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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사드 반대투쟁: ‘어머니의 법’을 정초하는 사람들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사적 어머니에서 정치적 어머니로
※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김영옥 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기사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 프롤로그: 우리 봇물을 트자
치맛자락 휘날리며 휘날리며
우리 서로 봇물을 트자
옷고름과 옷고름을 이어주며
우리 봇물을 트자
할머니의 노동을 어루만지고
어머니의 보습을 씻어 주던
차랑차랑한 봇물을 이제 트자
...
오랫동안 홀로 어둡던 벗이여
막막한 꿈길을 맴돌던 봇물,
스스로 넘치는 봇물을 터서
제멋대로 치솟은 장벽을 허물고
제멋대로 들어앉은 빙산을 넘어가자
...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
백보다 더 좋은 만의 얼굴이어라
자매여, 형제여,
마침내 우리 서로 자유의 물꼬를 열어
황하에 이르는 뱃길을 트고
구구구구 구구구구
비둘기떼 날아와 하늘을 덮게 하자
끼룩끼룩 끼룩끼룩
갈매기떼 날아와 수평선을 덮게 하자
-고정희 “우리 봇물을 트자” <고정희 시선집 1>(또하나의문화, 2011)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페미니즘 지지나 페미니스트 선언/발언/고발 한가운데서 늘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었다. 고정희의 “우리 봇물을 트자”였다. 그래, 봇물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구나! 감회랄까 감동이랄까,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즐거운 놀라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87년에 발표한 <지리산의 봄>에 수록된 이 시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한국사회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여러 여성주의 해방의 물꼬들을 위한 서시로 나무랄 데 없다. 여전히 혐오와 차별, 폭력적 배제의 시커먼 구름이 여기저기 진을 치고 있지만, 뚫고 나오는 찬란한 햇살을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인다. 빛의 봇물, 인식의 봇물, 의지의 봇물, 웃음의 봇물이 터져 나오고 있다. 분노와 슬픔의 물줄기까지 껴안고 도도한 페미니즘의 격랑(!)이 가부장-자본-국가 중심주의의 상투와 타성을 강타하고 있다. 그동안 ‘여성주의 관점’으로 전환을 꾀하고 새판을 위해 투쟁해 온 역사가 이제 꽤 굵은 계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젊은 여성 감독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낀 새로운 감흥도 이 봇물과 연관된다.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힘들지만, 뭔가 달라졌다. 의제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고 보긴 힘들지만 태도와 입장, 스타일에서 다름이 감지된다. 이들은 ‘구체제’, ‘기성세대의 가부장제/자본주의/국가주의 관습’을 추적하고 질문하며 고발함에 있어 자신이나 등장인물들이 능동과 피동 양면성을 지닌 상태로 연루되어 있음을 더 쿨하고 솔직하게, 덜 절망하는 자세로 시인하고 대책을 모색한다.
지치지 않고 부동산 투자에 몰두하는 부모를 카메라 앞에 세우는 <버블 패밀리>(마민지)의 경우를 보자. 감독은 자신의 현재 자아가 부모(세대)의 도시 개발 거품 욕망에 연루되어 있고 오염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그래서’가 아니라 ‘그런데’로 대응한다. 보는 이들도 이 ‘그런데’의 전략 태도에 합류하게끔 들숨 날숨을 허락한다. (숨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려면 일단 숨을 제대로 쉬어야 하니까.)
▶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박문칠 감독의 <파란나비효과>가 기록한 성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투쟁의 면면을 보면서도 나는 이 새로운 기운을 느꼈다. 그러면서 고정희의 “우리 봇물을 트자”를 다시 떠올렸다. 성주 투쟁을 이끈 여성들의 봇물은 한결 더 경쾌하고 명랑한 리듬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99% 불가능하더라도 1%의 가능성을 믿고 푸르른 희망의 나비가 되고자 사람들 ‘사이’를 조직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사드 가고 평화 오라" 플랭카드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띠잇기를 기획하는 이 여성들은 스스로가 모두 물꼬였다.
이들의 활동은 이전에 있었던 나비 날갯짓의 효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날갯짓으로서 앞으로 일어날 효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날갯짓을 보노라니 그동안 한국 사회 공기에 이전과는 다른 파동을 등장시켰던 여성들의 날갯짓들이 떠올랐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추모하던 촛불과 2008년 광우병 위험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던 촛불, 그리고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완수해낸 촛불에 이르기까지 광장에서 일렁이던 촛불들, 이 촛불을 밝혔던 광장의 여성들은 서로서로 나비효과의 진원지가 되어주었다.
