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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직업, 여자직업’ 고정관념을 깨라

일터에서 ‘젠더를 뭉갠’ 다섯 명의 언니들



“타워크레인 운전한 지 25년 넘었어요. 열여섯 살 때부터 신문배달도 하고, 시다도 하고, 미싱 일도 하다가… 직업훈련소에서 타워크레인 기사 모집 공고를 신문에 냈는데 아는 선배가 ‘너 딱이다, 니 성격에 딱 맞을 거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1번 기중기, 2번 뭐, 3번 뭐 있었는데 ‘못 먹어도 1번이야!’ 하면서 1번 딱 찍어서 훈련소에 들어갔죠.” (백순애/ 타워크레인 기사)

 

지난 11일 저녁 7시, 신촌 인디톡에서는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주최한 “젠더를 뭉갠 언니들: 여성의 일이 궁금하다” 집담회가 열렸다. 이른바 ‘여성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모여 자신의 일에 대해 얘기하는 흔치 않은 자리였다.

 

타워크레인 기사 백순애씨를 비롯해 자동차 정비사 김하나씨, 조선소 용접공이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대형버스를 모는 최은희씨, 외근 엔지니어(방문 A/S 기사) 오경선씨. 이 다섯 명의 대화에는 ‘차별’이나 ‘피해’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민주노총 김수경 여성국장은 “여성노동에 관한 담론은 어두운 편이고 여성은 노동 안에서 늘 피해자의 위치를 점해왔다. 오늘은 여성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힘을 확인하고 싶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①타워크레인 기사 백순애: 여자라서 못해, 이런 거 없다

 

▶ 노란 동그라미 안에 서 있는 사람이 타워크레인 기사 백순애 씨다.


“아파트 지을 때 보면 건설현장에 높은 T자 모양의 기계가 보이죠? 그게 타워크레인이에요. 건물이 높이 올라가면 사람이 자재를 메고 올라갈 수 없으니까 밑에서 위로, 위에서 밑으로 자재를 인양하는 작업을 하죠.”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든 백순애씨는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에서 하루에 스무 시간씩 미싱 일을 하면서 노동야학에서 학습도 했다. 순애씨 야학 못 가게 하려고 사장이 공장 문을 밖에서 잠그고 야근을 시켰는데 불이 나서 죽을 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노조 만들려다 쥐어터진” 적도 많았다.

 

그러다 타워크레인 기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순애씨는 “당시 지원한 여성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6개월을 못 버텼다”고 전한다.

 

“처음에 탈 때는 무서움도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지금은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거예요. (타워크레인으로) 물건 옮기다가 부딪치거나 떨어지면 바로 사람이 죽으니까 부담이 커요. 일을 빨리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보니까 후배들한테도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러자 2011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순애씨에게 질문했다. 본인이 크레인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본 게 오줌통이었는데, 여성의 경우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고. 또 바람 불면 크레인이 장난 아니게 흔들려서 멀미를 많이 했고 (크레인에서) 내려와서도 땅 멀미를 심하게 했는데, 어떠냐고.

 

“바람과 크레인은 상극이에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고 2003년 태풍 매미가 왔을 때는 크레인이 많이 넘어갔어요. 예전에는 사람 손으로 (크레인 떠받치는) 와이어를 조여서 더 위험했지만 지금은 그나마 공법이 바뀌긴 했어요. 화장실 문제는 남자는 페트병 하나면 끝나지만 저는 일회용 비닐팩에 볼 일 보고 퇴근할 때 갖고 내려와요. 500ml 물 한통을 삼일동안 마셔요, 오줌 마려울까봐.”

 

백순애씨는 노동조합 활동도 열심히 한다. 2006년에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일요일에도 일하는 건 물론이고, 타워크레인 운전대까지 씩씩거리면서 올라갔는데 원청 직원들이 “어이, 어이”하고 불러서 내려가면 “(내 맘에 안 드니까) 당신 집에 가!”라고 하기 일쑤였다고.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이제는 전국의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동일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게 됐다.

 

순애씨는 “나처럼 남자빤스 많이 본 사람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웃는다. 현장에 탈의실이 따로 없다보니 남자기사들이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것. 그래도 순애씨는 “여자니까 난 이런 거 못해, 이런 거 없다. 현장에서 편하게 나는 반(半)남자다 라고 생각하고 일한다”고 말한다.

 

“따로 정해진 정년은 없어요. 나중에 요실금 생기면 어쩌나 싶고, 나이가 너무 많으면 올라오고 내려가기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없고 기계치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업이 타워크레인 기사에요.”

 

민주노총 소속 여성 타워크레인 기사만 해도 백 명 가까이 된단다. 백순애씨는 “여성이라서 차별받았던 경험은 없냐”는 질문에 “아무도 날 안 건드린다”며 호탕하게 대답한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중학교 과정을 다시 밟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싶은 게 순애씨의 바람이다.

