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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양징자씨 인터뷰
“‘위안부’ 문제해결은 지식인들이 머리로 하는 게 아니에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에서 ‘재일위안부 재판지원’운동을 전개해온 양징자(52)씨의 말이다. 그는 일본 우파정치인들의 논리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에 대해, “조금 머리가 좋다고 아는 척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격앙된 어조로 비판했다.
재일교포인 양징자씨는 최근 개봉된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프로듀서이자, 영화의 주인공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의 재일교포 활동가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착공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양징자씨를 만난 이유는, 한국사회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일본 내에서의 ‘위안부 운동’역사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기금’ 등의 쟁점에 대해 상세히 듣고 싶어서다.
-1993년 지원모임이 결성된 이후, 일본에선 1995년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발족됐습니다. 12년 후인 2007년 국민기금이 해산하기까지 일본에서는 큰 논쟁이 촉발된 걸로 아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일본에는 위안부 관련한 단체가 많아요. 우리는 일본에서도 피해자 분을 직접 모시고 한 운동이었죠. 필리핀, 대만, 중국의 피해자들 재판을 지원한 분들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피해자 분을 모시지 않았던 그런 운동도 있어요. 어느 정도 운동이 개념적으로 될 수밖에 없죠. 이런 운동을 하는 일본사람들 중에는 할머니들의 존엄성과 인권회복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도 있었고, ‘일본이 변했으면 좋겠다. 정말 일본정부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일본정부의 책임문제에 간절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민간인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의) ‘국민기금’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해결책이었어요. 국가가 책임지게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거였죠.
국민기금을 시작한 분들도 그전까지는 모두 같은 편에 속한 분들이셨지만, 실제로는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지식인들은 적었어요. 뭐랄까, 그전까지 시민운동을 해온 리더들이었고 지식인들이었던 거죠. 당시 사회당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사회당과 계속 같이해온 지식인들이라서 ‘지금 아니면 해결책은 없을 거다. 이건 일본인으로서 꼭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해결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기금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아무쪼록 받아들여 달라’는 거였죠.
그런데 이 ‘받아달라’는 게 일본인으로서, 본인들이 생각한 사고방식이죠. ‘할머니들이 받아 들여주세요. 왜냐하면 일본은 이 정도의 국가니까. 그걸 할머님들이 이해해주시고,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라는 거였죠. 반면 국민기금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은 ‘일본이 이 정도의 국가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국가의 사죄) 끌어올리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하지 않나’ 라는, 그런 논쟁이었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같은 편에 서야 할 일본사람들의 논쟁이 어느새 할머니들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할머니들에게 물어봐라, 국민기금을 받으라, 받지 마라 하지 말고, 그냥 차분하게 정보만 드리고 ‘어떻게 하실래요?’ 그 말 한마디만 해봐라 하는 소리를 계속했어요.
우리 지원하는 모임에서는 그렇게 했어요. 처음에는 할머니가 결정하는 것에 정말 어려워하셨어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그런데 항상 아주 중요한 장면에서 ‘그런 돈은 못 받겠다’고 하셨죠.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해본 적은 없어요.
할머니는 결국은 ‘그 돈을 받으면 또 사람들이 비웃는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생활보호금이라고 일본정부한테 돈을 받아봤는데, (주위 시선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민간인들이 돈을 모아서 나한테 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또 거지 같다고 일본사람들이 비웃지 않냐. 그런 돈은 못 받는다’ 하셨고, 항상 그런 태도를 취하셨어요.
운동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일본에서는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국민기금 사람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할머니들에게 국민기금을 받지 말라고 한다며, 정대협이 할머니들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들에게 ‘받으라, 받으라’고 하는 당신네들은 뭐냐, 묻게 되는 거예요.”
-현재 한국사회는 역사교과서 개정 등 제국주의적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 문제가 큽니다. 일본우익의 논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비판 받는 한국인여성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에서는 높이 평가 받았지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한국에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씨도 동조하는 입장을 표방했더군요. 지원모임 활동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그냥 저는 박유하씨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해서, 그리고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대해서 알고 있나 싶어요. 모르니까 그렇게 쓰죠.
