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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허락하지 않은 페미니즘’에 대한 탄압
여성주의 소모임 <난파>는 어떻게 난파되었나②
※ 이 기사는 지난 5월 <난파>와 고려대 여학생위원회가 주최한 ‘난파 대토론회’에서 필자가 발제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김신효정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현재진행형인 <난파> 마녀사냥을 보며
▶ 5월 11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가 주최한 <난파 대토론회>
작년 11월 고려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 9명은 ‘난교파티’와 ‘어지러운 물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 <난파>라는 여성주의 소모임을 결성했다. 그녀들은 일대일 이성애 중심주의와 여성의 섹슈얼리티 발현 억압에 저항하는 의미로 소모임 이름을 결정하였다. 사실 난교파티라는 말은 청자나 화자 모두 어떤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데, 모임 구성원들은 그러한 불편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난파>로 이름을 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파>는 삼일 만에 난파되었다. 페이스북에 학교와 학과의 이름을 병기한 소모임 페이지를 만든 지 삼일 만에 학과 내에서 소모임명 수정을 요구받았고, 결성 일주일 만에 소모임원 징계를 논하는 학생 총회가 소집되었다. 결국 지난 3월 학과장은 <난파> 소모임원들의 졸업 필수 교과목 수강 신청을 불허한다고 통보하였다.
<난파>는 산산이 부서졌다. 소모임 이름에서 시작된 이 마녀사냥에 대해서 그녀들은 학과 임시 학생총회와 자보, 연명을 통해 여성주의 소모임의 의미를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과연 난파의 부서짐은 정말 이름 때문이었을까?
사실 나 또한 ‘난교파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쾌락의 주체로서 여성, 다중적인 주체로서 여성을 위치시키려는 의미의 가능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난교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정박된 성적, 윤리적 때로는 폭력적인 의미들에서-대개 난교는 여성이 피해 상황에 놓인 경우가 많다- 충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2016년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난파 마녀사냥’은 난파가 아닌 어떠한 이름을-SM파티, 성도착파티, 쓰리/포썸파티 등- 붙였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단순히 소모임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내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여성혐오의 문제이다. 왜 페미니즘의 풍자와 유쾌함은 항상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가? 페미니스트 마녀사냥을 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대학 내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난파>는 학과 내에서 ‘대학입학 커트라인’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소모임을 결성하였으므로 징계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이 났다. 그녀들은 졸업 필수과목 수강 불허라는 수업권을 박탈당하는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과 공동체로부터 받는 질시와 모멸, 따돌림은 그녀들이 견뎌야할 더 큰 처벌이었다. <난파>라는 이름의 여성주의 소모임을 단 ‘삼일 간’ 결성한 것이 과연 학과의 명예와 입학 커트라인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세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학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난파 소모임원들을 징계하고 처벌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유구했던 마녀사냥의 역사가 떠오른다. 왜 <난파> 소모임 일원들은 학과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는가? 그녀들은 학내 규정이나 교칙을 어긴 것도 아닌데, 왜 학내에서 단두대에 세워지는가?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보려면, 현재 대학 사회가 무엇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학교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로서 구성원들의 상품가치를 높여주는 소비재처럼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기존의 질서와 공기를 거스르는 여성주의 소모임은 불편하다. 그녀들의 존재로 인해 다른 학과 구성원들은 자신의 가치를 훼손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엄숙주의가 좀 더 강한 사범대 자체의 특수성도 있을 것이다. 소수의 학과 정원과 공동체 문화가 중요한 분위기에서, 개인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문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언제 학과에서, 대학 사회에서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공동체의 문제가 왜 개인을 제재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가? 여성주의 소모임은 과연 누구의 명예를 더럽혔는가? 공동체는 누구이고, 누가 그 구성원으로 승인받는가? 삼일천하로 끝난 그녀들의 난교파티는 과연 어떠한 질서를 흩트렸는가? 왜 그녀들은 공동체의 이질적인 존재로 낙인찍혔는가?
