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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과 나이와 성과 언어의 경계를 뚫다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③


※ <노년은 아름다워>(새로운 미의 탄생)의 저자 김영옥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기사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공동묘지 석판 위, 킬힐을 신은 ‘슈퍼모델’

 

야나기 미와(Miwa Yanagi)의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여성노년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형의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ERIKO


시선을 잡아채는 이들 이미지는 유쾌하기 짝이 없는 욕망을 패션으로 드러내며 자신만만함을 자랑한다. ERIKO를 보라.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자줏빛 웃옷과 판탈롱 바지, 결코 시야에서 놓칠 수 없는 킬힐 구두까지 신고서,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위풍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할머니’ 이미지에서는 대중문화의 흔적이 명백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위풍당당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지금 포즈를 취하고 있는 런웨이가 바로 공동묘지 한가운데 놓인 묘지 석판이기 때문이다. ERIKO라는 이 ‘슈퍼모델’은 어리거나 젊은 모델을 여성미의 아이콘으로 추앙하고 찬양하는 대중상품문화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리고 늙은 노년의 몸 존재 자체를 계속해서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내모는 외모주의와 연령주의에도 도전하고 있다.

 

노년과 곧 다가올 죽음을 이토록 자신 있고 유머러스하게 과시하는 이미지는 흔치 않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령주의가 심해진다면, 노년의 몸을 비가시화하는 현상은 더욱 더 보편화될 것이 분명하다.

 

죽음을 배경으로 한 것이 명백한 이 사진에 곁들인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의 생은 두 명의 배우가 만든 드라마였다. ERIKO는 내 생의 후반부를 이끈 위대한 여배우다.” 이어지는 문장에 따르면 “ERIKO는 성, 나이, 국적, 이 모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슈퍼모델이다. 파리, 밀라노, 뉴욕, 도쿄가 그녀에게 경배를 바쳤다.”

 

나이와 성, 국적이라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슈퍼모델 ERIKO는 트랜스젠더로 보인다. 실제로 ERIKO로 분장한 모델은 ‘에릭’이라는 이름의 젊은 미국 남성이다. 그가 신은 킬힐은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관한 그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고질적인 규범도 다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높고 뾰족하다.

 

그걸 보면서 나는, 일본이든 한국이든 극심한 부계혈통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할머니가 젠더와 국적을 계속 고수해야 할 필요는 정말이지 전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찌하여 성, 나이, 국적 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취향을 갖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또한 ERIKO가 ‘내 생의 후반부를 이끄는’ 또 다른 나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한 자체가 희귀하게 여겨진다. 이 또 다른 나가 단절이 아닌 변환으로 가능할 수 있기를 ERIKO와 함께 희망한다.

 

‘지금 여기’의 삶으로 도도하게 뛰어들다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YUKA 


다음은 YUKA 차례다. 그녀는 모터사이클의 사이드카에 앉아 젊디젊은 연인과 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골이 깊게 파인 자줏빛 블라우스 차림에 붉게 물들인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은 바람에 빨려들 듯 휘날리고, 그녀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다. 하얗게 이빨을 내보이며(아마도 비싼 틀니일 듯하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울려 퍼지는 듯하다.

 

사진에 동반된 텍스트는, 그녀와 함께 크게 웃으며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는 남자를 ‘젊고 부자인 플레이보이 애인’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그녀가 자식들과 손자들을 몇 년째 못 보고 있다고, 젊은 부자 애인과 자유롭게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느라 일본 생각도 안 한 지 오래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YUKA의 이 연애 스토리에는 특별한 전사가 있다. 처음 몇 년간, 그녀는 노후에 관한 통상적인 이미지대로 어느 유명한 온천도시에 정착해서 매우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다시 “지금 여기”의 삶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손주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초국적 이주’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고 보면 온천도시에서 유지한 몇 년간의 조용한 삶은 단지 “지금 여기”의 삶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필요했던 통과의례가 아닌가 싶다. 그래, 일단 ‘그대들이 예측하는 대로’ 살아주겠소, 그러나 그 다음엔 내 마음대로 할 테니 그런 줄 아시오. 뭐 이런 느낌을 자아내는 것만 같아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할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했던 삶을 뒤로하고 온천도시에서 휴양하듯 조용히 살아가는 일상을 바람직한 노후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생활이야말로 드디어 가능해진 ‘지금 여기’의 삶일 수도 있다. 아니,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만 있다면’을 전제로, 그런 노후를 바라고 꿈꾸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은퇴 후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가 아닌, 은퇴 후 혹은 늙은 나이에 ‘지금 여기의 삶’이라는 표상을 품는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흔히 노년은 좋았던 젊은 시절을 가능한 계속 연장하거나 아니면 일종의 가사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가능한, 냉정하게 말해 ‘이미 지나간 시기를 벌써 와버린 시점에서’ 불편하고 애처롭게 살아가는 모습으로만 인식되기에 ‘지금 여기의 삶’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다시 YUKA의 상상적 이미지를 보면, ‘이제는 모든 번잡함에서 해방되어 평온하고 조용한 휴식의 시간을 즐기련다’는 노년들의 소망은 어쩌면 아직 노년을 알지 못하는, 알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세대가 노년에게 ‘기꺼이 안겨드리는’ 소망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든다. 그게 아니면, 노년이 사회정치적 ‘문제’로 혹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주인공으로 공공의 무대에 등장하는 일은 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국가나 시민사회가 노년에게 ‘막무가내로 기대하는’ 소망이거나.

 

실제로 현재 대부분의 노년들은 자기 것이 아닌 그 소망들과 강제로 화해한 채 품위 있게, 소리도 내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도록 조심하고 삼가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계층이나 신분에 따라 그들에게 부과되는 소망의 형태나 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노년 자체가 이미 낮은 계급일 수밖에 없기에, 개개인의 차이가 전반적인 구조를 뒤흔들 만큼 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강요된 화해로서의 ‘노년의 소망’에 다소곳이 한번 고개를 숙인 뒤, 도도하게 머리를 쳐들고 ‘지금 여기’의 삶으로 뛰어든 YUKA의 모습이 그 자체로 멋진 풍자이고 전복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가 연애를 해서가 아니라, 애인이 젊고 돈 많은 플레이보이여서가 아니라, 노년에게 허용되지 않은 ‘지금 여기’를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녀는 ERIKO와 함께 통상적인 ‘할머니’의 이미지를 깨고, 할머니라고 불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지금 여기’를 주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제‘멋’대로 할머니들의 섹시한 파티!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REGINE와 YOKO 


REGINE와 YOKO가 보여주는 할머니의 제‘멋’도, 위의 이미지들처럼 역시나 초국적이며 젠더 체제를 거스른다. 혼자 조용히 살려고 집을 구한 REGINE는, 늘 어린아이 같이 활기에 넘쳐 돌아다니고 밤새 음식을 만들어 사람 초대하기를 즐기는 YOKO와 그 집에서 몇 십 년째 같이 살고 있다. 일본이 아닌 독일에서 이렇게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두 사람이 친밀한 파트너 관계임을 강조한다.

 

REGINE의 다정한 시선을 받으며 밤새 YOKO가 준비한 음식들과, 그것들 각각이 저마다의 색과 향과 모양을 뽐내며 놓인 파티 테이블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파티에 초대받은 친구들 중에는 분명 ERIKO와 YUKA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국가와 나이와 성과 언어의 경계에 구멍을 숭숭 내는 ‘할머니들’의 왁자지껄 섹시한 파티가 마침내 시작되리라.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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