더욱이 일본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국인이) 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힘들죠. 우리는 일본사람들이 그런 말(식민지근대화론)하면 계속 싸워왔어요. 그런데 이쪽에서 일본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니까, 뒤통수 맞는 기분이죠. 왜 해외에서 그렇게 힘들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랫동안 아주 힘들게 살아온 분들의 뒤통수를 치는지, 너무 안타깝죠.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지식인들이 머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런데 머리 조금 좋다고, (당사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죠.”
-재판지원활동 등 현재 일본에서 ‘위안부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나요?
“재판지원 하는 단체들은 지금도 계속 할머니들의 재판을 도와드리고 있고, (중국) 해남도 재판만 남았고, 다른 재판은 모두 패소했어요. 지금도 계속 피해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도와드리는 분들이 있고. 또 하나는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로 WAM(여성들의 전쟁과 평화박물관)이라는 자료관을 만들어 활동하는 분들도 있고, 한 축으로는 입법화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20대 학생들이 ‘해남도 재판’ 지원운동을 하는데, 사람들에게 재판을 알려나가는 활동을 하고 있죠. 젊은이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을 만들고 있어요.”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위안부 관련 ‘입법화 운동’이 일본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위안부 재판 안에서는 1998년 4월에 시모노세키에서 판결이 났는데, 이것이 승소판결이었어요. (이후 상고심 재판에서 최고재판소가 패소 판결함) 도쿄지방법원에서 다른 재판은 다 패소했는데, 이 재판만 이겼죠. 그때 판사가 쓴 판결이 당시 일본 국내법적으로는 피해에 대해 배상을 하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어요.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군 당국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회가 법률을 만들어서 피해자들을 구제했어야 하는데, 일부러 입법에 태만하게 왔다고 ‘입법 부작위’라고 했죠. 일본이 위안부에 대해 배상하는 법을 만들지 않은 것 자체가 인권침해라며, 이 논리로 할머니들에게 1인당 30만 엔을 배상해야 한다고 거였죠.
당시 판결에 대해 처음에는 ‘위안부 피해 자체에 대해 인정을 안 했다, 금액이 너무 적다’는 소리도 나왔지만, 판결문을 보니까 판사가 일본의 지금 법률상황에서 굉장히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판결이었던 거죠.
그때까지는 사법부를 상대로 한 재판운동과, 입법부를 상대로 하는 입법운동은 좀 다른 거라고 생각했었죠. 지금은 재판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입법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판결이 나가고 나서 국회의원들도 나서기 시작했어요.
당시 민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각각 입법 안을 냈어요. 2000년도에는 세 당의 안을 하나로 해서, 일본 법제국을 거쳤죠. ‘전시 강제 성적피해자 구제법’이라는 법률인데, 방법적으로는 일본정부가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하기 위한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심의회에서 어떻게 사죄하고, 배상하는지에 대해서 토의를 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런 ‘기관과 기구를 만든다’는 법률이죠.
지금도 그건 계속 국회의원들이 상정을 하는데, 통과가 안되고 있어요. 이후에 만약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민주당이 이 법안을 냈던 하나의 당이니까 기대가 되죠. 그러나 막상 자기네들이 정권을 쥐게 되면, 그것을 진짜 통과시켜줄지는 미지수에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을 해왔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위안부 문제나 재일조선인 문제기가 식민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 재일조선인 문제, 재일교포에서도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차별 받는 상황에 대해 알리려는 마음이 컸어요. 그러나 본인들을 만나보니까 너무나 차원이 다른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라서 ‘이분들의 문제를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건 틀렸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일본친구들은 이 운동을 하는 동기에 대해 ‘일본사람의 책임’을 많이 얘기했어요. 나는 일본인은 아니니까 일본인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못하고, 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 문제를 한다고는 말 못하겠고.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고, 할머니와 관계도 힘들었고, 그 시기에는 정말 그만 두고 싶었어요. 항상 내일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고 그런데 때려치우지는 못하겠고, ‘갑자기 이 재판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았어요. 아주 단순한 해답이었는데, 그건 일본사람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동포라고 해서 책임 없는 거 아니죠. 이 할머니들이 이렇게 상처를 입고 전후에 살아오셨는데 모르고 지냈다는 것 자체에 책임이 있다. 더 빨리 해결을 했어야 하는데, 송신도 할머니를 알고, 할머니가 재판을 하시게 됐는데 끝까지 그 책임을 져야 되는 거죠.
