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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 관한 출처 모를 ‘썰’과 우상숭배의 결과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릴레이 서평⑤ 김자아


 

그럼, 입으로라도 해줘

 

나는 첫 경험의 기억보다 첫 경험 ‘시도’의 패배감을 더 또렷이 기억한다. 언젠가 할 것이라면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랑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던 20대 초반, 알코올의 힘을 빌려 빠르게 진도를 나가고 목표에 진입했다. 그런데 문득 내 위에 올라타 브레이크가 고장 난 머슬카처럼 혼자 날뛰고 씩씩대는 그의 모습에 불쾌감이 들어 술이 확 깼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만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불을 붙였으니 책임이 있다는 생각, ‘원래 성인 여성의 섹스란 이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내가 멈춰 세우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두운 밤 밀폐된 공간에서 어떤 분위기가 전개될지 고민했던 그 감정의 실체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기똥찬 핑계는 고작 “미안한데, 나 생리중이야.”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이 상황을 진압할 수 있다고 믿은 보루는 월경이었다. 다행히 그는 멈추더니 말했다. “그럼 입으로라도 해줄래?” 그 순간 그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란, 아마 그의 곧추선 상징을 그 어떤 방식으로건 품어줘야 하는 펑퍼짐한 개복치쯤이었을 라나?

 

오직 ‘준비되고 학습된’ 소수만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남자의 뇌리를 흔들어놓을 명대사를 쏟아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그런 류의 어법을 접한 적이 없었다. 평소의 활달한 성격대로라면 나는 ‘즐기는 여자’여야 하는데, 로맨틱하게 달아 오른 분위기도 아니었고 나의 성기와도 친근하지 않은 마당에 그의 성기를 욕망할 그 어떤 ‘야한’ 동기도 생기지 않았다. ‘이것이 성인 여성이 익숙해져야 할 보통의 섹스겠거니’ 합리화하는 방법 말곤 없었다. 아무 배려 없이 거칠게 달려든 그의 탓할 겨를도 없이, 산통을 깨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정체 모를 두려움에 굴복하며.

 

그런데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속 26세 소냐의 이야기를 듣자니, 내가 스무 살 때 막연히 두려움이라고 표현한 감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저 두려움으로 퉁칠 것이 아니란다. 이는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역할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소냐가 스스로 ‘사양 기법’이라 이름 붙인 새로운 성행위 실험이 있는데, 신체 접촉은 더 오래 많이 하지만 삽입 섹스는 지양함으로써 ‘비참하고 굴욕스런 느낌이 드는 단계로 넘어가지 않게 선을 단속하는’ 방식이란다. 무릎을 탁 쳤다. 그 때 나를 올라타 마구 내리 눌러댄 그에게 내가 아직 ‘어린 여성’같아 마냥 미안했던 나의 찌질한 변덕이 합당한 이유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 알리스 슈바르처의 저서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전 유럽을 뒤흔든 여자들의 섹스 이야기)

 

남자들이 잃을까 봐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

 

독일의 페미니스트 저널 [엠마]의 편집장 알리스 슈바르처가 1975년에 펴낸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는 이렇게 십수 년 전의 어린 나에게 말을 건다.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위로 대신 ‘원래 그런 것이란 없어’ 라고 알려준다. 나처럼 ‘원래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스무 명 남짓한 여성들의 연애, 결혼, 사랑, 육아, 일, 섹스 이야기를 생생한 근거 삼아서.

 

각기 다른 나이, 직업, 사회적 지위와 가정사를 지닌 1970년대 독일 여성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몸과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 삶의 방식에 순응할 것을 강요당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닦고 잠자리에 들면 바로 시작하는 남편의 일방적인 성교에도 질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자신을 책망했다. 리타는 가사를 도맡으면서 진보 지식인 남편의 비서 역할까지 하면서도 일에 대한 합당한 보수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레나테는 집안 살림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믿으며 아이는 아무래도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말에 수긍했다.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 생각하지만 혼자가 되는 게 두려운 유부녀 도로테아는 이혼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레즈비언 안네 또한 “아마도 내가 남자들한테 흥미를 못 느끼는 건, 아직 진짜로 좋은 남자를 못 만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을 돌렸어요.” 하며 몇 번씩 ‘정상적 궤도’에 들기 위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다. 도대체 왜 그래야 했을까?

 

책 속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편에 종속된 가정주부로 살면서 자기만의 공간, 시간, 수입, 직업, 자의식이 결여된 채 살다가, 대개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지각한다. 차로 한 시간 떨어진 거리 큰 도시의 여성센터에서 이혼을 주제로 한 모임에 참석하거나, ‘스스로 돕기 모임’을 꾸려 각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성행위에 대한 합리적 개념들을 정리하거나, 하다못해 학부모 모임에 나가서 다른 당당한 엄마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그림을 그리며 난생처음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도전을 내딛는다.