10여 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지속되었던 밀양 할매들의 투쟁 또한 막강한 힘을 내장한 나비 날갯짓이었다. 성주 사드 투쟁이 합류하고 있는 물길의 ‘역사성’을 우리는 상이한 연령대의 다양한 여성들이 만들어낸 바로 이 날갯짓들의 계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어머니의 이름으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물꼬들 혹은 터진 봇물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물길에서 세심하게 즉, 까다롭게 살펴봐야 할 핵심 동력 중 하나는 ‘어머니의 이름으로’라는 발화자의 정체성 선언과 서명이다. 까다롭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완고한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신가족주의 맥락, 그리고 고용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계층/계급의 문제가 ‘어머니’ 혹은 ‘모성’에 관한 사유를 더욱 복잡하고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맘충’이라는(미소지니misogyny에서 연유한) 호명이나 ‘노키즈존’(no kids zone) 확산 등의 사회적 현상은 어머니 노릇하기를 둘러싼 오래된 이데올로기와 성별 정치학뿐 아니라 비혼/결혼을 둘러싼 연령과 계급의 정치학도 무대 위로 불러낸다. (비혼 여성들, 결혼한 여성들,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여성들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의 갈등 상황은 더 심각하다.) 늘 그래왔지만, 그리고 근본적으로 분리하는게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계층/계급 간 격차가 심해지고 ‘내일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진 사람들’의 범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 두 정치학은 더욱 겹치고 있다. 어머니/어머니 노릇이 여성주의가 피해갈 수 없는 의제인만큼, 더 까다롭게 살피고 더 조심스럽게 다루는 게 필요한 이유다.
본질주의적 모성 주장은 여성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과할 뿐 아니라 모성의 구성적·역사적 성격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여성주의 인식론에 어긋난다. 반면에 모성을 수행으로 보는 구성주의 관점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난감하다. 성별정체성이나 성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이가 수행할 수 있고 수행해야 하는) 돌보고 기르는 활동을 ‘모성’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은 그래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살펴보자.
▶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중에서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에서도 ‘어머니의 이름으로’는 중요한 출발지점이다. 자라나는 아이들–그들의 건강하고 안전한 현재와 미래–, 그들을 재난과 파국에서 보호해줘야 할 어머니의 의무, 아니 꼭 보호해주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하고 비장한 의지는 여기서도 주요 서사 플롯이다. <파란나비효과>가 소개하는 투쟁 현장에는 여타의 투쟁 현장과는 뭔가 다른 독특함이 있다. 무엇보다 투쟁이 전적으로 여성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으며, 이 여성들은 주저앉아 울부짖을 때조차도 건강하게 밝고 활기차다. 이들은 ‘아이 자라는 곳에 사드를 배치할 수 없다’고 목청 높여 투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청껏 발화되고 있는 ‘어머니의 이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우선 이들이 서 있는 구체적인 어머니/역할의 자리를 강조하는 것, 즉 이들을 ‘누구누구의 어머니’로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 사실에 함몰되면 안 된다는 필연성도 감지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명백히 의미심장한 물길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지키겠다는 이 어머니들의 약속과 선언을 다른 지평에서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이들이 피의 논리를 따르는 생물학적 어머니임을 넘어서, 움직이고 결단하며 새로운 정치적 비전과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만들어내는 국면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를 살려 달라’며 일인시위로 시작한 이들의 투쟁은 ‘보통 여자들’ 혹은 ‘보통 엄마들’이 당사자성에 입각해 지속적으로 각성과 실천 사이를 오가며 단단한 정치적 주체로 변태해나가는 과정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부지불식간에 당사자가 되어버린 이들이 당하며, 놀라며, 당혹해하며 깨닫고, 이 깨달음을 바로바로 투쟁의 내용으로 전환하는 역동에서 나는 2008년 ‘모두의’ 안전한 식탁을 위해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발랄했던 행보를 다시 확인한다.