내가 계속해온 힘은 책임이라는 말, 할머니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그러나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겁기보다는 나중에는 보람이 되었고, 재미있어졌고, 할머니와의 관계도 굉장히 좋아졌고, 할머니에게 많은 걸 배웠고, 받았어요. 지금은 모임 구성원들이 다들 그래요. 이거 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10년간, 재판지원운동을 한 10년간이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네요.” 윤정은 기자▣ 일다는 어떤 곳?
“‘위안부’ 문제해결은 지식인들이 머리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활동가 양징자
재일교포인 양징자씨는 최근 개봉된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프로듀서이자, 영화의 주인공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의 재일교포 활동가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착공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양징자씨를 만난 이유는, 한국사회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일본 내에서의 ‘위안부 운동’역사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기금’ 등의 쟁점에 대해 상세히 듣고 싶어서다.
-1993년 지원모임이 결성된 이후, 일본에선 1995년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발족됐습니다. 12년 후인 2007년 국민기금이 해산하기까지 일본에서는 큰 논쟁이 촉발된 걸로 아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일본에는 위안부 관련한 단체가 많아요. 우리는 일본에서도 피해자 분을 직접 모시고 한 운동이었죠. 필리핀, 대만, 중국의 피해자들 재판을 지원한 분들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피해자 분을 모시지 않았던 그런 운동도 있어요. 어느 정도 운동이 개념적으로 될 수밖에 없죠. 이런 운동을 하는 일본사람들 중에는 할머니들의 존엄성과 인권회복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도 있었고, ‘일본이 변했으면 좋겠다. 정말 일본정부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일본정부의 책임문제에 간절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민간인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의) ‘국민기금’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해결책이었어요. 국가가 책임지게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거였죠.
국민기금을 시작한 분들도 그전까지는 모두 같은 편에 속한 분들이셨지만, 실제로는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지식인들은 적었어요. 뭐랄까, 그전까지 시민운동을 해온 리더들이었고 지식인들이었던 거죠. 당시 사회당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사회당과 계속 같이해온 지식인들이라서 ‘지금 아니면 해결책은 없을 거다. 이건 일본인으로서 꼭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해결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기금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아무쪼록 받아들여 달라’는 거였죠.
그런데 이 ‘받아달라’는 게 일본인으로서, 본인들이 생각한 사고방식이죠. ‘할머니들이 받아 들여주세요. 왜냐하면 일본은 이 정도의 국가니까. 그걸 할머님들이 이해해주시고,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라는 거였죠. 반면 국민기금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은 ‘일본이 이 정도의 국가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국가의 사죄) 끌어올리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하지 않나’ 라는, 그런 논쟁이었지요.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중의 한 장면
우리 지원하는 모임에서는 그렇게 했어요. 처음에는 할머니가 결정하는 것에 정말 어려워하셨어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그런데 항상 아주 중요한 장면에서 ‘그런 돈은 못 받겠다’고 하셨죠.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해본 적은 없어요.
할머니는 결국은 ‘그 돈을 받으면 또 사람들이 비웃는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생활보호금이라고 일본정부한테 돈을 받아봤는데, (주위 시선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민간인들이 돈을 모아서 나한테 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또 거지 같다고 일본사람들이 비웃지 않냐. 그런 돈은 못 받는다’ 하셨고, 항상 그런 태도를 취하셨어요.
운동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일본에서는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국민기금 사람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할머니들에게 국민기금을 받지 말라고 한다며, 정대협이 할머니들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들에게 ‘받으라, 받으라’고 하는 당신네들은 뭐냐, 묻게 되는 거예요.”
-현재 한국사회는 역사교과서 개정 등 제국주의적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 문제가 큽니다. 일본우익의 논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비판 받는 한국인여성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에서는 높이 평가 받았지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한국에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씨도 동조하는 입장을 표방했더군요. 지원모임 활동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그냥 저는 박유하씨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해서, 그리고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대해서 알고 있나 싶어요. 모르니까 그렇게 쓰죠.