 

남자들은 아내가 자기보다 더 똑똑하거나, 덜 의존적이 되어가는 것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구박하고 훼방한다. 아이가 자랄 때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거나, 너 같이 뚱뚱하고 볼품 없는 건 아무도 안 데려갈 것이라면서. 이렇게 유치한 협박을 곁들이면서까지 남자들이 그토록 잃을까 봐 무서워한 것은 무엇일까?

 

‘꼬추’와 ‘꼬꼬’의 차이: 원래 그러니까 원래 그래

 

“어떤 설명이나 해석도 불가능한 영역이 있으니, 그건 곧 성의 영역이다. 이 면에서도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르게 행동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없이 그냥 ‘원래 그런 것’으로 당연하게만 여겨왔다. 하지만 성 역할을 구분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회화 과정은 사실 여기서 일어난다. 이는 어떤 것보다 강력한 사회적 요구로서, 여성은 복종하는 훈련을 통해 피동적 존재가 되고 남성은 군림하는 훈련을 통해 능동적 존재가 된다. 성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에 대해 여태껏 학문적으로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던 까닭은, 그만큼 이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으로만 여겨왔기 때문이다.” (p.307)

 

“여자와 남자를 구분 짓는 것은 생물학적 요소보다는 문화적 요소가 훨씬 더 크다. 아주 작은 차이에서 기인하는 남녀차별은 대물림을 하는 사회제도로 변질이 되어 남존여비의 형식으로 강요된다. 그래서 오늘날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는 특성은 더 이상 자궁과 자지가 아니라 권력과 무력이 되는 것이다.” (p.285)

 

“여자와 남자는 워낙에 다르게 생겨 먹었고, 그래서 두 개의 절반은 서로의 짝이 되어야 한다는 고착된 신념이 우리를 이렇게 쪼그라들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도저히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생겨버렸다.” (p.285)

 

그렇다. ‘꼬추’와 ‘꼬꼬’다. 생식기의 모양이 다를 뿐인데 우리는 은연중에 자지는 우월하고 보지는 열등하다는 신념 아래 자라났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성기를 갖지 못한 자신의 성기에 열등감을 느끼다 결국 남자와 같아지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아버지 옆에 있는 엄마를 질투하게 된다는 콤플렉스와 열등한 신드롬을 암기하며 자랐다. 3~5세에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어쩔 수 없다는 이 엄청난 대전제는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한 채, 이 시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여성들에게서 보여지는 노이로제와 히스테리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로 논점을 교묘히 옮겨왔다.

 

한편, 그렇게 우러러보며 오냐오냐 자란 고추는 성인이 된 후에 자연스럽게 여자들을 안달 나게 쥐락펴락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삽입 강박이 안기는 행복한 질 오르가즘의 신화도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알리스 슈바르처의 저서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거시기에 그만 집착할 때도 됐다

 

성 규범의 확립, 성 역할의 구분은 성차별의 근원과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자는 시각적이고 충동적인 ‘동물’이라 여자를 보고 마음이 동하면 뇌에 고속도로가 뚫린 것처럼 주체할 수가 없기에 이를 미리 알고 몸가짐을 잘 간수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라는 둥. 여성의 불감증은 ‘비정상적’으로 좁은 질을 타고난 개인의 탓이라는 출처 모를 ‘썰’은 여성에겐 자책감을 안기고, 남성에겐 책임감을 모면할 면피를 준다. 세상에 단 두 개의 생식기만 있다는 빈곤한 ‘상식’만 폐기한다면, 죄 없는 살덩이들의 한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책 제목에서 말하는 ‘아주 작은 차이’란 결국 평소에 10센치도 안 되는 살덩이가 달렸느냐 안 달렸느냐 하는 차이를 말한다. 이에 따라 자지를 우상화하는 각종 신화가 만들어졌고, 자지가 없는 불완전한 여성이 남성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허상이 만들어내는 ‘그 엄청난 결과’는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바로 그 일상이다. 물론 그 살덩이를 유독 좋아하고 원하는 여성도 있을 수 있다. 이 여성의 취향이 존중받는 만큼, 자지의 유무와 별개로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따르고자 하는 남성과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는 의미에서 한낱 살덩이에 그만 집착할 때도 됐다.

 

“이제부터 서로의 성기를 주고받는 짓은 성행위의 다양한 양식 중 한가지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건 임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므로 여자들 입장에서는 거절해야 할 사항이에요. 하지만 여자들은 이런 운동에 대해 불안을 느낄 거예요. 내가 다리를 안 벌려주면 저 남자는 다른 여자를 찾아가서 기어이 제 거시기를 박을 것이다. 그런 식의 관계라면 결연하게 단념을 하고, 진정한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도록 아마도 우리 사회가 다 함께 노력을 해야 할 거예요.” (p.271)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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