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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표준의 몸’은 조작에 가깝다

<반다의 질병 관통기> 질병과 몸과 삶이 분열하지 않도록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 feminist journal 일다 바로가기

 

새해 계획을 세우지 말 것!

 

2월, 아직까지는 새해 계획을 잘 지키고 있다. 단단히 결심을 했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지 말 것! 시간이나 달력이 그나마 좋은 건 새해처럼 특정 시기 삶을 돌아보고, 내가 원하는 삶을 떠올리며 계획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야 그나마 인생이 덜 흔들린다. 아침저녁으로 다이어리를 쓰고 확인하는 게 오랜 습관이라, 한 번씩 새해 계획 목록을 만들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지만 접는다.

 

예측할 수 없는 몸 때문이다. 몸은 예전보다 훨씬 호전됐지만, 한 번씩 고꾸라진다. 여러 치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출현하는 현기증, 출혈, 통증 그리고 한 번씩 수직 낙하하는 체력. 그럴 때마다 내가 세웠던 삶의 계획은 쓸모없어져 버렸다. 더 이상 전적으로 치료만을 요하는 환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건강한 몸도 아닌 경계의 몸으로 사는 삶. 여전히 낯설다.

 

만약 삶의 불안을 잘 헤쳐 나가는 단단한 사람이라면, 몸의 불안정함 속에서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때마다 적절히 수정하며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계획했던 일이 몸 때문에 틀어질 때마다, 무력감에 온통 휩쓸렸다. 내 몸이 싫고, 질병이 미웠다. 질병이 내 삶을 헤집어놓기 이전이 그리웠다. 한 번씩 외치고 싶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진취적으로 벌였던 질병과의 싸움을 멈추다

 

몸이 아프던 초반엔, 아픈 몸 상태가 곧 내 인생 상태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상적 삶’에서 해고당한 것 같았고, 빨리 ‘정상적 몸’으로 복귀하기 위해 열심히 질병과 싸웠다. 가까운 지인들이 아픈 몸 돌보다가 과로사 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할 만큼, 나는 짜여진 규칙에 따라 수면 시간, 적절한 음식, 꾸준한 운동으로 엄격하게 관리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몸 돌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삶이 지겨울 때마다, 혼자 가만히 되뇌었다. ‘내 인생에 잠시 정지 버튼이 눌러진 것뿐이야, 곧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몇 년간 진취적으로 진행하던 질병과의 싸움을 마침내 멈췄다. 몸이 꽤 호전되기도 했고, 질병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찬 일상도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나의 일을 하는 ‘진짜 일상’이 그리웠다. 나는 질병 중심의 삶은 이제 그만 살겠다고 선언했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질병을 내 삶의 일부로 수용하며, 아픈 몸과 더불어 살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진짜 내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산지 3년쯤 지났다. 하지만 질병 때문에 삶의 계획이 무산될 때마다, 무력감과 좌절감에 무던히도 흔들렸고, 그런 내가 실망스러웠다. 여전히 아픈 몸을 수용하지 못했고, 질병을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한 번씩 건강한 이들과 나를 동일선상에 놓았다. 그들처럼 열정적 활동력을 원하고, 그렇지 못한 내 몸을 한탄했다. 나는 건강한 이들의 일상을 불온하게 욕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 버린 줄 알았던 몸에 대한 낡은 관점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여전히 몸을 내 삶의 가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대상화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상적 몸, 건강한 몸, 표준의 몸’을 설정하고, 그에 가깝지 못한 내 몸에 낙담했다. 나는 아픈 내 몸을 최대한 통제해서, 어떻게든 건강한 몸으로 만들려고 했다. 마치 장애인의 몸을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보며, 재활을 통해 최대한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몸을 소외시켰고, 질병은 나를 소외시켰다. 결국 질병과 몸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 몸’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기

 

▶자신의 몸을 비추는 허구적 정상성의 거울을 깨야 한다. ⓒ이미지: 조짱


건강왕국 시민들은 이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어떤 여성들이 사회가 규정한 ‘아름다운 S라인 몸’에 맞추기 위해 굶고, 찢고, 부풀리는 엄청난 통제를 가하고. 그 과정에서 몸이 대상화되고, 소외되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 여성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곤 했는데, 나 또한 형태가 다소 다를 뿐 마찬가지였다는 의미다. 물론 건강은 생명체의 본능이며 삶의 전제 조건이지만, 그 건강을 추구하는 나의 태도가 그랬다.

