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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가 우리의 삶에 처음 다가왔던 때

오승원의 일러스트 ©일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우리를 감동시켰던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이 말해진 순간, 여인네들은 황무지와 같았던 자기 삶에 의미와 언어를 선사하기 위한 눈물 어린 시행착오와 피땀 어린 실천의 과정들에 박차를 가합니다.

 
여성주의에서부터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를 포함하여 많은 경우 어느 한번쯤은, 너무나 오래되고 유명하여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이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가슴에 품고 각자만의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부당하게도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동질감과 연대감이 자신의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가 기억나십니까.
 
어쩌면 나 역시 소외된 인간으로서 의지 있게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 곧 나의 여성주의였을 수 있고, 상처 입은 인간을 향한 탄탄한 공감능력을 기반으로 나의 여성주의가 세워졌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누군가에게 여성주의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확고하게 붙들어 매주었던 깊고 단단한 뿌리이자, 미약한 자기를 한없이 허용하고 보듬는 안식처였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의 여성주의는 어디서부터였습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가 유의해야 할 점
 
만약 내가 관습을 명분으로 하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대면하였다면, 여성주의에 의지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여성주의는 상처 입은 인간의 경험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또 맡아야 한다고 제가 믿기 때문일까요. 인간성을 존중하는 편에 서는 것이 여성주의가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니까요.
 
여성주의에서 힘을 받은 당신이 이제 다른 이를 위하여 여성주의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심리치료에서도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지요. 치료자 자신이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때에 더 뛰어난 공감능력과 이해력을 가질 수 있고, 또 상대를 더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열의를 키울 수 있으므로, 상처 입은 치유자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리학에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유의해야 할 점을 강조합니다. 자기 상처에 골몰한 사람은 자기를 넘어서 타인의 심리를 고려하지 못하고 터널 비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를 넘어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처 입은 치유자는 물론 다른 많은 치유자들도 거듭되는 훈련을 거칩니다.
 

정은의 일러스트 "말하는 연습" ©일다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여성주의를 생활화하는데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처 입은 치유자에게 필요하듯이, 상처 입은 여성주의자에게도 힘이 되는 동료와 함께 자기 상처를 뛰어넘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 내면의 신념이든 어떤 거창한 ‘-주의’든 간에,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치를 공유하는 진실된 동료가 첫 번째로 필요하다면, 부단히 자기를 고치고 닦아 나가는 끈기도 둘째로 꼽으면 서럽지요. 물론 이는 비단 상처 입은 여성주의자에게만 국한된 과제는 아닙니다.
 
만약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면은 새로이 닦아나가야 할 시점임을 알려주는 신호를 잘 감지하는 힘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과거의 젊은 여성주의자 ‘나’를 돌아봅시다. 그가 그 동안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들, 넘어지고도 또 일어서고 또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했던 많은 시간들을 향해 더 오래 산 여성주의자로서 열렬히 박수를 쳐줍시다.
 
그 다음에는, 지금 나의 삶에서 ‘사적인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적 방어’로 무장한 채 고립되어 가는 담론
 
우리는 사적인 것, 즉 인간의 삶의 위한 ‘-주의’를 실천하고자 꿈꾸었습니다만, 생생한 인간 경험은 죽어버린 채 화석화된 학문, 담론, 말, 가십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사적인 것’에 발을 디디고 있는 여성주의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명 아무에게도 설득시킬 수 없었던 여성의 사적인 고통을 ‘고통’이라 명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여성경험을 위한 개념과 담론을 부단히 만들어내야 했던 시간들을 거쳐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와중에 수 많은 여성주의자들의 노고에 힘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소위 여성주의는 그 노고를 거스르고 거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싶습니다. 사적 경험을 개념화하고 명명하려는 시도가 지나쳐 도리어 사적 경험은 증발해 버린 껍데기를 주절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심리학에서는 정서적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설명하려 하거나, 이성적인 이유만을 대면서 감정에 대해 알려 하지 않고 감정을 고립시키는 일련의 방어기제들을 일컬어 ‘지적 방어’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주의 일부가 이 ‘지적 방어’로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고립되어 가고 있음이 걱정스럽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적인 경험을 담론으로 탄생시키는 과제를 완수해야 했으므로, 지적 방어로 흘러갈 여지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학문이 지적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여성학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많은 노력들은 지적 방어의 극단에서 파괴될 것입니다. 지적 방어로 무장하면서, 우리는 여성주의가 애초에 다가서고자 했던 인간의 고통과 단절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면서 인간경험이 제거된 공허한 말을 쏟아내고, 오히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귀를 막으려는 소극적인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특히 그 누구보다 권력의 파괴력에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할 여성주의자라면 자기가 가진 권력의 영향력부터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거꾸로 가는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자 개개인에게도 정서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것입니다. 분명 여성주의 안에 있다고 하는데 자기 경험 속에서 어떤 괴리가 느껴진다면, 점검해 보라는 신호일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어려운 소위 여성주의 개념에 탐닉하면서도, 혹시 나는 내 주변 사람의 고통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고통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여성주의자인데 여성주의 안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여성주의를 점검해 보기를 권합니다.
 
곁에 좋은 동료가 있기를 바라며, 자기를 닦아 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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