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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_내_성폭력, 무대 위 가해자가 말하다

연극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예술계 내 성폭력을 다룬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4월 21일부터 30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상연되는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작/연출 구자혜,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은 #예술계_내_성폭력 공론화 이후, 연극 공연으로는 최초로 이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무대에서 가해자는 ‘시인’으로, 피해자는 ‘습작생’으로 특정되지만 이 작품은 문단이라는 특정 분야가 아닌 예술계 전반의 성폭력과 위계폭력 문제를 다룬다.

 

▶ 연극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컨셉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이강물

 

가해자 탐구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술계 문화

 

특이할 사항은 이 작품에는 피해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 안에서 “도대체 이 세계가 무엇이길래 이런 가해가 반복되고 있는가?”라고 고통스럽게 질문하는 사람들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지지자들이 아닌, 바로 가해자 주변인들이다.

 

가해자의 스승, 동료 등 가해자를 둘러싼 사람들은 예술계 내 성폭력의 발생과 이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로로 이 세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해자를 탐구하고, 가해자의 역사를 추적한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가해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성폭력을 예술의 자양분으로 포장하는 풍토와 예술계의 위계적인 시스템이 낱낱이 드러난다.

 

‘병들어야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 성폭력 전력이 있음에도 거장으로 여전히 칭송받는 서양의 시인들을 언급하며 “왜 우리는 서양의 시인들처럼 대접받지 못하는가!”라고 한탄하는 시인, 가해자에게 “너는 너무 시인이었다”고 말하는 스승…

 

결국 이들 스스로 성폭력 범죄가 정당화되고 묻힐 수밖에 없는 구조를 폭로하는 셈이다. 또한 무대에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가해자 주변인들만 등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세계를 기록해 온 주체가 누구인지, 누가 기록을 독점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 연극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연습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이강물

 

“가해자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피해자와 연대하겠다”

 

연출가 구자혜씨는 SNS에서 공론화된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를 접했을 때 “왜 이제야 올라왔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길래, 왜 피해자들이 이제야 입을 열 수밖에 없었을까?” 이 집요한 질문 끝에,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던 가해자들의 말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냥 단순히 ‘가해자가 성폭력을 저지르고 그걸 감추려고 급급해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까지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예술계 내의 위계적인 시스템 때문이죠. 엄청 잘 나가는 예술가는 잘못을 해도 그냥 덮어지죠. 가해 사실을 덮는 것에도 실력과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곳이 예술계인 거죠.”

 

구자혜 연출가는 “더럽고 악의적이고 치졸한 그야말로 악 덩어리인 가해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그 실체를 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무대 위 가해자들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때로는 관객인 나조차 대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에 불쾌감이 차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은 얼마나 평범한 얼굴로 우리 곁에 있는가. “가해자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연출의 말처럼, 우리는 피해자와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평범함에 가려져 있는 악을 직면해야 하는지 모른다.

 

▶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작/연출 구자혜 씨.  ⓒ사진제공: 서울문화재단 이강물

 

단지 여성이 수적으로 적은 문제뿐만이 아니다

 

#예술계 내 성폭력이 공론화된 후 다양한 그룹들이 생겨나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연극계에서는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구자혜 연출가는 “연극계는 다른 예술계보다 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문단은 작업 주체가 개개인이고 영화는 모여서 작업하다가 끝나면 흩어지죠. 하지만, 연극판은 정말 좁고 극단으로 묶여서 가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폭력, 위계 폭력에 대해 발설하기 더 힘든 것 같아요.”

 

구자혜 씨는 연극계나 언론이 여성연출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비판했다. “남성연출가를 독자적인 인물로 보고 ‘중요한 선생님’으로 여기는 반면, 여성연출가에 대해서는 늘 ‘젊은’, ‘여성’연출가로 보며 다른 여성연출가들과 묶어서 이야기 한다”는 것.

 

연극계 또한 피라미드 구조여서 높이 올라갈수록 임원급은 남성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작품 제작에 지원을 받으려고 할 때 지원 작품을 결정하는 심사위원 대부분이 남성인 상황은 다른 예술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연출가들뿐만 아니라 여성 연극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위한’ 대본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맡을 역할이 많지 않고, 맡는다손 치더라도 대부분 전형적인 여성캐릭터일 뿐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단순히 여성이 수적으로 적은 문제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점하는 위치, 힘 이런 것들에서 남성들과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고 구자혜 씨는 전한다.

 

▶ 연극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제공: 서울문화재단 이강물

 

변화의 기운, 새로운 작업환경 만드는 흐름에 주목

 

이런 현실에서도 변화를 위한 시도가 조금씩 싹트고 있다. 이번 공연을 기획한 남산예술센터 기획제작팀의 김지우 프로듀서는 “남산예술센터 주도로 2017년에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을 하는 팀의 배우, 스탭들은 분기별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남산예술센터와 공동 제작을 하는 11개 팀과의 계약서에 ‘성폭력 예방 교육의 의무’를 명시한 것. 교육은 한국여성민우회가 진행한다.

 

김지우 프로듀서는 “연극계는 세대 간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 그래도 희망적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출신학교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또 최근에는 젊은 창작자 그룹 안에서 계보나 위계를 뚫고 ‘우리의 연극’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연극 작업 환경을 만들어 가려는 흐름에 반가움을 표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공연 예매는 남산예술센터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nsartscent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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