생활정치와 식량주권의 담론을 폭넓게 확산시킨 2008년 투쟁은 그러나 다분히 글로/컬 소비/자의 삶의 질이나 환경에 머물러 있었다. 동물권이나 먹거리 소비, 더 나아가 소비-문화 자체에 관한 근본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2016년 성주 여성들이 보여주는 각성의 양상이나 보폭은 조금 달라 보인다. 이들은 당대 환경정치·정치환경의 맥락을 간파하는 그만큼, 삶과 정치의 관련성 자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공공성이나 사회 정의, 고통 받는 ‘이웃’ 등에 관한 생각이나 질문, 동참 없이 살아왔는가를 반성하고, 이곳의 ‘나’의 안녕한 삶이 다른 곳의 ‘다른 이들’의 안녕한 삶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화된 감정으로 깨닫는다. 이제껏 선거 때마다 표는 당연히 보수당에게 주었고, 5.18은 북한군의 소행인줄 알았으며, 강정이니 밀양이니 세월호니 하는 말들은 저 먼 곳 어딘가에서 떠도는 반사회적 인간들의 불온한 불평불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랬던 이들이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당신들도 한번 당해보라’는 저 ‘이웃’의 독한 말을 화두 삼아 뼈아픈 당사자의 의식화 과정을 밟아 나간다.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체제유지 목적으로 왜곡된다는 사실에, 놀라고 절망한다. 무엇보다 ‘외부세력’이 거론될 때 그동안의 비교적 안온했던 집회의 풍경은 도전받는다. 이제 말하고 듣기의 문제가 허울 좋은 ‘소통’의 외피를 벗고 ‘불화’의 관점에서 진지한 정치적 의제로 다루어진다.
이런 훈련의 격자들을 통과하며 <파란나비효과>는 사적·생물학적 어머니가 정치적 어머니로, 비판적 정치 주체로 변태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 사실 이런 과정은 거의 모든 당사자들의 의식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밀양 할매들도 ‘늘 1번을 찍던 자신들의 손가락’을 탓했으며, 2008년 광장에 모였던 여성들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510일간 투쟁을 지속했던 이랜드 비정규직 기혼여성노동자들도, 세월호 유가족들도, 보통 여자, 혹은 보통 엄마로 ‘생각 없이 살던 상태’를 처절하게 반성하며 변태해나갔다.
▶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중에서
그런데 <파란나비효과>에서는 이 과정 중 어떤 사건 하나가 살짝 돌출하고 있으며 내게는 이 사건과 그 후유증이 매우 흥미로웠다. 사소해보일 수도 있는 이 사건은 매우 뾰족하고 단단한 핵심을 품고 있으며, 젠더 관점에서 성주 여성들의 투쟁에 어떤 질적 도약을 마련한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이것이 사건인 줄도 모르고 있으며, 사건으로서 이것이 어떤 중대한 전기를 마련했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어머니의 이름으로’가 어머니의 역할이나 모성 수행을 정치적 무대 전면에 재배치하는 효과를 낳았다면, 이 사건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는 ‘어머니의 법’을 상상하고 개념화하는데 꼭 필요한 수행적 실천으로 전환한다(고 이 기록을 보는 나는 느낀다).
이 사건이란 성주 군수가 정부의 사드 배치 장소 변경 발표 이후에도 (단순히 잔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활기차고 다채롭게, 즐겁게 투쟁을 이어가는 여성군민들을 싸잡아(“사람들이 더 즐거워하는데 이걸 어쩌지?”라고 말하는 투쟁여성) ‘전부 뭐 술집하고 다방하고 그런 것들’로 호명한 일을 가리킨다.
처음에 혈서를 쓰고(혈서야말로 얼마나 젠더화된 투쟁 방식인가!) 단식을 하면서까지 사드 배치를 반대했던 군수 김항곤과 지역구 국회의원 이완영, 그리고 관변 사회단체들은, 인구수가 좀 적은 초전면 소성리에 있는 롯데 스카이힐CC 골프장으로 사드 배치 장소를 옮기겠다고 정부가 발표하자 감읍하며 열렬하게 환영한다. ‘아이를 살려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연대를 약속하던 어제의 그들은 오늘 국가 안보와 지역경제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이 모든 것에 ‘무지한’ 여성들에게 (그들의 의도에 따르면!) ‘성적 방종’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상호 국민/시민/군민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상투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서 시시할 정도지만, 이 상투적인 젠더 의식의 돌출 덕분에 <파란 나비 효과>는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나비 효과를 낳는다.
3. ‘아버지의 법’이 가져온 현실에 맞장 뜨는 여성들
다시 한 번 환기하자. 성주 투쟁은 여성들의 투쟁이다. 투쟁에 함께 하며 마찬가지로 각성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두 명의 남성이 등장하지만, 조직과 결집 모두에서 성주 투쟁은 압도적으로 여성들의 깨어남과 일어남, 그리고 함께함의 행보였다. 다큐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신념을 져버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투쟁하는 여성의 입을 통해 ‘들리는’ 남자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국가라는 거대한 힘에 납작하게 눌려 있다.
