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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여성…용기 있게 선택한 ‘자기만의 시간’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④


※ <노년은 아름다워>(새로운 미의 탄생)의 저자 김영옥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기사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지금 여기, 홀로 있음의 위대함이란!

 

▶ 아무도 없는 숲에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고토를 연주하는 TSUMUGI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


‘젊은’ 여성들에게 50년 후 자신의 나이든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제안하여 연출해 낸 25명의 독특한 ‘할머니’ 이미지-야나기 미와(Miwa Yanagi)의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홀로 살기를 보여주는 유형을 살펴보자.

 

이 이미지들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늙음이란 무엇보다 점점 더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과정임을 환기시킨다. 평생의 삶에 필요한 것이 상상력이고 용기라면, 이것들이 가장 필요한 때는 바로 노년일 것이다. 이 시기야말로 스스로 용기 있게 선택한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원치 않는 버림받음에 슬퍼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노년의 삶이 꼭 이 두 개의 선택지만으로 축소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정든 마을에서’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과 멀고 가까운 이웃들에 둘러싸여 늙어가는 것이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사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삶은 그 구조상, 내면에 축적된 경험들과 조우하며 삶의 시간성을 음미하기에 적당하다. 이것은 흔히 오해하듯 향수에 젖어 과거에서 위로를 찾는 처량한 삶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지난날 경험한 사건들, 느낌들, 사물들, 관계들이 서로서로 새롭게 자리 잡으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음에 눈이 뜨이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풀려나는 새로운 이야기들에 귀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내면에 고인 시간이 만들어내는 이 변화를 제대로 지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든 마을에서’ 식구들, 친구들, 멀고 가까운 이웃들에 둘러싸여 늙어가는 것과,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서로 배치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당하기 힘든 단절이나 외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노년일 것이다.

 

야나기 미와의 작업에서도 꽤 많은 여성들이 ‘홀로 있음’을 선택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주할 이 시간을 위해 그녀들이 꿈꾼 장소는 숲과 사막, 눈으로 뒤덮인 광활한 벌판 혹은 방이다. ‘집’이라는 말 대신 나는 의도적으로 ‘방’이라고 말한다. ‘꿈꾸는 노년’의 장소 혹은 공간으로서의 방은, 한창 혈기왕성할 때 필요로 했던 공간이나 장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아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노파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KAHORI ⓒyanagimiwa.net


KAHORI는 평소에 꿈꿔오던 대로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숲 한가운데 그녀만의 작은 집을 지었다.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숲속 작은 집에서 산 지 10년. 이제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바깥세상이 아직 존재하나? 모르겠네. 내가 아직 존재하나? 그것도 확실치 않네.”

 

또한 TSUMUGI는 늦은 겨울, 아무도 없는 숲에서 고토(KOTO)를 연주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닌, 봄을 맞이하기 위한 연주다. 땅위에 쓰러진 고목 등걸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고토를 올려놓은 백발의 노파가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앙상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고토 현을 뜯자, 거기서 울려 나온 소리가 땅을 흔들고 산을 깨운다.

 

그런가 하면 KWANYI의 공간은 책으로 가득한 방이다. 바닥 여기저기에 책들이 쌓여 있거나 펼쳐진 사이로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놓여 있다. 그녀는 바로 그 책상 앞에 앉아 상 위에 펼쳐진 크고 두꺼운 책 위로 한껏 몸을 굽히고 있다. 읽고 있는 책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이다. 그녀의 한 손에는 연필이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은 곁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고양이 등에 얹혀 있다.

 

이 이미지에서 시선을 확 잡아채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그 빛은 충분히 밝고 강해서, 방안이 어두워도 따로 불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다.

 

여자들은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하려고 외모를 바꾼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고 붓글씨 쓰는 것을, 그리고 비 온 뒤의 산을 더 좋아한다.

이제 나는 진리를 알아보는 내 자신의 눈을(my own dharma eyes) 얻게 되었다.

훌륭한 책 위로 몸을 굽히고 활자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즐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날카로운 눈을 가진 노파’라고 부른다.

