마음 안에서 같이 살아갑니다.”
그를 가슴에 묻으려면 그와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몸이 멀어지는 것은 목숨이 다하는 어느 한 순간이지만, 마음의 이별은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이별이란, 함께 사랑하면서 하나로 얽혔던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각기 잘 분리되어 두 개의 마음으로 잘 나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너의 마음과 온전한 나의 마음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은 자는 온전한 자기를 되찾고, 떠나간 자의 마음이 차지하였던 자리들을 다시 나의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충분히 상실에 대해서 말하고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실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고 그를 기억에서 지우려고 애쓰지만, 지우려 애쓰는 그 행위는 곧 상실을 더 깊이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상실한 자에 대해 남은 감정을, 그것이 슬픔이든 분노이든 충분히 꺼내어 놓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되어야만 우리는 그를 분리해낼 수 있습니다. 분리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는 내 맘 안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공간은 사람의 슬픔을 감싸주는 역할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신성한 공간에 앉아 슬픔을 내놓는데 대한 두려움 없이 우리는 한없이 슬픔을 수용해주는 절대자의 품에 안깁니다. 굿과 같은 민속의례도 무당을 통해 만날 수 없는 이를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자가 한을 풀어 떠나간 자를 가슴 속에 묻는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심리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의 시간이 허용되는 공간
한편, 삶을 지탱해오던 뿌리가 뒤흔들리고 생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믿음조차도 파괴되는 극한의 상실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아기가 어미를 잃은 듯 위협당하는 상실과도 같습니다. 앞선 경우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분리’하는 것이 슬픔을 극복하는 과제였다면, 이 경우에는 앞서 파괴된 나의 마음을 ‘복구’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상실을 극복하는 데는 ‘새로운 탄생’과도 같은 초월적인 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의 믿음을 상실했다면, 새로이 태어나 새로운 믿음을 형성해야 합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마치 ‘어미’가 주는 것 같은 신뢰관계가 필요하고, 이를 통해 심리적인 의미의 ‘어미’가 주는 신뢰를 마음 안에 회복하면서 탄생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새로운 신뢰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내 삶의 의미를 되찾는 과정에서 함께 공명하고 애도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은 신뢰를 회복하는데 일차적인 것으로, 파괴된 마음을 재건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슬픔의 시간을 허용 받으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혹은, 누군가의 슬픔을 위해 함께 버티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제 생각에 그런 경험은 아주 소중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상실에서부터 생을 뒤흔드는 상실까지 수 없는 상실을 겪습니다. 그런데 상실을 애도할 공간과 시간은 너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용서란,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더군다나 사람들은 성급하게도 망각과 용서를 주문합니다. 그의 상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까. 상실한 데서 온 온갖 감정들에 관해 애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까. 혹은, 새로운 탄생을 지지하는 신뢰의 공간이 주어졌습니까. 섣부른 용서나 망각은, 고통과 파괴의 기억이 두려운 나머지 몸을 사리고 왜곡된 희망으로 눈을 가리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용서란, 그리고 진정으로 ‘가슴에 묻는 일’이란 그에 앞서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애도를 통하여 파괴당한 마음을 복구하고 온전한 내 마음을 되찾을 수 있어야만, 우리는 소위 말하는 그 용서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강요된 용서와 망각은 감정과 의미가 부재한 채 마비되어 버린 삶을 종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해결되지 못한 고통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눈 가리기 위해 껍데기와 단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망친 결과,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였습니까. 최현정의 마음이야기▣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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