“국가랑 싸워서 이기겠나.” 그들이 내세우는 변명이다. 이 말을 들으면 밀양 할매들은 뭐라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며, 내가 죽더라도 내 시신은 가족의 것이 아니라 대책위의 것이라는 유서를 가슴에 품고 마지막 순간까지 신자유주의 국가와 맞붙어 싸웠던 밀양 할매들의 치열한 격전을 소문으로라도 들어봤다면 ‘창피해서라도’ 저토록 섣부르고 나태한 포기는 하지 않았으리라. 국가가 안보를 내세워 군민/국민의 합의를 얻지 않은 채 군민/국민들의 삶 한가운데 죽음장치를 배치하려는데,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는 군민/국민을 (‘누구’라고가 아니라) ‘무엇’이라 여기느냐 질문하기에 앞서 국가의 거대한 힘에 압도당하는 이 남자들은 그저 관습에 결빙된 무감각한 신체일 뿐인가.
▶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중에서
국가는 특정한 행위 규범을 강제함으로써 ‘바람직한 국민/시민/군민’의 위상을 정하고, 이에 따라 특정 집단에게는 무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편, 다른 특정 집단은 ‘위법한’ 집단으로 낙인찍는다. 합법과 위법을 나누는 최종 심급으로서의 ‘아버지의 법’(이라 일컬어지는 법 체제)은, 정의를 추구함에 있어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는 주민들 사이를 뚫고 폭력을 위임받은 경찰들이 밀어닥칠 때 전락의 최저 수준을 드러낸다. 당대 한국사회 국민/시민/인민은 이것을 가까이는 밀양에서 경험했고, 멀리는 5.18 광주에서 경험했다.
성주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전락을 목도한다. 성주 투쟁을 기록한 <파란나비효과>에서 그런데 눈에 띠는 것은 이러한 국가권력과 매우 나태하고 비루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부장제 하수인들의 모습이다. 전락한 국가권력에 기생하는 이 하수인들은 더욱 더 솔직하게 비루한 민낯을 드러내곤 하는데, 거기에는 역사의 시간들을 뭉개버리는 매우 일관되고 상투적인 젠더 고정관념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 하수인들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내뱉는 ‘판단’은, 아이의 평화로운 현재와 미래를 위한답시고 양육의 고유한 장소인 가정을 떠나 바깥에서 떠돌며 떠들어대는 여자들은 모두 ‘술집이나 다방’과 관련된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부 뭐 술집하고 다방하고 그런 것들’이라는 성주 군수의 발언에 즉각적으로 튀어 오르는 느낌과 질문들. ‘것들’이라니? 군수에게 여성군민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예 싸잡아 ‘무엇’인가? 사람도 아닌? 집밖에서 상행위를 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하는, 심지어 경제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해야만 하는, 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찍히는 일 아닌가?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저 많은 술집들, 카페들, 식당들, ‘고급’ 레스토랑들, 커피 체인점들, 그 모든 곳들에서 술과 커피를 팔지 않는가? 술과 커피 없이 이 강퍅하고 건조하며 동정 없는 신/자본주의 일상을 견딜 수 있는 국민/시민/군민이 얼마나 될까? 고급 레스토랑이나 술집에서 비싼 술과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이 신자유주의 성공 키즈의 알량한 자기 과시 아니었던가? 지금 ‘잘 팔리는 것’을 잘 알아내 ‘파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기개발을 잘 하는 사람 아니던가? 아하, 그렇다면 해답은 글로벌 ‘카페’와 로컬 ‘다방’의 차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남성 판타지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망상들 속 한가운데서 요정과 룸살롱이 블랙홀처럼 술 팔고 커피 파는 모든 상업 장소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술집과 다방에서 술이나 커피 등 음료가 아닌 다른 무엇을 구매한 경험자의 무의식적 자기-폭로 발언이었던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관한 성주 투쟁 여성들(어머니들!)의 답변은 혼종적이다. 자신이 ‘그런’ 여자로 ‘취급된다’는 것에 놀라움과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함부로 대한다”, “저 사람한테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실제로 술집이나 다방을 경영하는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여성이 있다.(“제가 아는, 여기 투쟁을 하며 알게 된 분 중에 술집하시고 다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뭐 어때서요? 정말 열심히 살고 정직하게 살고 ...”) 이러한 반응 내지는 답변은 지독한 가부장제 한국사회 여성들의 ‘내재화된 여성성’ 풍경의 무/의식적 주체화를 당혹스럽게 드러낸다.