 

②자동차 정비사 김하나: ‘남자 일’이란 건 편견일 뿐

 

▶ 자동차 정비사 김하나씨


“스물아홉 살까지 사무직으로 일했는데 ‘자격증이나 기술 없이 몇 살까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내 업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나이 먹으면 더 젊은 애들이 와서 내 자리를 뺏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른이 되기 전에 선택하자고 마음먹고 장벽이 낮은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땄죠.”

 

만 3년차 정비사인 김하나씨는 “막상 자격증은 땄지만 여자정비사 구하는 곳이 없어서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찾다찾다 못해 카센터 경리직에 지원했는데, 그쪽에서 하나씨가 정비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정비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하나씨는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엔진오일 교체인데, 엔진을 내리는 건 기계가 다 하고 사람이 굳이 힘을 안 써도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남자정비사보다) 손이 작아서 좁은 틈에 있는 볼트를 푼다거나 할 때 유리하다고.

 

하나씨는 자신이 직접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여태까지 “여자는 더러운 일 하면 안 돼, 무거운 것 들면 안 돼”와 같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자에 대한 이미지가 깨졌다고 한다. 막상 해보니까 “왜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자들에게 도움을 구하기 싫어서 무거운 물건들을 안간힘을 쓰면서 들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 좀 같이 들어달라’고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사람은 누구든 핸디캡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의 젠더가 작은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인 셈이다.

 

김하나씨는 지금은 전기자동차를 정비하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힘쓰는 일, 더러운 일은 예전에 비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남성중심 직종이라 마냥 편한 건 아니다. “자동차 정비 일이 남성에게 더 맞는 일 같냐”는 질문에, 하나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남자, 여자 힘 차이가 있어서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데 1년 정도 숙달되면 그렇게 크게 힘든 일은 없어요. 오일을 몸에 맞을 때가 있는데, 그런 더러운 것이나 사람 대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만 없으면 여자든 남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여자는 자동차 정비기사로 취업이 힘드니까 진입 자체가 어려워요.”

 

③방문 A/S기사 오경선: 이 직업 재밌고 좋다

 

▶ 외근 엔지니어(방문 A/S 기사) 오경선씨


“컴퓨터 관련 직장에 15년쯤 다녔는데 37살쯤에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어요. 수술을 받고 ‘인생이 뭘까, 내가 잘 살아온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회사 그만두고 3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그때 깨달은 게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직업, 운전하는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는 거였죠.”

 

8년차 외근 엔지니어인 오경선씨 얘기다. 당시 경선씨는 일주일 만에 대형면허증을 따고 뭘 할까 고민했다. 버스, 마을버스, 분뇨차까지 생각하다가 화물 물류차를 선택했지만 가족들이 극구 만류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삼성전자서비스 여성 외근 IT 기사 모집 공고를 봤다. 고객의 집을 방문해 컴퓨터, 노트북, 복사기, 청소기 등을 고치는 일이다. 컴퓨터도 오랫동안 만졌고 무엇보다 돌아다니는 직업이라서 마음에 들었던 경선씨는 직업훈련을 받을 때 왜 기업에서 ‘여성’을 뽑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남자가 모 기업의 에어컨 수리기사를 가장해서 집에 들어와 강도짓을 한 사건이 있었어요. 다행히 사람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 삼성에서는 방문수리 중에서 무겁지 않은 제품,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을 할 여자 기사를 뽑은 거죠.”

 

당시 1기 여성 외근 엔지니어로 30명이 뽑혔지만 대부분 1년 안에 그만두고 지금은 4명이 남아있다. 1기였던 여성들은 삼성에서 2기 엔지니어를 뽑으려고 할 때 반대했다고 경선씨는 전한다. 지금은 노조가 만들어져서 기본급이 있고 일정량을 달성 못 해도 기본급을 받지만, 8년 전에는 기본급조차 없는 성과급 체계여서 제일 적게 받을 때는 80만원도 받았다고. 80만원에서 차 떼고 포 떼고(보험 등) 나니 손에 들어오는 돈이 40만원 남짓이었다는 것. 이런 이유로 1기 엔지니어들은 “이럴 거면 다시는 직원 뽑지 말라”고 사측에 항의했던 것이다.

 

경선씨는 이 직업이 재밌고 좋다고 한다. 돌아다니는 것도 좋고, 고객의 불편사항을 금방 금방 해결하니까 성취감도 높다. 다만 제품이 잘 작동 안 돼서 불편한 마음 상태인 고객을 만나다보니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것과, 가끔씩 만나게 되는 진상고객이 복병.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남자, 여자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 일뿐이지 모든 길은 열려있다고 본다. 여성이라서 차별 받는다고 느낀 적은 없다”고 말한다.

 

경선씨에겐 꿈이 많다. 하나는 쉰 살이 되기 전에 삼성전자 최초의 중수리 기사(용접을 포함해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직종)가 되는 것, 또 하나는 전국의 5천명 정도 되는 내외근 전자서비스 비정규직 기사들의 노조 가입률을 올리는 것. 오경선씨는 몸짓패 ‘공구가방’ 활동을 하면서 그 꿈을 이뤄가려 하고 있다. 더 나이가 든 후에는 여행 블로거가 되어서 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조용하고 좋은 장소를 소개하는 게 소망이란다.