캠퍼스 페미니즘 탄압의 유구한 역사
최근 각 대학에서 다양한 여성주의 소모임이 결성되는 한편, 그들이 붙인 대자보가 계속해서 뜯겨나가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모임 구성원의 신상이 털리는 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탄압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가부장제 창조의 역사가 뿌리 깊듯이, 우리 사회 곳곳 특히 지성 공동체라 불리는 대학 사회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유구하다.
나의 경우에는 2000년대 초반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 운동을 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소거당하고 뜯겨나가는지를 지켜보고 또 경험했다. 당시 내가 참여했던 부산대학교 여성주의 잡지 <허스토리>(Herstory) 선배들은 이른바 ‘월장 사건’이라 불리는 온라인 페미사이드의 생존자들이었다.
▶ 2001년 4월 25일,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 홈페이지
그녀들은 담을 넘는 여성을 이미지화한 ‘월장’ 홈페이지를 만들고, 첫 기획기사로 대학 내 군대 문화와 예비역 문화에 대한 비판 글을 작성했다. 그녀들은 유쾌하게 예비역과 연관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짧은 글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글로 인해 대한민국 전역의 예비역들은 봉기하였다. 당시 부산대학교 자유게시판은 월장에 대한 욕설로 도배되었고, 결국 학교 서버가 다운되었다. 필진의 신상과 전화번호가 각종 포르노사이트에 공유됐고, 성적 욕설 가득한 문자와 성매매 제안 전화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경찰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재미나게 썼을 뿐인데, 왜 이 짧은 글 하나가 전국의 남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감히 여성으로서 말해서는 안 되는 문화란 무엇인가? 월장 사건과 <난파> 사건은 다르지만 또 유사하다. 십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대학 사회에서 성적인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페미니즘을 발화한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낙인찍히고 공격 받는다.
페미니즘은 어떤 전략으로 대학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난파> 사건이 알려지고 <난파>를 지지하는 천여명에 가까운 개인과 단체로부터 온라인 연대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온라인상으로 모아지는 힘은 움직이는 속도와 파급력이 빠르지만 실제로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오프라인상의 물리적 방식-그것이 대자보이든, 거리 시위이든 ‘눈에 보이는 힘과 장’이 필요하다. 힘을 모아내고 장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각 대학의 여성주의 소모임 네트워크와 같은 연대를 통해 ‘학내 여성주의 탄압’ 문제를 정치화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은 고소와 고발이라는 법제도에 속박당한 당사자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문제이다.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는 목소리를 가진 여성들은 목소리만을 제거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커뮤니티로부터 소외받고 고립되는 심리적 억압을 비롯하여 법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녹록치 않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목소리를 낸 여성 개인의 문제이자 책임이 되어야 할까?
성적 주체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말하고 설치고 쓴다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제 질서와 문화를 뒤흔드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을까, 분위기를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자기검열과 낙인 사이에서 불편함과 낯설음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한편,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없다. 남성의 말과 전쟁을 벌이려고 남성의 말에 맞춤으로서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자가당착의 문제에 빠지기도 한다.(<또 하나의 문화> 1992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계속해서 말하고 설치고 쓴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의 힘이자, 대학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한 중요한 정치적 변혁(transformation)의 과정이다.
페미니즘 정치를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선 좀 더 치밀한 전략이 요구되는 때다. 함께 만들어가는 모멘텀으로서 페미니즘 정치의 장을 만들어내고 함께 힘을 보태면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여성주의 네트워크와 연대를 결성하고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N개의 페미니즘이라는 차이와, 자원과 시간의 부족 속에서 누구와 어떻게 연대하여 함께 싸울 것인가는 어려운 과제이다. 결국 최소의 전략은 같이 싸울 사람들을 만드는 것과, 싸움과 저항 속에서도 상처받은 개인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함께 다루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어떤 전략으로 대학 내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페미니스트들에겐 전략이 필요하다. 유쾌함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질서를 거스르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대자보가 뜯겨온 유구한 가부장제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을 어떻게 공적인 장으로 가져올 것인가. 나 개인에 대한 처벌과 공격이 아니라 대학 사회 내에서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 혐오,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세대를 아우르는 관심과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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