그러나 궁극적인 답변은 “김항곤 성주 군수의 막말과 성차별 발언 규탄 기자회견”에 실려 있다. 핵심은 그렇다, 더도 덜도 말고 성차별이다. 여성이 실천하는 구체적 경제활동으로서의 술·커피 등 음료 판매를 성별화된 남성중심 성문화와 연결시켜 음란하고 음험하게 폄훼하는 것이나, 집밖으로 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모든’ 여성을 오로지 그 성문화의 대상일 뿐인 존재로 지정하는 것이나, 별 차이 없이 다 오래된 미소지니의 표출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설정한 성적 계약이, 남성을 개인/시민/주체로 설정하는 근대의 사회계약론을 가능케 했다는 캐롤 페이트만의 논의를 성주 군수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설파한 것이다. 성주 군수의 말은 전혀 놀랍지 않은 동시에 매우 놀랍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결정과 행동에 부여한 합리성이나 논리적 근거가 다름 아닌 성적 계약이라는 사실을 두고 새삼 놀란다면 순진함의 정도가 심한 것이고, 그렇다고 전혀 놀라지 않는다면 정치적 피로감의 정도가 심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동안 함께 투쟁해온 너와 나의 역사가 엄연한데, 피로감이 종착지일 수는 없다! 내재화된 여성/성 이미지와 명백한 성차별 비난 사이에는 실제로 또 다른 다양한 항변들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 항변들이야말로 피로감이 종착지일 수 없음을 통쾌한 일상의 반란언어로 선언한다.
“술 팔고 커피 판 돈이 니 월급이다”, “나는 커피 파는 여자다. 너는 성주 파는 군수냐”, “술 팔고 커피 팔아 세금 낼 때는 국민이고 생존 위해 사드 반대하니 미친 여자 취급받네”, “술집을 하든 다방을 하든 성주 군민이다”, “다방하고 술집하면 사드 반대 안 되나? 말이가 방귀가”, “다방하고 술집하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나 막말 군수 사퇴하라.”
이것이 바로 그동안 ‘아버지의 법/이름’을 빙자해, ‘아버지의 법/이름’에 기생해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낱낱이 핥겠다고 납작 엎드린 남성들의 현 주소에 부친 성주시 여성들의 메시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 남성들 대부분이 가장 잘 해온 일은 여성의 모든 행위와 견해와 정체성을 성애화시켜 성적 계약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남성성의 신화를 강화하고 남성연대의 균열을 막는 것이다.
공공연히 부정의를 행하면서 사회 전체를 윤리적으로 무감각하게 평준화시키는 일이야말로 이들의 변함없는 공적이다. 이들이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가?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선택하고, 선택이 전개시키는 과정과 결과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에 기생해온 오랜 습속과 모든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며 ‘우리 남자들’이라는 정체성을 즐겨온 호모 소셜 행동방식 외에 이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견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중에서
<파란나비효과>가 증언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렇다. 그리고 이런 정황은 비단 보수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디에서건 견해 없이 관행만으로 사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게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가 옹호한 ‘아버지의 법/남근중심주의’ 그늘 아래서 아들의 자격으로 근거 없는 수혜를 누려온 (생물학적) 남성들의 현 주소다. 이 현 주소는 상징적 질서를 가리키는 ‘아버지의 법/이름’이 얼마나 상징계와 무관한, 편파적으로 변색된 채 고착된 상상계인지, 또는 상징계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부장제 현실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사회계약의 개인/시민/주체로서 오랜 시간 특권을 누려온 남성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의 법’을 한층 더 부패와 전락의 민낯을 향해 밀어붙이는지 최근에 알려진 몇몇 사례를 들어보자. 청춘일 때는 아프거나 객기 때문에(안경환, 탁현민, 홍준표), 갱년기 때는 문득 인생이 막막하고 허무해서(김훈, 임권택), 늙어서는 저도 모르게(박범신) 여성을 성적 타자로 만들면서 자신을 ‘생산하는 욕망기계’로 구축하고 유지하는 남자들. 이들은 또한 부친 살해를 실행하지 못한 부채감이나 수치심은커녕 민망함조차 없이 서로 우쭈쭈 해주며 철부지 놀이에 정신을 빼앗기며(손희정,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참조) 시대착오적 시대정신의 한 갈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런 남성성 추구 남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아버지의 법/이름’과 관련해 ‘남자들’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 그 남자들은 아버지의 법/이름에 기생해 그 아버지의 법/이름을 본래 출발점인 정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즉 부정의의 알리바이로 만드는 성별화된 집단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생각과 견해가 있는 남자들도 적지 않다. 저 시대착오와 부정의에 갇혀 있는 아재들을 향해 “그러나 여성을 향한 폭력을 딛고 서있던 ’당신들이나 좋았을 그 시절‘은 이미 끝났다“(이준행, ”남자설명서 개정판”)고 단호하게 파문(破門)을 선고하며, 강간 문화와 성적 계약의 종결을 선언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386 남성들, 여전히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채 어른의 몸에 갇혀 있는 이 ‘자라지 않는 아재들’이 일종의 시대정신(손희정)을 이루고 있다 해도, 그것은 잔류하는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으며,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도도하게 부상하고 있는 여성/주의-류(femi/n/ism-wave)의 봇물이 바로 그 시대정신을 실어 나른다. 세상살이에 관한 질문과 생각을 멈추지 않고 사는 동시대인이라면 이 시대정신이야말로 당대의 대표성을 띤다고 인정할 것이다.