 

평생에 단 한번 있는 뜻밖의 발견이라면

좋은 책들과 좋은 친구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리.

살면서 누리는 행복이라면

손에 든 한 잔의 차, 그리고 화로에서 타오르는 향이 유일하리.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KWANYI ⓒyanagimiwa.net


나는 개인적으로 KWANYI가 꾸는 이 노년의 꿈이 특히 마음에 든다. 타인의 시선을 배려하거나 혹은 두려워해서 끊임없이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고 뭔가를 쓰고 비 온 뒤의 산을 찾는 일을 선호할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 노년의 진정한 권리로 느껴진다.

 

게다가 진리를 알아보는 깨달음의 눈을 갖게 되었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자신의 다르마(dharma, 이치 혹은 법도)가 이끄는 대로 이 책과 저 책을 옮겨 다니며 지혜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참으로 멋진 ‘지금 여기’의 삶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밤중 전등을 켜지 않고 깨달음이 형형한 자신의 눈빛으로 활자들의 숲을 노닌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사실 내게 노년은 늘 이런 사람들이었다. 성심성의껏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어떤 깨달음, 혹은 지혜를 얻게 된 사람. 언제 어디에 있든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 삶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들려줄 말들을 알고 있는 사람. 이런 존재가 노인이기에, 근대가 시작되기 전 모든 마을 공동체에서 연장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경외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생존 지식’이 ‘삶의 지혜’와 분리될수록, 아니 삶의 지혜가 생존 지식에 철저히 종속될수록 연장자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문제적’이 되어갔다. 더군다나 지식이 특정 목표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고 행할 줄 아는 솜씨를 의미하는 테크네(techne)에서 복잡한 규칙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기술(technology)로 옮겨가는 현재의 환경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성심성의껏 살면서 터득한 지혜는 더더욱 쓸모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IT 사용이 삶의 필수조건이 된 지 오래고, 빅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지식세계가 열리리라 예고되는 현 시기에, 그 방면에서는 서너 살 된 아이들보다도 한참 뒤처지는 노년들이 젊거나 어린 세대에게 건네줄 지식 혹은 지혜란 전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내게는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자신의 다르마가 비춰주는 대로 활자들의 숨은 의미를 찾고 있는 노년 KWANYI의 모습이, 지금의 상황을 역설로 되비추는 예언 같아서 더 ‘현재적’으로 보였다고 할까.

 

‘서리가 피워낸 꽃을 증언’하는 삶

 

마지막으로 MINEKO와 MITSUE가 있다. 미네코는 비행사다. 그녀는 스리랑카의 아담스 피크 상공에 떠 있다. 계기판에 뜬 현재 시각은 2051년 새벽 6시 30분. 시시때때로 풍경과 분위기가 변하는 인도양 위의 하늘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지금도 그녀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뭉게구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다.

 

▶ 야나기 미와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에서 MINEKO(좌)와 MITSUE(우) 이미지. ⓒyanagimiwa.net

 

하늘에서 홀로임을 누리는 미네코와 달리, MITSUE는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잠든 겨울 숲에 누워 있다. 그녀 주변의 모든 것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노랗고 붉은 꽃들이 작은 얼굴을 내민다. 얼어붙은 땅에 핀 성에꽃의 증언자인 그녀는, 동면에 든 산의 느리고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산의 들숨과 날숨, 그 리듬에 따라 그녀도 조금씩 숨을 내쉬고 또 들이마신다.

 

“누군가는 봄을 기다리는 이 시간,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을 떠난다.”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되뇔 수밖에 없다. 평범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의 한가운데 누워 있는 자만이 증언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MITSUE의 노년 이미지는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의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노년은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므로. 하이데거가 강조했듯이, 유한한 이곳에서의 생에 내던져진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 끝을 품고 있다. 매 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본질을 절실하게, 매순간 지각하고 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노년 말고 또 있을까.

 

MITSUE의 모습은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는 노년의 시간을 가리킨다. 그녀가 ‘증인’이라는 말을 쓴 게 흥미롭다. 그녀는 어쩌면 노년의 삶이란 ‘서리가 피워낸 꽃을 증언’하는 삶과 같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과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노인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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