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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시 문화연구기획 <후조시, 상냥하게 가르쳐 줘> 

1화. 후조시(腐女子)를 모르다니요!  (비이커)


※ 필자 소개: 요오드, 철가루, 비이커로 이루어진 퀴어문예창작집단 ‘물체주머니’는 2014년 <영혼을 위한 백합수우프>, 2차백합 동인지 <돌아오세요 305호에>를 발행하였고, 문예지 <소설퀴어>를 준비 중이다. (*후조시: Boys’ Love를 향유하는 사람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잘려나간 욕망의 기억들

 

죽기 전에 해치워야 할 일들의 목록에 ‘연애편지 소각’을 올려둔 적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동성친구 A에게 썼던 수십 통의 연애편지가 지금 어디의 서랍에서 부식중일까 간혹 궁금했다. 이미 태워졌을까? A의 가족들에게 발각되었을까? 사랑한다고 또박또박 선언하며 나는 A를 기쁘게 할 생각뿐이었는데, 무슨 계기로 과거의 고백들은 흑역사의 일종이 되었을까?

 

고백을 하는 건 하나도 혼란스럽지 않았다. 레즈비언이니 바이섹슈얼이니 하는 정체성을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여중과 여고에는 서로를 만지고 서로에게 집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칼머리를 한 채 팬들을 몰고 다니는 ‘이반’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이야기에 탐닉하는 ‘야오녀’와, 동급생이 공책에 휘갈겨 쓴 ‘신화 오빠들’의 연애이야기와, 원작보다도 더 근사하게 일본 애니메이션 남자 캐릭터를 코스프레하는 선배가 새벽부터 자정까지 태연히도 곁에 있었다.

 

▶ 이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웃-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2007) ‘신화’ 멤버처럼 머리를 자른 이반들은 인기인이기도 했지만, 동성애를 유포시키는 단속의 대상이기도 했다. 


A와 나는 교정의 사각에서 끌어안았다. 뺨을 맞댔다. 손을 잡았다. 실내화를 바꿔 신었다. 손발에 경련이 올 때까지 상대를 원망하며 울었고, 일요일엔 함께 공부를 했다.

 

졸업 후 A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야, 우리 후배 B와 C가 사귄단다. 걔네 진짜 레즈인 거 같다.” A의 목소리에 가벼운 경악이 묻어났다.

 

신기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이었냐고 나는 반문했다. A는 우리와 걔네가 다르다고 대답했다. 나는 뜸을 들이다 A에게 현재의 연애를 털어놓았다. “여자라고?” A는 외쳤고, 다음에 전화했을 때 우리의 연애를 새카맣게 잊은 듯 대화를 걸었다. 나와의 연애를 회칼로 도려낸 듯 굴었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서사라는 건… 굉장하구나! 이성애 자기서사를 짜기 위해 어떤 기억은 억압되다 못해 망각되는구나! 참 신기하다!

 

성별에 무관하게,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속에서 똑같은 순간에 분노하고 똑같은 것에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나에겐 사랑의 필요조건이었다. 이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성애 서사를 허겁지겁 영화와 소설에서 찾던 나는 미소년들끼리의 동성애를 다루는 Boys’ Love(이하 BL) 장르로 이내 빨려 들어가게 된다. 2000년대 후반 BL 만화책들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와 단순한 스토리가 읽어도 읽어도 지겹질 않았다.

 

스스로가 이성애자임을 의심한 적 없던 만화 주인공들은 낭만적 사랑을 거쳐 ‘게이가 별 거냐’라는 식으로 동성애를 선택한다. 일반을 짝사랑하던 이반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또한, 작품들의 대단원은 재생산으로부터 무관한 사랑의 표현, 소통의 방식, 순수한 쾌락으로서의 섹스로 장식되었다.

 

BL은 따뜻한 포르노였고, 성소수자 혐오 세계의 진통제였다. 과거의 연애편지는 돌이켜보니 책임 못 질 선언과 감정의 과잉 범벅이었지만, BL속 인물들은 축축한 감정들을 나보다 몇 배로 뻔뻔히 표출했다. 다독, 정독을 하며 부끄러움은 점차 휘발됐다. 다시 편지를 쓸 기력이 생겼다.

 

지난날의 여자친구가 이성애 자기서사를 구성하는 동안, 나는 바비인형의 옷을 벗겨 목욕시키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구와의 연애를 실수나 장난으로 이름 붙여왔는지 회상하면서, 남성 간 성애를 다루는 텍스트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때 BL을 좋아하는 사람은 ‘야오녀’, ‘동인녀’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흘러 나는 후조시(腐女子) 즉 ‘썩은 여성’의 일원이 되어있었다.

 

# 썩었다고 자조할 일인가요?

 

어째서 ‘남성 간 성애적 텍스트’에 열광했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여성에게 섹슈얼하고 퀴어적인 상상과 발화를 허락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라 대답하겠다. 만화와 소설의 아름다운 남성 캐릭터들은 ‘남성’이라기보다 현실에는 없을 이상형 내지 이상향에 가까웠다. 후조시는 대상을 원하는 동시에 대상이기를 원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자유로이 투사했다.

 

발기한 페니스는 이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고작 유희의 도구였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타인의 쾌락에 사려 깊게 복무하는 이상적 남성성이었고, 또 누군가에게 그것은 타인의 허리를 비틀리게 하는 거대한 ‘클리토리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성기였다. 

▶ 나카무라 아스미코 <동급생>(2009, 조은세상) 일명 ‘소프트 BL’의 대명사인 작품이며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당신이 후조시의 촉이 있다면 누가 공이고 누가 수인지 한 눈에 파악할 것이다.