그동안 공사 영역의 이분법 자체를 질문하며 다양한 공개장을 펼치고, 개별적 살림의 실천을 집단적 ‘서로 살려냄’의 정치학으로 벼려낸 여성들의 다중적 행위가 터온 물꼬들은, 필연적으로, 여성/주의-류로 흐르고 있다. 소수자·약자 집단을 향한 시대착오적 혐오와 차별의 악한 기운도 만만치 않지만 도처에서 터지고 있는 여성주의 인식론과 세계관의 봇물은 지금 한국 사회의 뚜렷한 시대정신이다. 이 시대정신은 아버지의 법/이름을 정의의 법정에 소환한다. 이 소환을 이끄는 주체가 가리키는 새로운 지평은 여성주의 관점에서 정초되는 어머니의 법/이름이다. 이 법정에서는, 카프카의 블랙유머를 빌어 말하자면, ‘포르노’에 코 박고 있는 소위 전문가들의 판단은 더 이상 정의·부정의를 분별하는 전거가 될 수 없다.(이것은 그러나 블랙유머를 넘어서 광범위한 현실이 되고 있다.)
4. 이미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어머니의 법’
어머니의 권위 대 아버지의 법(크리스테바)이라는 상징계의 대당이 도전받고 있으며, 실제로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는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오염과 정화, 윤리적 책임의식과 생활태도를 가르쳐 질서체계/법 세계로의 진입을 돕는, 즉 국가와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되게 하는 책임을 지는 어머니의 권위는 아버지의 법을 근본에 있어 질문하지 않은 채 법의 유지를 도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법이라는 기표는 결코 생물학적 아버지/아들의 현실과 무관한 상징 질서로만 의미화될 수 없다. 이 기표는 오히려 현실 속에서 거의 생물학적 아버지/아들의 권력으로 미끄러지고 오용되며 그에 따른 다양한 폭력을 야기한다. 정초하는 그래서 정초된 것으로서 법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적 국면을 지닌다. 법을 정초하는 위력이나 법을 보존하는 위력이나 모두 (~을 하도록 강제하는) 힘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법을 어머니의 권위 대 아버지의 법이라는 대당 속에서 개념화시킬 때, 그 폭력적 국면은 젠더화된 현실의 맥락 속에서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권위 대 아버지의 법이라는 대당을 근본에서부터 질문하고, 상징계의 대표성을 아버지의 법이 아니라 어머니의 법이 떠맡게 하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법에 폭력성이 내재한다는 것, 즉 정의의 현실적 구현으로서 법은 언제나 정의의 타락과 배신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어머니의 법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법이 현실 속 생물학적 아버지나 아들의 세계와 무관(해야만)하듯이 어머니의 법도 현실 속 생물학적 어머니나 딸의 세계와 무관(해야만)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법은 법/상징계의 성찰 자체를 가리키는 기표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어머니의 법 역시 논리적 당위성과 현실적 구현 사이에서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다. 어머니의 법/이름이 과연 어떤 상징적 규범체계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할 수 있을지, 그 지평과 현실 속 여성/주의 실천은 얼마나 유연하고 창의적인 반성-실천의 순환궤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어떤 설득 가능한 지향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일단 생성 중인 시도들, 힘들에 (자기 한계를 무릅쓰고라도)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법/이름은 어떤 맥락 안에서 명명 가능한가?
