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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가해자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머리 짧은 여자, 조재] 딸 같아서 그랬다고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거라고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지만…. 그런데 당신이 저에게 탄원서를 써달라고 부탁하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평소에 느낀 대로만 써주면 된다니…. 제가 평소에 느낀 대로 탄원서를 쓴다면 아마 당신의 형량이 훨씬 더 늘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동 성추행으로 형사 고발을 당하셨다고요. 아이 부모님과는 ‘그런 게 아니다’ 잘 이야기가 됐지만, 형사재판으로 넘어간 일이라 탄원서가 필요하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쓴 입장문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격려차’, ‘아이가 통통해서’ 이런 걸 적은 입장문이 법정에 그대로 올라가겠지요.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면 또 그게 형량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당신이 아이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당신이 아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신체를 만진 것은 사실이고, 당사자가 불쾌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면 그게 성추행입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도 꽤 많은데, 또 당신이 다른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했는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변호하는 탄원서를 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제가 탄원서를 못 쓸것 같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걸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저는 제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 짧은 순간에도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요.
▶ 딸 같아서 그랬다고요... ⓒ머리 짧은 여자, 조재
벌써 5년도 더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운동을 갓 3달 배운 풋내기였습니다. 저보다 늦게 들어온 제 친구가 몸에 힘을 주지 않아 물구나무 서기를 제대로 못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시범을 보일 것을 요구했고 저는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제 발목을 잡아주셔서 덕분에 잘 버티고 있을 수 있었지요. 그때 ‘이렇게 엉덩이에 힘을 줘야 한다’고 말하며 당신이 제 엉덩이를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한 번 만져보라고. 이렇게 단단해야 한다고. 그때 저는 너무 수치스러워 친구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죠. 그리고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겁니다.
당신이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냐고. 정말 미안하다고. 왜 그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거듭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끝냈어야 합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자기 아들이랑 동갑이라 성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딸 같아서 그랬다… 너무 전형적이지 않습니까? 듣는 내내 어이가 없어서 눈물만 나왔습니다. 당신은 정말 내가 딸 같아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딸에게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도 같은 건 제게 중요치 않습니다. 그건 변명일 뿐입니다.
당신은 본인이 운동만 너무 오래해서,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옛날에도 지금처럼 행동했었다면 분명 ‘당한 사람들’은 불쾌감과 수치감을 느꼈을 겁니다. 바뀐 건, 그들이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거나 예민한 게 아니라고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꽤나 억울하겠지만, 그간 거쳐 간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중 당신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지.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저처럼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을.
제가 화나는 건 탄원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 또 한편, 당신이 안쓰럽게 느껴진 다는 겁니다. 저는 그게 정말 화가 나고 짜증납니다. 정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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