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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세계의 언어 찾기
<반다의 질병 관통기> 아픈 몸에 대한 세상의 무지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feminist journal 일다 ILDA
건강 안부를 묻는 질문에 답하며
새해다. 어느 때보다 건강 안부를 많이 묻고 나누는 시기.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요즘 건강은 어떤지 묻는다. 나는 예전보다 확실히 괜찮아졌다고 했다가, 이내 안 괜찮다고 답한다.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 하고 자주 헤맨다. 결국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친구들은 질문한 걸 무척 미안해하고 자책한다, 그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내 몸, 내가 경험하는 이 세계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질병을 경험한다는 것 ⓒ이미지: 조짱
아픈 사람이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하는 건 필수적이다. 아프다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삶의 지도가 쓸모없어 지고, 낯선 세계에 놓이는 일이다. 몸이 구사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다. 자신이 살게 된 그 새로운 세계에 대해 자신과 타인에게 제대로 설명 못하면, 자책감에 빠지거나 오해가 생기기 쉽다. 결국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기 쉽다.
동시에 아픈 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에게도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에게 익숙했던 그가, 아프면서 낯선 모습을 보인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면, 변화된 그 모습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아프면 힘들지, 예민해지기 쉽지,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이런 막연함은 한계가 명확하다. 구체적 이해가 없으면,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에 의존해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결국 동등한 위치에서 애정, 교감, 신뢰를 나누던 관계는 유지되기 어렵다.
사실 이뿐 아니라, 아픈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유용하다. 사람은 누구나 시기가 다를 뿐 결국 아프게 된다. 인간이 가진 질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질병 세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상상해 봄으로써 상쇄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픈 이가 자신이 살게 된 세계를 설명하는 것도, 그걸 듣고 아픈 이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세상엔 아픈 이가 넘치지만, 아픈 것에 대한 이야기는 치료자(의사)나 건강한 이에 의해 설명되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혹은 아픈 이가 직접 하는 이야기도 질병이 얼마나 힘든지, 그 힘듦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래서 결국 삶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로 이어지는 서사가 대부분이다. 세상은 아픈 이로부터 질병이 극복 가능하다거나, 최소한 나름의 쓸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정상성(건강)에 안도하고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할 수 있는 이야기들.
아이 돌보기와 아픈 몸 돌보기
나는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설명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또 세상엔 아픈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도 빈곤하다. 결국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자주 실패했다. 그래서 비유할 만한 상황이 뭐가 있을지 찾게 되는데, 최근 몸이 아픈 게 아닌데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겪는 이들을 만났다. 육아중이거나, 육아를 마치고 재취업을 한 지인들이었다.
그들은 집 안에 머물면서 아이를 돌보는 몇 년을 보냈고, 나는 내 몸을 돌보는 몇 년을 보냈다. 그들은 세상에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많아졌고, 옷장의 옷은 모조리 촌스러우며, 사회적 관계도 너무 협소해졌다고 했다. 세상에 뒤처진 것 같고, 그런 자신이 낯설다고 했다. 자신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사회에서 그 몇 년의 시간은 쓸모없고 무의미하며, 자신은 그저 경력단절 여성일 뿐이라고도 했다. 나는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때마다 그들은 인생을 아이가 있기 전과 후로 나눴고, 나는 인생을 아프기 전과 후로 나눴다.
특히 가장 공감했던 건, 그들도 나처럼 시간이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계획은 바로 취소됐다. 전적으로 육아중인 이뿐 아니라, 어렵게 재취업에 성공한 이도 회사 눈치를 보며 반차라도 써서 무조건 아이를 돌봤다. 나의 경우는 평소 강물처럼 잔잔히 흐르는 현기증이 갑자기 바다처럼 일렁이거나, 이유 없이 혈압이 후두둑 떨어지는 등 몇 가지 단골 증세가 있는데, 그런 게 시작되면 조금이나마 하고 있던 사회생활에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납작 엎드려 몸을 돌보며, 그 시간이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렸다. 시간이 나에게가 아니라 질병에게 귀속된 느낌이다. 시간이 질병에 의해 식민지화 된 느낌이랄까. 그나마 육아는 한정적이지만, 질병은 기한 없는 식민지 상태다.