▶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파란나비효과>(박문칠 감독, 2017)
일단 어머니의 법/이름으로 터지는 봇물은 아버지의 법/이름이라는 규율/통치 장치가 벌이는 전쟁과 폭력, 죽음정치에 이의 제기하며 구현되는 다양한 삶정치, 생활정치의 실천들을 규합한다. 어머니의 법/이름과 조응하는 현실에서는 접촉 가능하고 오감이 살아있는 관계와 경험을 존중하며, 윤리적 상생을 향한 꿈이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면대면 소통이나 먹고살기 위한 일이 정치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생물학적 남성성으로 오인되는 남근(Phallus)이 아니라 모든 필멸하는 생명의 기원을 가리키는 배꼽(Omphalos)을 상징계의 반성적 중심 내지는 시작으로 간주한다(Elisabeth Bronfen). 돌보고 기르는 손의 다양한 활동에 깃든 사유와 감정을 도구화된 이성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자동화된 감정의 비판적 잣대로 세울 줄 아는 이 신생 공화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파란나비효과>의 첫 장면이 자본이 아닌 의미를 찾아 성주로 이주한 여성의 이주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주의 시대에 국가 간뿐 아니라 일국 내에서도 여러 형태의 이주가 실행된다. 이 일국 내 이주는 종종 국가주의나 지역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삶의 지향, 목적, 의미추구, 소비형태, 신념 등에 따른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은 마을 성주에서 진행된 투쟁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가 상호지지 속에서 용인하고 추동한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항해 현재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성주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고발과 선언, 촉구 등과 동일선상에 있다. 거칠게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한국 남성들의 동성사회적 연대와 자본주의, 국가가 생산하는 불의의 법정 소환이다.
성주 여성들의 투쟁은 적대와 불화, 암묵적·명시적 배제와 차별 등 통치기술로 전락한 국가가 아버지의 법을 내세워 행했던 규율들에 무효선언을 하고 다른 전거를 세우는 실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실천은 거듭 강조하건대 일종의 해체(주의적) 자기반성과 분화, 자기와 타자들의 삶을 ‘더불어 삶’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시도와 수정, 목표 재설정 등을 통과한다.
<파란나비효과>가 기록하고 편집한 서사 내부에서 여성들이 진화하는 모습은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제까지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지를 통렬히 반성하며 사드 배치를 막아내려는 성주시 여성들의 시도는, 전화 몇 통화로, 문서 몇 장으로 사드 배치를 결정하려는 아버지의 법 하수인들과 선명한 대척점을 이룬다. 적어도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가족 제도를 보호하거나 사적 재산의 증폭을 위해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며, 체제 유지를 위해 배치 반대를 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님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체제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반대를 외친 것임이 드러난다. 이 법정 앞에서는 국가(와 자본, 가부장제)에 의한 ‘모성 보호’의 가면이 벗겨지고, 의식화를 향해 거듭 진화 중인 여성들의 ‘모두의 모두를 향한 마음 씀’을 제창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성주 시위를 주도한 어머니-여성들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가리키고 있는 어머니의 법은 일방향 명령이나 일괄 규정이 아닌 감응이 있는 규범, 혹은 규범을 반성하는 감응에로의 초대와 조응한다. 이 여성들의 어록이나 행동방식에 따르면, 이들이 정초하고 있는 법은 강제나 배제가 아니라 청유나 포함이며(‘우리끼리 분위기 좋은 거 보여주면, 사드를 찬성하든 말든 군청 공무원이든 경찰이든 편안하게 우리가 직접 만든 물건 구경하면서, 여기 끼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먹고사는 사회적 삶과 옳고 그름에 관한 도덕적 판단, 함께 있어 행복한 삶의 일치를 지향한다.(‘내가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 엄마들한테 늘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려면 본인이 올발라야 한다고 얘길 하는데, 내가 정의를 보고 진실을 보고 모른 척 하고 덮어버리면 내가 강의하는 것하고 안 맞지 않냐.’)
