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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여행의 정수는 ‘여성들의 이야기’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⑨ 뉴욕에서 만난 여성들



여행의 즐거움은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소에 가보는 것, 나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 페미니스트 여신의 가호를 받은 것 마냥, 굉장히 좋은 경험들을 했다. 뉴욕 여행의 마지막 편이 되는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 여행 기간 동안 만났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girls like girls”에서 영감을 받은 여행

 

사실 이번 여행을 시작했던 이유를 이제야 밝힌다. 헬조선의 성차별적 회사에서 탈출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시점에 발견한, 미국에서 열리는 어느 콘서트 소식이었다. 퇴사 기념으로 나에게 위로가 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선물을 해주고 싶던 차였다. 그 타이밍에 발견한 콘서트 소식은, 나에게 페미니즘 뉴욕 여행을 구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한 콘서트는 바로 헤일리 키요코(Halely Kiyoko)라고 하는 가수의 공연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특히 10대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며 유명세를 타고 있는 헤일리 키요코는 아직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독자들 중에 그녀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녀의 노래 “걸즈 라이크 걸즈”(girls like girls)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수도 있다.

 

▶ 헤일리 키요코(Halely  Kiyoko)의 “girls like girls” 뮤직비디오 중에서


최근 유투브 조회수 6천만을 돌파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친구로 지내던 여고생 두 명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그 사이에 끼어있던 남자친구가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자 맞서서 쥐어패고(정말 시원하게 때린다)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내용이다.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예쁘게 만들어진 뮤직비디오의 전반적인 연출뿐만 아니라, 여자가 남자의 여자를 빼앗아 온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이 뮤직비디오는 기존의 이성애자 남성 시선으로 그려졌던 ‘수동적이고 이쁜 여자 애들 둘이서 묘하게 섹슈얼한 느낌을 풍기며 이성애자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한다’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여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재치 있으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노래 가사가 반향을 일으켰다.

 

Stealing kisses from your Mrs.

네 여자친구에게서 키스를 뺏어올 거야

on the move collecting numbers, imma take your girl out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네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거야

I'm real and I don't like feel like boys

나의 존재는 진짜야, 그렇다고 내가 남자라고 느끼진 않아

I've been crossing all the lines

나는 모든 경계를 뛰어넘고 있어

all the lines kissed your girls, that made you cry, boys

그리고 네 여자친구와 키스하지. 그건 널 울게 만들었지.

girls like girls like boys do, nothing new

여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자를 좋아해. 새로울 건 없어

 

※ 헤일리 키요코 “girls like girls” 뮤직비디오: http://bit.ly/1eNL6c7

 

“여기는 안전한 곳이에요”

 

“girls like girls” 외에도 헤일리 키요코의 노래 대부분은 여성들, 특히 10대 20대 여성들이 생각하는 섹슈얼리티와 성적 욕망, 성장 등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 특징 때문인지 역시 콘서트 장을 찾은 관객의 대부분은 10대 20대 여성이었다. 무지개 깃발을 두르고 친구들 서너 명과 함께 웃고 떠들던 소녀들 무리, 손을 잡고 온 여-여 커플뿐만 아니라 자매도 있고, 모녀도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앞뒤 사람들과 말을 섞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도, 무언가를 공통적으로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잠시나마 이방인인 관광객 신분에서 벗어나서 그 장소, 그 시간을 어색함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나 아직 신용카드를 못 만드니까 오빠가 대신 결제해 줬어’라고 해맑게 말하는, 알고 보니 15살 소녀 앞에서 ‘나 지금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약간의 충격을 느끼긴 했지만.)


▶ 콘서트 무대에서 열창하는 헤일리 키요코(Halely  Kiyoko) ⓒ주연

 

보스턴 공연 때는 공연장 밖에서 꽤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길가였던 탓에 길 가던 사람들이 ‘뭐하는 중이냐? 누구 콘서트냐?’라고 말을 거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중년의 남성들과 여성들의 그런 물음에, 10대 여성들은 “콘서트 보러 왔어요, 헤일리 키요코요”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여자가수인데 줄 서 있는 애들도 다 여자네’라고 중얼거리면서 지나가자, 자신의 성적 지향이 의심받는다는 것에 조바심을 느끼거나 위축되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그게 어때서”라며 꺄르르 웃는 소녀들을 보며 내심 부러웠다. 그들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 있게 된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에.

 

몇 시간을 기다려서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투어 타이틀이기도 한 “원 배드 나잇”(One bad night)을 부른 후, 헤일리 키요코는 첫 멘트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기는 안전한 곳이에요. 아무거나 해도 돼요,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춤을 춰도 돼요, 지금 그걸 평가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웃음) 전 그 춤이 어떻든 간에 좋아할 거고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 듣기 싫은 소리, 그런 건 이제 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마음껏 즐겨요.’

 

그녀가 ‘여기는 안전한 곳’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일리는 ‘그냥 자기 자신이 되세요’(Be yourself)라는 말도 했는데, 그녀의 말대로 나는 공연 내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알 수 없는 춤을 추었다. 주변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는, 그냥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만 지닌 뜨거운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롤모델을 찾던 소녀, 소녀들의 롤모델이 되다

 

공연이 끝난 후, 그 공간에 남아 ‘너무 좋았어, 너무 멋있어, 나 아직도 떨려’ 등의 말을 주고받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약간 부러워졌다. 여성의 성적 욕망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젠더가 남성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솔직한 욕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뮤지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전에는 한 번도 명확하게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헤일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언론 매체를 통해 공식 커밍아웃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라는 동안,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커밍아웃한 셀러브리티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저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롤모델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이런 말을 한 그녀는 며칠 전 26살의 생일을 맞이했다.