 

④대형버스 기사 최은희: 할머니 운전사 되는 게 꿈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버스를 몬다고 하면 대부분 코끼리 열차를 생각하는데, 저는 45인승 버스를 몰아요. 평소에는 일반 시내버스랑 똑같은데 낮에 혹시라도 동물이 탈출하면 버스에 사람들을 다 태워서 내려와야 하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관람객들이 버스로 숨기도 해요. 이게 내 개인사업장은 아니지만 내가 이 버스의 선장이 돼서 선원들 챙긴다고 생각해요. 관람객들을 안전하게 모신 후에 듣게 되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가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45인승 대형버스를 모는 운전사 최은희씨.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버스 기사로 9년째 일하고 있는 최은희씨는 원래 경찰이 꿈이었다. 경찰 정복이 멋있어 보여서, ‘정복 입은 남자를 만나겠다’가 아니라 ‘내가 정복을 입겠다’고 결심한 그녀. 경찰시험 준비 차 대형면허를 따 놓았던 은희씨는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버스 기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을 뻔했지만 은희씨는 “써 보고 판단해라, 기회를 달라”고 회사를 설득했다. 사측에서는 은희씨가 얼마 못 버티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은희씨는 오히려 이 일을 자신에게 맞게 특화시켰다고 한다.

 

“동물에 대한 공부를 해서 버스 운행을 하면서 동물 설명을 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동물이 애를 낳았다 이런 소식을 전해주면 관람객들이 좋아해요. 처음에는 동료들이 ‘얘는 어디서 굴러 들어와서 일을 만들고 시끄럽게 구나’ 했는데 지금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가 동물 설명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 일이 오히려 여성분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은희씨는 “장애인이나 다문화가정 분들이 와서 제가 하는 안내에 만족하시고 차에서 안 내리고 한 바퀴 더 돌겠다고 하실 때” 이게 천직인가 싶다고 한다.

 

하지만 최은희씨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윗선에서 무료버스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 동물원 측은 현재 운행되고 있는 45인승 버스 4대를 없애고 작은 카트차를 도입해서 주차장에서 관람객이 원하는 곳까지 태워다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이 일을 너무 사랑하는데도 이 일을 지키기 힘들다”는 은희씨는 “가족하고 동물원에 온 어린이가 또 가족을 만들어서 서울대공원 왔을 때,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 버스 운전하고 있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⑤前 조선소 용접공 김진숙: 성별 떠나 노동강도 줄여야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당시 “모집공고에 남녀구분이 없었고, 직업훈련소에 가서 철근공에 지원했더니 안 받아줘서 세 번이나 찾아갔고, 세 번째 간 날 관리자가 제가 남자인 줄 알고 받아준 것 같다”고 말해서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 7월 11일 저녁 7시 신촌 인디톡에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주최로 <젠더를 뭉갠 언니들 -여성의 일이 궁금하다> 집담회가 열렸다. 가운데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일다

 

“스물한 살 때 용접공이 됐는데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휴일이 단 하루도 없었고 노동시간도 너무 길었는데 잔업, 특근하는 재미에, 또 안 가면 찍히니까 계속 일했죠. 철판에 깔려서 두 다리 다 부러진 적도 있는데, 조선소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이 다치니까 손가락 잘린 것 갖고는 어디 다쳤냐고 묻지도 않아요.”

 

진숙씨는 옆자리 동료가 죽어나가도 눈 꿈쩍 안 하던 아저씨들이 처음에는 야속했지만, 차차 “그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40kg 물건을 일상적으로 핸드백처럼 들고 다녀야 하는 조선소의 고된 노동을 감당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했고, 진숙씨는 당시 몸무게가 많이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고된데도 왜 그 일을 택했냐고 묻자, “그 전에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그래도 그 일이 젤 나았다”고 답한다. 열여덟 살 때 가출한 진숙씨는 부산에 가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옷 공장, 신발 공장도 스무 군데 넘게 다녔고 신문배달, 우유배달, 아이스크림 장사, 쥐포 장사 등등. 그렇게 일이란 일은 다 해 보고 조선소에 가서 일했을 때, 고단하긴 했지만 어차피 여기서 나가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는 것. 진숙씨는 “나한테 노동은 나 하나 먹여 살리기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김진숙씨의 꿈은 여전히 ‘복직’이다. 마침 그 날이 해고된 지 만 31년째 되는 날이었다. 진숙씨는 “조선소 일은 남성들한테도 힘들다”면서 “다들 40대가 되면 근골격계 질환들에 시달린다”고 전했다. 그리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자도 할 수 있다. 다만 전반적인 노동 강도를 줄여서 남자도 덜 아픈 일을 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공구가방을 든, 정비사 옷을 입은, 버스 운전대를 잡은 그녀들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젠더를 뭉갠 5명의 언니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구분하고 있는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 사실상 신체나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젠더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라는 걸 잘 드러내 준다. 삶의 길목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왔기에 당당한 그녀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욕심 많은 그녀들은 오늘도 자신의 꿈을 향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게다.   (나랑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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