이 법은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정치경제가 아니라 일종의 탈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라 일컬을 수 있는 즐거운 공생을 지원한다. 그래서 이 법은 언어적 수행성의 능력을 제거당한 채 박제된 추상 조항들로 법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손이 행하는 만들기와 면대면 주고받기가 활발한 구체적 장소들에서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이 법의 모토를 대라면 “성주에서 자급자족하는 공간 하나 만들어보자”일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이곳에서 “사회적 인간, 건설적 만남만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인 마음이 “그분들과 지내는 게 너무 좋고 그분들께 배우는 것이 많고 그분들과 함께 뭐 하면서 정말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분들’은 처음 모습 그대로 변심하지 않고 자신의 맡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뜻이 맞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이 고백은 “미친 여자처럼” 돌아다니면서 “정치는 생활”임을 절절히 깨닫는 과정에서 흘러나온다. 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소박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법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법을 숭앙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 7월 31일 청와대 앞.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에 반대하는 상주 김천 주민들의 상경 기자회견. ⓒ사드저지전국행동
5. 에필로그: 할매들, 언제 어디서나 배후세력
한국에서 정의롭지 못한 정치경제 행태에 맞서 저항이 있을 때마다 주류 반동세력이 예외 없이 꺼내드는 혐의는 ‘배후세력’이다. ‘종북 빨갱이’ 등은 분단국인만큼 여전히 일정 부분 효력이 있어 걸핏 하면 주저 없이 빼 쓰는 만년 적금 같은 것이다.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의 경우에도 역시 ‘배후세력’ 혐의가 대두되었고, 혈서 쓰고 단식하는 군수와 함께 투쟁을 시작했던 군민들은 이 어이없고 어리석은 게임에 즐거운 유희 정신과 진지한 의지로 맞섰다.
<파란나비효과>를 여러 번 되돌려본 나는 이 투쟁에 아닌 게 아니라 배후세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할매들이다. 쑤시는 무릎을 참아가며 집회현장에 앉아 ‘사드는 안 된다’ 외치고, 인간 띠잇기를 벌일 때 아픈 허리를 참아가며 긴 시간 꼿꼿이 서서 버틴 할매들. 정부의 사드 배치장소 이전 발표 후 군수와 함께 보수사회단체들이 인근 지역에서 사람들을 동원해 사드 찬성 집회를 열 때 이 할매들 거침없이 일갈한다. “(저 사람들) 딴 데서 들고 왔대매? 늙어빠진 것들 어데서 들고 왔노? 쪼까내지! 그 미친 놈, 군수 놈이 오라캤나? 그 군수 놈 쪼까내라, 그 왜 가만 냅두노?”
이 할매들이야말로 “미친 여자처럼” 돌아다니며 투쟁을 조직하고 펼친 여성군민들의 진정한 배후세력이다. 이 할매들은 지금도 서울까지 올라와 투쟁에 맵고 걸출한 기운을 북돋는다. 사실 죽음장치인 사드 배치가 ‘성주 어디에도 안 되고, 대한민국 어디에도 안 된다’는 외침은 단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할매들도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하고, 현재 중장년인 군민들도 건강한 삶의 환경 속에서 안전한 노후를 보내야 한다. 아이들이 대표성을 띨 뿐이다. 아이들은 대표성을 띠고 할매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배후세력이 되는 사회, 어머니의 이름으로 도모하고 어머니의 법을 지키는 사회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곧 다가올 미래의 할매로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장은 안보니, 미 제국이니 하는 말들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외침은 ‘왜 미국이 아니고 성주냐’ 가 아니라 ‘미국에도 안 된다’가 되어야 하며, ‘일본에는 돼지 두 마리만 있는 곳에 사드 배치했다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 자라나는 성주에 배치하냐’가 아니라 ‘돼지든 개든 생명 있는 곳은 안 된다’로, 더 나아가 ‘미사일 따위는 전부 안 된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고미사일 자체가, 그것의 배경인 전쟁이나 파괴 자체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역사를 꿈꾸는 것까지 여성주의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정치가 뭔지 모르는 여자들의 순진한 백일몽이라고 치부하는 태도의 경직된 역사의식을 흔들어 깨울 수 있어야 한다. 생성 중인 어머니의 법/이름이 정초되어야 하는 필연성 중 하나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의 통렬한 반성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존은 모든 생명 사이의 공의존에 관한 자각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읍에서는 시민들이 소싸움 도박장 불허를 외치며 40일이 넘게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유순한 동물인 소를 억지 싸움시켜 인간의 오락으로 삼는 것, 이것이 소위 전통 소싸움”이며, 동물 학대요 폭력임을 호소하는 시민들의 확대된 ‘이웃 사랑’이 소중하다. 성주 사드 배치 안 되고, 정읍 소싸움 안 된다. 안 되는 건 진실로 안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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