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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꿈꾼다

[머리 짧은 여자] 지하철 24시간 운행 소식을 접하며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몸인가?’

 

정규 교육과정만 착실히 밟아왔어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내 이력이 문제였다. 면접관은 나에게만 단순반복 업무가 가능할지 두 번이나 물었다. 이력서상의 내 모습은 너무나 활동적이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지루함을 잘 견딜 수 있는지 어필해야하는 이상한 광경이 연출됐다.

 

“쉬는 날 집에 박혀 있는 걸 가장 좋아하고, 리드하기보다 서포터 역할이 더 편하고….”

 

주절주절 떠들어댔지만 결국 면접에서 시원하게 떨어졌다. 아쉬움은 없었다. 사실 단순반복 업무가 잘 맞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 일하는데 있어서 노동법에 위배되지 않게 조건을 다 맞춰주기 때문에 나를 비롯해 다들 그곳에 지원했을 뿐일 게다.

 

그만큼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노동자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특히 내가 사는 지역의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는 건 특이한 케이스였다. 심지어 대학 내 카페테리아에서도 주휴수당을 챙겨주는 일은 없었다. 주휴수당에 대해 말을 꺼내면 밉보이기 일쑤였고, 뒷말이 나왔다. 법이 보장하고 있는 당연한 권리인데, 그럼에도 현실은 ‘여긴 원래 다 그래’ 라는 말로 퉁 쳐졌다. 주휴수당의 ‘주’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가 이미 깔려 있었다.

 

혹시나 처우가 조금 나을까 싶어 수도권으로 일자리를 알아본 것이었다. 분명 내가 살던 지역보다는 나았지만, 꼭 그렇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직장생활 2년차 비정규직 A는 야근을 안 하는 날이 없었지만 야근수당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그나마 교통비를 챙겨준다는 것과 이쪽 일이 자기 경력을 쌓아준다는 위안으로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일했다. 주변 친구들은 ‘너 그거 착취야’ 하며 말렸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계약 연장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그래도 일단 참아야 한다고, A는 말했다.

 

▶ 누군가의 퇴근길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서울시가 지하철을 24시간 운행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기사를 보고 참혹한 심정이었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터로 나가겠지? 또 누군가는 덕분에 열심히 야근을 해야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런 부당함을 B에게 토로했다. 하지만 B는 오히려 지하철 24시간 운행에 찬성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미 회사에서는 노동자의 퇴근길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택시비 몇 푼 쥐어주는 것으로 퉁 치며 야근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고.

 

그러니까 지하철이 24시간 운행되든 안 되든 노동자는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차라리 더 안전하고 저렴하게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직접 경험해 본 입장이 아니었고, B와 그 주변 사람들은 이미 몸소 부당한 야근을 익숙하게 경험해 본 입장이었다.

 

이런 현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달라질까. 일자리를 찾아서, 살던 지역을 떠나 발딛은 이곳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니까.

 

몇 시간 후면 첫 출근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정상적인’ 곳에 운 좋게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벌써 퇴사를 꿈꾼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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