 

아픈 몸을 통제해서 정상적 몸을 만들려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픈 몸을 통제하고 극복해서 정상의 몸을 만들려고 하니까, 나는 계속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나를 미워하는 일이 반복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인간이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다. 그게 바로 ‘누구나 노력하면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환상을 만든다. 이는 그야말로 필사적 노력 이후에도 계속해서 암과 함께 사는 이들을 실패자로 명명하게 한다. 아픈 사람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으로 나누는 사고가 형성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몸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통제되지 않는 몸을 한탄하는 건, 신기루를 찾을 수 없다며 좌절하는 것만큼 어리석다. 마치 인간이 자연을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믿으며, 통제되지 않는 자연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일부 의사들이 환자의 노화가 결합된 죽음조차 치료의 실패로 인식하는 것과도 약간 닮았다. 생명체가 유지되기 위한 자정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질병 그리고 소멸의 순리인 죽음을 인간 몸에서 분리시키려 들고, 적대시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정상적 몸’은 또 어떤가. 정상적 몸, 건강한 몸, 표준적 몸이라는 것은 과대평가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허구적이다. 정상이나 표준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 왔고, 몸이나 건강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삼음으로서 여성의 몸을 열등한 몸으로 만들고, 월경은 숨겨야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요즘은 급성이나 중증질환자를 제외하고서라도 만성질환이 없는 몸이 드물다. 8시간 노동과 야근을 하고 다음날 너끈히 출근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그리 많지 않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사회가 정한 건강한 몸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건강한 몸이면 수행할 수 있다고 규정된 양의 일을 꾸역꾸역 하며 살아낸다.

 

어쩌면 이 사회가 말하는 ‘건강한 표준의 몸’은 조작된 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건강한 표준의 몸에 대한 기준이 높을수록 자본가와 의료산업에게는 반가운 일일 것 같다. 그리고 사회가 건강한 몸만큼 지겹게 떠들어 대는 아름다운 S라인 몸도 표준이나 정상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누가 그런 몸을 지속적으로 찬양하고 강조하는지.)

 

어쨌거나 이런 사고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내가, 정작 내 몸이 아프게 되자 정상적 몸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채근하고, 싸우고, 통제하려고만 들었다. 좀 부끄러운 일이다. 나에게 너그러운 방식으로 변명하자면, 그만큼 통제가능한 몸, 정상적 몸에 대한 환상이 사회적으로 강하기 때문일 게다.

 

지금 내 몸이 나에겐 ‘정상’이다

 

▶ 몸이 말하다  ⓒ일러스트: 정은


나는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새해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한 번씩 고꾸라지는 예측할 수 없는 몸으로 사는 이에겐, 년 단위로 삶의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게 몸에 맞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변화된 내 몸에 맞는 삶의 방식과 태도를 아직 더 탐구하고 배워야 한다.

 

쉽지는 않다. 특히 건강한 정상적 표준의 몸이 가득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그리고 모두 그런 몸이 되어야 한다고 서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균형 잡기가 참 어렵다. 나는 앞으로도 한 번씩 몸을 서열화, 위계화하는 시선으로 보면서 자괴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우선, 내 몸을 ‘건강한 정상의 몸’의 거울에 비춰 보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그 거울을 좀 더 깨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고, 결국 ‘몸, 질병, 나’는 분열하는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안 아픈 몸’을 기본 값으로 설정하지 말고, 정상이나 표준의 몸을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다양한 표준과 다양한 정상을 설정하고, 내 몸은 질병을 통해 적극적으로 흔들리며 생의 균형을 이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지금 내 몸이 나에게 ‘정상’임을 보다 깊이 있게 수용할 수 있기를, 내 몸에서 질병이 삶과 좀 더 사이좋게 흘러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어느 시절 죽음과 잘 마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덧붙여, ‘정상’이 아닌 몸으로 흔들리는 삶 위에 놓인 이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반다) feminist journal 일다 바로가기

 

※ 참고 문헌

강신익 <몸의 역사, 몸의 문화> 휴머니스트 2007.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그린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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