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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과 상식 ‘바깥’의 세계를 그리는 만화가

<양지보육원 어른반> 출간한 사카이 에리 인터뷰



만약 출산율 저하 대책으로 ‘반하는 약’이 개발된다면? 몸과 마음을 파는 여고생이 출현한다면? 성형이 발달하고 일반화되어 모두가 젊고 아름다워진다면? 남자 여자 외에 제3의 성이 공식 생긴다면? 엘리트 회사원 남성이 임신을 한다면?

 

언뜻 엉뚱한 설정으로 보이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는 성, 젠더,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모성에 대한 신화를 드러내고, 뒤집고, ‘상식’ 바깥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 만화를 계속해서 그리고 있는 사카이 에리. 대범한 여성 캐릭터도, 허약한 남성 캐릭터도 주저 없이 그려내는 사카이 씨를 인터뷰했다.

 

“스타워즈 같은 영화가 제아무리 넓은 세계를 그린다 한들, 남녀 규범은 그대로잖아요? 저는 페미니즘으로 구원받은 부분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카이씨의 취미는 기모노 입기라고 한다. “기모노의 무늬를 좋아하는데, 기모노는 심지어 무늬옷 위에 무늬옷을 입잖아요. 그게 제 취향을 저격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가 만난 날은 기모노를 입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독자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안 입고 나왔다고. (왜?!)

 

여자가 활약하는 만화를 좋아했던 아이

 

▶ 만화가 사카이 에리(1972년 생)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어릴 적에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내 성적으로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 다음으로 되고 싶었던 것이 만화가. 유치원 때 처음으로 그린 만화는 뻐드렁니 여자아이 ‘얏칭’이 여자 부하들을 이끌고 악인과 싸운다는 이야기였다. “옛날부터 여자가 활약하는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왜 얏칭이 뻐드렁니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청소년 만화잡지의 어시스턴트 모집 공고에 지원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만화가 사이몬 후미 씨의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그리고 스물한 살 때 남성만화 잡지로 데뷔했다.

 

데뷔까지는 순탄했다. 하지만 “그리고 싶은 게 분명해서 만화가가 된 게 아니다 보니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남성편집자의 말에 따라 남성 독자들에게 ‘먹히는’ 만화를 그린 적도 있었다. ‘4차원’ 여자가 등장하는데, 결국 남자에 의해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독자 반응에, 비슷한 컨셉의 다음 작품을 권유 받았다. 그러나 사카이 씨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자기주장이 없는 여자는 싫어해요, 그랬어요.”

 

남성의 망상에 봉사하는 작품을 그리긴 싫어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카이 씨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어머니가 입원 중일 때, 원체 가사와 육아를 일절 하지 않던 아버지가 말했다. “배달도시락은 싫어.” 아버지의 이 한마디에 사카이 씨는 식사당번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분노한 사카이 씨가 페미니즘 책을 찾아 읽어보니 “내 얘기가 쓰여 있었다”고. 페미니즘을 알기 시작하던 무렵의 작품이 ‘반하는 약’이 등장한 첫 단행본 <러브 호르몬>(2002, 고단샤)이다.

 

작품에 대한 평은 좋았지만, 여전히 남성의 망상에 봉사하는 작품 의뢰가 많았다. 그걸 거절하니 일이 거의 없는 시기가 이어졌다.

 

만화가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내가 정말 그리고 싶은 걸 그리지 않은 채 그만두기는 싫어서” 그린 것이 성형기술이 발달한 근미래를 무대로 한 <뷰티풀 피플·퍼펙트 월드>(2010, 쇼가쿠칸)다. 사람을 규정하는 미추, 성별, 나이로부터는 자유로워지지만 오히려 가슴 속 어둠의 윤곽이 노골화되는 모습에 가슴이 뜨끔하다.

 

한국에도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이 작품으로, 사카이 씨는 <월간 IKKI>(지금은 폐간됨)에서 수상하는 만화상의 단행본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여성편집자의 의뢰가 많아지면서 비로소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남녀와 제3의 성을 그린 <서드>(쇼덴샤) 그리고 <히야마 겐타로의 임신>, 폭탄과 미인이 바뀌는 <거울 앞에서 만나요> 3권, 자신의 고령임신과 사산, 재임신 경험을 그린 <임신 17개월!>(이상 고단샤) 등의 작품을 펴냈다.

 

▶ 한국에서 출간된 사카이 에리 作 <뷰티풀 피플·퍼펙트 월드>(시리얼, 2015)

 

‘양지보육원 어른반’이 담고 있는 현실

 

현재 사카이 씨는 여성만화잡지 <JOUR>(후타바샤)에서 <양지보육원 어른반>을 연재중이고, 막 단행본을 출간했다. 아이를 보육원에 다니도록 하는 어른들에 초점을 맞춘 휴먼드라마인데, 자신의 사산 경험과 세 살 아들의 육아 경험 안에서 그렸다.

 

가사, 육아, 일 모두를 떠안고 심신 모두 한계에 이르러 있지만 남편에게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어느 날 푸딩을 함부로 먹는 남편을 보며 뚜껑이 열린다.

 

“제 경험이에요. 어느 날, 제가 녹화해둔 호러드라마를 남편이 무심코 삭제해서 열이 받아서. 하지만, 일상의 불만이 거기에 집약되어 있는 거죠.”

 

남편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장시간 노동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탓에 섬세하고 방대한 가사와 육아의 부담은 오롯이 아내의 어깨에 지워진다. 만화 속 여성은 남편에게 육아 분담을 제안하지만…

 

그밖에도 만화에는 집단행동을 흩트리지 말 것을 강조하는 보육, 그 안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게이 남성보육사, 휴일 없는 전업주부의 괴로움도 그려진다.

 

“보육원에서 보육사 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젠더 규범이 강하고, 다들 똑같이 해야 하는 분위기 같은 것이 마치 ‘느슨한 군대’ 같았어요. 이러다가는 이 아이들이 자기 의견 말하기를 꺼리는 어른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보육사의 수도, 다양성도 더 풍부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육아는 즐겁다는 내용도 빼먹지 않고 그렸어요.”

 

사카이 에리 씨가 앞으로 몰두하고 싶은 주제는? “언젠가 영화 <서프러제트>(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한 여성을 그린 작품)의 일본판 같은 걸 그리고 싶어요! 공부를 많이 해야겠지만… 여성의 역사를 그리고 싶어요!”라고 사카이 씨는 열변한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가시와라 도키코 씨가 작성하고 고주영 씨가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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