 

과연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린 늘 우리 각자의 삶과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건 쉽지가 않다. 하지만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롤모델을 찾아 헤매던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기 시작했고, 다른 소녀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나는 그걸 현장에서 목격했다.

 

여성들의 역사를 찾아내는 사람

 

▶ <뉴욕을 만든 여성들> 북토크가 진행된 파워하우스 아레나 ⓒ주연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여행 중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여성’이라는 단어를 참 여러 번 검색했다. 그러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곤 했는데, <뉴욕을 만든 여성들>(The women who made New York) 북토크도 그 중 하나였다. 작년 10월에 발간된 이 책의 제목이 무엇보다도 날 흥미롭게 했다.

 

브룩클린의 덤보(Dumbo)에 위치한 독립 서점인 파워하우스 아레나(Powerhouse Arena)에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것과, 책을 집필한 작가 줄리 스켈포(Julie Scelfo)와 일러스트 작가 할리 헬드(Hallie Heald)가 다 참가한다는 정보를 보고 참가 신청했다.

 

평일 저녁, 도시에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한 시간에 불빛이 반짝이는 크지 않은 서점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책의 내용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아 보였다.

 

뉴욕타임스, 타임즈, 뉴스위크 등에 글을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온 줄리 스켈포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묻혀진 뉴욕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만든 이 책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였다. 북토크에서는 줄리의 책 일부 낭독이 있었고 Q&A 시간도 가졌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뉴욕시의 역사를 읽는다면 당신은 남자들에 대한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를 만들었다는 남성 정치리더들, 남성 활동가들, 남성 문화 창조자들에 대해 읽게 될 것이다. 남성들의 기여도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몇 세기 동안 연필과 줄자, 망치와 빨래판, 프라이팬과 기타를 들었던 여성들이 없는 뉴욕을 한번 상상해보라. 뉴욕이 같은 모습으로 보이고 같은 소리를 낼까? 음, 아닐 것이다. (중략) 여성들의 이야기를 빼 버리는 것은 뉴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책을 낭독하는 줄리 스켈포의 목소리에서 왜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도와 의지가 느껴졌다. 난 하드커버의 이 두꺼운 책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대략 사분의 일 정도 읽었는데, 영어로 된 책에 대한 어지러움증이 있음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혔다.

 

뉴욕의 대표적인 명물 중 하나인 브룩클린 다리가 건설되는 것에도 여성이 관여되어 있다는 이야기, 유아사망율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을 때 그 원인을 분석하고 예방법을 찾아 낸 여성 의사 이야기(그녀가 은퇴할 때 뉴욕시는 미국 내에서 가장 낮은 유아사망율을 기록했다), 1920년대 ‘레즈비언과 바이-큐리어스(bi-curious) 여성들’을 위한 문학 소셜 클럽을 운영하다 감옥에 들어가고 결국 강제출국 당한 폴란드 이민자였던 여성 등…

 

누군가의 부인이 아니면 아예 기록되지도 않았던 여성들의 엄청난 공로와 영향력이 밝혀지는 이 이야기는 마치 숨겨진 세상에서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소설같이 읽혀서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126명의 여성 아티스트, 활동가, 정치인 그리고 범죄자들(그들은 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의 내공과 힘이 발휘되어 많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도시 뉴욕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는 마치 판타지 소설 같았지만, 놀랍게도 모든 건 정말 실제 존재했다. 이 이야기를 수집하고 정리한 줄리 스켈포의 작업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책에는 인물들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들은 러시아 근방에 위치한 나라인 조지아에서 미국으로 온 일러스트레이터 할리 헬드의 작업이다. 굉장히 개성 있는 표현으로 인물들의 성격과 업적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인물들을 사진도 참고했지만, 줄리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뉴욕을 만든 여성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만든 여성들, 그리고 내가 지금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서울을 만든 여성들의 이야기도 너무 궁금하다고 말이다.

 

나대로 살면 돼, 남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없어

 

▶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사인을 받은 <뉴욕을 만든 여성들> ⓒ주연


이외에도 뉴욕에서 다양한 여성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일한지 6년차라고 하던 일본인 여성과 ‘이방인으로서 뉴욕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일도 있었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를 불신하는 20대 여성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레즈비언 여성과도 만났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만남과 이야기들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자유분방한 도시, 예술의 도시, 트렌디한 도시, 패션의 도시, 섹스 앤 더 시티… 수많은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남성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도시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직접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여행이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 줄 누군가가, 무언가가 더욱 더 많아졌다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은 결국 우리가 다양한 이야기를 해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여성이지만 또한 각각의 다른 여성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헤일리 키요코가 뉴욕 콘서트에서 했던 말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의 검증(Validation)이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찾아간 뉴욕에서, 많은 여성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걸 느꼈다.

 

처음부터 대단한 페미니즘 여행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하나 둘씩 하다보니 이런 여행이 완성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알찬 여행이었다. 나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로 정리하면서 곱씹으면서 다시 생각하고 배우게 되는 부분도 많았다.

 

페미니스트의 여행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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