 

나는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상상적으로 삽입하거나 흡입하면서, 스스로의 쾌락을 구체화하고 어떤 관계를 로맨스로 해석할 것인지 연마했다. 대부분의 이성애 로맨스들은 이제 재미가 없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불균등한 젠더 권력이 지루했고, 그것을 낭만으로 탈바꿈하려는 서사가 괘씸했다. 성소수자임을 자각하고 나서는, 이성애 텍스트가 이토록 많으니 나는 퀴어 텍스트를 꾸준히 소비하고 생산하여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데 일조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거나 말거나 나는 후조시(腐女子) 즉 ‘썩은 여성’이다. 후조시(부녀자. 腐女子)는 같은 발음인 부녀자(婦女子)의 부(婦)를 썩었다는 의미의 부(腐)로 바꾼 단어로, 타칭이 아닌 자칭으로 알려져 있다. (김효진, "후조시는 말할 수 있는가?: ‘여자’ 오타쿠의 발견" 일본연구 제45호, 2010) 구글에서 ‘여동생’을 검색하면 속옷만 걸친 어린여성의 사진이 줄줄이 뜨는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의 땅에서, 후조시는 과연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에 ‘썩었다’는 비칭(卑稱, 언어나 사물을 낮추는 말)을 자조적으로 전유했을까.

 

# 공X수 커플링을 기본으로 하는 후조시의 공식


후조시는 모든 종류의 남성동성애 서사를 향유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남성동성애 서사로 직조할 수 있다. 즉 후조시의 핵심은 공攻[세메攻め, 탑top]과 수受[우케受け, 바텀bottom]라는 ‘AXB’ 공식이다. 후조시는 김무성X문재인부터 무궁화호X새마을호까지 무엇이든 짝을 만들어, 일명 ‘연성’을 한다. ‘연성’의 범위는 관대한 동시에 엄격하여 ‘게이물’ 내지 ‘퀴어물’과 대략 아래의 차이점을 갖는다.

 

1. 공X수 커플링을 기본으로 하는 해피엔딩 로맨스 서사


2. 남성 중에서도 주로 미소년-미청년들이 주인공(매끈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이며 대부분 털 묘사를 생략)

 

3. 항문성교를 다루되 관장 및 이완을 비롯한 게이삽입섹스의 조건들을 무시함. 그 결과 항문이 여성의 질과 유사하게 묘사되며, 이는 일명 야오이구멍(제3의 구멍/후조시구멍)이라 불림. 그러나 근래의 작품들에선 성소수자로서 인물들이 겪는 차별과 갈등이 섬세하게 표현되거나, ‘남성스러운’ 공과 ‘여성스러운’ 수라는 전형적 구도를 없애거나, 사전 준비를 하지 않아 삽입에 실패하는 모습을 그리는 등 현실을 반영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공X수 자리분배는 캐릭터의 역할을 결정하면서 다양한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러한 BL 공수놀이가 ‘썩음’과 연결되는 이유는 이성애 규범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여성을 위한 포르노’로 이야기될 만큼 서사는 부실하고 성애 묘사만이 강하며, 게이 혹은 퀴어라는 ‘현실의 성소수자들’을 낭만화하고 왜곡한다는 혐의 때문이다. 즉 ‘멀쩡한’ 소년들을 배구하거나 자전거 타거나 현자의 돌을 찾게 내버려두지 않고 왜! 굳이 섹스를 하도록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왜! 게이의 문화에 하등 관심이 없으면서 감히 게이의 도상을 빌려오느냐는 것이다.

 

세 질책에는 이성애중심주의(Heterosexism),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성 엄숙주의, 소수자의 고통을 타인이 대신 말할 수 없다는 당사자주의(그런데, 글쓴이는 ‘당사자’인가 아닌가?), 텍스트(판타지)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 내지 게으른 해석학이 착종되어 있다.

 

▶ 스칼렛 베리코 작, 박소현 옮김 <그남자, 타츠유키>(2016, 레진블랙) 전형적인 공-수 구도를 강박적으로 역전시키는 작가. 그렇다, 뒤의 안경 쓴 검정 머리가 공이다.


# ‘썩은 여성’들의 문화 탐구하기


본 기획 <후조시, 상냥하게 가르쳐줘>는 BL 섹슈얼리티의 쾌락을 향유하는 후조시 ‘썩은 여성’들의 문화를 탐구한다. 어째서 후조시의 욕망이 ‘썩음’으로 수식되는지, 그리고 썩은 ‘여성’이라는 주체가 어떻게 ‘여성’ 범주를 초과하거나 그것을 비껴가는지에 주목할 것이다.

 

이를 후조시의 섹슈얼리티(레즈비어니즘-무성애-랜선섹스), 후조시의 방법론(판타지의 임계점-Real Person Slash), 후조시의 규범(청소년 커뮤니티와 내부검열) 등에서 다뤄보려 한다.

 

아이돌 팬픽, 머리 짧은 동급생, 리메이크 버전 셜록과 왓슨의 ‘캐미’를 향한 열망은 왜 사사롭다 못해 부끄러운 기억으로서 끝없이 지워지는가? ‘야오녀’, ‘동인녀’라는 말들은 어떻게 거의 사어(死語)가 되었으며, 후조시에게 그 이전의 역사란 어떤 형태였을까? 본 기획은 또한 역사가 되지 못하고 망각되는 기억들을 쉬어가는 코너(후조시 조상님 인터뷰), 후조시 방법론(포르노그래피와 법), 후조시 규범(메타비평의 성장) 등을 통해 정리해보려 한다.

 

‘저는 후조시 그런 거 모릅니다, 처음 듣습니다’ 하는 당신의 잘려나간 기억들을 여기서 함께 모아보자. 도려냈던 후조시 과거가 궁극의 즐거움을 들고 당신을 찾아올 지 모른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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