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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사범’ 사이
[머리 짧은 여자, 조재] 나는 ‘여’사범이었다
“운동 계속 열심히 해봐. 혹시 모르지. 네가 나중에 좋은 지도자가 되어있을지도.”
그가 관장으로서 열심히 운동을 하는 관원인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는 게 좋고, 도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 게 좋고, 운동하는 순간에 오롯이 내 몸의 균형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 좋았다. 계속 운동만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관장의 그 말 한마디가 가슴을 쿵- 하고 울렸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술계엔 아주 어려서부터 꾸준히 배워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나는 22살에 처음 무술을 배웠다. 꼬박 3년을 배워 이제 막 2단이 된 얼치기일 뿐이었다.
왕도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행히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다. 비슷한 시기 운동을 시작했던 동기(남자)들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와 동기들은 자주 비교 대상이 됐다. “너네는 여자보다 운동을 못 해서 어떡 하냐?” 관장님은 동기들에겐 분발할 것을, 나에겐 잘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럴 때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채 땀을 닦았다.
몇 개월 뒤. 정식 사범은 아니지만 체육관에서 틈나는 대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부사범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비슷한 또래 유단자 J가 새로 입관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 무술을 배워 2단을 따고, 거의 10년을 쉬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오래 운동을 쉬어서인지 안 되는 동작들이 많았다. 게다가 연결 동작의 순서도 10년 전과는 전혀 달라져서, 거의 흰 띠와 다름없이 처음부터 동작을 알려줘야 했다.
처음에 열심히 배우던 J는 내가 좀 편해졌는지 이내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동작은 이게 아니고 다음에는 이 동작이었다며 10년 전 자신이 배운 동작을 알려줬다. 지금은 다 바뀌었다고, 알려준 거나 열심히 하라고 면박을 줬지만, 그는 10년 전 배웠던 동작을 재현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초등부 지도시간. 평소 별 의욕 없이 체육관을 다니던 C가 대뜸 나를 보며 “여자는 쓸모가 없어” 라고 말하고는 자신과 내 키를 비교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일단 아이를 보내고 관장님께 이 말을 전했다. 다음날 아이는 관장에게 크게 혼이 났다. 그런데 관장님은 “여자가 왜 쓸모가 없냐, 너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냐”라며, 이상한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관장님은 가끔 ‘여제자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자사범, 남자사범 지도법이 따로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런 얘기에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관장님은 초·중등 관원 몇 십 명만 받아도 체육관이 유지되니 ‘여자한테는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해줬다.
▶ 나는 ‘여’사범이었다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사범생활 2년 동안 나를 휘감은 것은 끊임없는 자기 불신이었다. 실력이 아직은 부족하니까, 열심히 나를 채우다 보면 언젠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던 낙관은 어느새 약발을 다해버렸다. 내가 번번이 걸려 넘어진 돌은 내가 ‘여성임’ 그 자체였다. 내가 실력이 더 뛰어났다면 ‘여자’가 아니라 ‘사범’으로 호명될 수 있었을까? ‘남자’와 ‘사범’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 나는 ‘여자’와 ‘사범’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나.
사범생활을 그만둔 지 햇수로 3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실력을 더 쌓았더라도 나는 ‘여’사범일 뿐이었을 거라는 걸.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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