더욱이 일본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국인이) 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힘들죠. 우리는 일본사람들이 그런 말(식민지근대화론)하면 계속 싸워왔어요. 그런데 이쪽에서 일본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니까, 뒤통수 맞는 기분이죠. 왜 해외에서 그렇게 힘들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랫동안 아주 힘들게 살아온 분들의 뒤통수를 치는지, 너무 안타깝죠.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지식인들이 머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런데 머리 조금 좋다고, (당사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죠.”
-재판지원활동 등 현재 일본에서 ‘위안부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나요?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송신도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20대 학생들이 ‘해남도 재판’ 지원운동을 하는데, 사람들에게 재판을 알려나가는 활동을 하고 있죠. 젊은이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을 만들고 있어요.”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위안부 관련 ‘입법화 운동’이 일본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위안부 재판 안에서는 1998년 4월에 시모노세키에서 판결이 났는데, 이것이 승소판결이었어요. (이후 상고심 재판에서 최고재판소가 패소 판결함) 도쿄지방법원에서 다른 재판은 다 패소했는데, 이 재판만 이겼죠. 그때 판사가 쓴 판결이 당시 일본 국내법적으로는 피해에 대해 배상을 하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어요.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군 당국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회가 법률을 만들어서 피해자들을 구제했어야 하는데, 일부러 입법에 태만하게 왔다고 ‘입법 부작위’라고 했죠. 일본이 위안부에 대해 배상하는 법을 만들지 않은 것 자체가 인권침해라며, 이 논리로 할머니들에게 1인당 30만 엔을 배상해야 한다고 거였죠.
당시 판결에 대해 처음에는 ‘위안부 피해 자체에 대해 인정을 안 했다, 금액이 너무 적다’는 소리도 나왔지만, 판결문을 보니까 판사가 일본의 지금 법률상황에서 굉장히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판결이었던 거죠.
그때까지는 사법부를 상대로 한 재판운동과, 입법부를 상대로 하는 입법운동은 좀 다른 거라고 생각했었죠. 지금은 재판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입법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판결이 나가고 나서 국회의원들도 나서기 시작했어요.
당시 민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각각 입법 안을 냈어요. 2000년도에는 세 당의 안을 하나로 해서, 일본 법제국을 거쳤죠. ‘전시 강제 성적피해자 구제법’이라는 법률인데, 방법적으로는 일본정부가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하기 위한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심의회에서 어떻게 사죄하고, 배상하는지에 대해서 토의를 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런 ‘기관과 기구를 만든다’는 법률이죠.
지금도 그건 계속 국회의원들이 상정을 하는데, 통과가 안되고 있어요. 이후에 만약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민주당이 이 법안을 냈던 하나의 당이니까 기대가 되죠. 그러나 막상 자기네들이 정권을 쥐게 되면, 그것을 진짜 통과시켜줄지는 미지수에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일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활동을 해왔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일본사람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일본친구들은 이 운동을 하는 동기에 대해 ‘일본사람의 책임’을 많이 얘기했어요. 나는 일본인은 아니니까 일본인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못하고, 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 문제를 한다고는 말 못하겠고.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고, 할머니와 관계도 힘들었고, 그 시기에는 정말 그만 두고 싶었어요. 항상 내일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고 그런데 때려치우지는 못하겠고, ‘갑자기 이 재판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았어요. 아주 단순한 해답이었는데, 그건 일본사람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동포라고 해서 책임 없는 거 아니죠. 이 할머니들이 이렇게 상처를 입고 전후에 살아오셨는데 모르고 지냈다는 것 자체에 책임이 있다. 더 빨리 해결을 했어야 하는데, 송신도 할머니를 알고, 할머니가 재판을 하시게 됐는데 끝까지 그 책임을 져야 되는 거죠.
내가 계속해온 힘은 책임이라는 말, 할머니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그러나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겁기보다는 나중에는 보람이 되었고, 재미있어졌고, 할머니와의 관계도 굉장히 좋아졌고, 할머니에게 많은 걸 배웠고, 받았어요. 지금은 모임 구성원들이 다들 그래요. 이거 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10년간, 재판지원운동을 한 10년간이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네요.” 윤정은 기자▣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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