몸을 돌본다는 건 마치 가사노동처럼 해도 표가 안 나지만, 안하면 바로 표가 났다. 요가원을 며칠 결석하거나, 자기 전 스트레칭을 안 하면 금세 몸 곳곳에 담이 결렸다. 컴퓨터 사용 시간을 평소엔 하루 4시간 이하로 유지하는데, 이런저런 일로 이삼일 동안 4시간 넘게 컴퓨터 앞에 있으면 금세 눈이 충혈되고 입술이 부르텄다. 몸이 삐그덕거릴 때, 빠르게 집중해서 돌보지 않으면 병원을 들락거려야 할 만큼 증세가 번졌다. 아주 예민하고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는 기분이다. 나의 주인, 몸님을 모시고 사는 몸종이 된 것 같다.
건강왕국과 질병왕국의 시민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이들에게, 시간이 남아돌지 않냐고 묻는 이가 있다. 때로 ‘하는 일 없는 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육아 중이거나 전업주부인 이는 물론이고, 나처럼 아픈 사람 그리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시간이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은 시간 빈곤자들이다. 당장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많고, 자신에게 시간 주도권이 별로 없다. 출퇴근이 있는 게 아니라서, 쉼이 일정하게 보장되기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사회적 존중을 거의 받지도 못한다. (네 몸, 네 자식, 네 가족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인데!)
▶ 수전 손택의 건강왕국, 질병왕국 문장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어쨌거나, 나는 요즘 약간이나마 사회생활을 하면서 몸종 말고 다른 역할도 수행하고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늦은 오후나 저녁에 회의가 있을 때는 각별히 더 몸을 돌본다. 전날 요가 시간을 약간 늘려서 몸의 이완을 촉진하고, 평소보다 일찍 잔다. 당일 날은 소소한 집안일 정도만 하고, 몸의 에너지 소비를 절전 모드로 둔다. 그래야 저녁에 창백해지거나 피로감에 멍한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 아침부터 출근해서 일하다가 회의에 오는 이들이지만, 내가 그 정도로 ‘관리’해서 참여해야 그들과 비슷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참여한 자리에서 늦게까지 멀쩡히(!) 회의에 함께하는 나를 보고, 아픈 사람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떨 땐 들뜨게 기분 좋다. 내가 마치, 건강왕국 시민권을 얻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겨우 만들어 낸 몸 상태에 대해, 쉽게 당연히 주어진 것처럼 여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질병왕국에 사는 시민의 자격지심일 지도 모른다. 혹은 나처럼 완치와 투병 사이, 경계의 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세상의 무지가 서운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몸님’을 모시고 사는 처지이지만, 언제나 건강만을 돌보며 살진 않는다. 한 번씩 술을 마시거나 밤늦게까지 놀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저녁 놀고 나면 최소 하루 이틀 앓게 된다는 걸 알지만, 그 앓는 시간까지 계획에 넣고 놀러 나간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잔뜩 만나 왁자하게 노는, 일상을 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내가 온전히 건강해지면 그때, 그러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를 위해 모든 걸 유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 비해 몸이 상당히 호전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나는(그리고 아픈 이들의 상당수는) 여러 노력 끝에, 건강왕국 시민들의 일상과 비슷한 삶을 가끔 산다. 하지만 내가 긴 시간동안 크게 지친 기색 없이 회의에 참여하거나, 늦은 밤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어떤 이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제 다 나은 거 아닌지, 혹은 꾀병이란 뜻은 아니지만 아프다는 것에 과도하게 예민한 건 아닌지 말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아픈 몸에 대한 무지, 재단(裁斷), 의구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아픈 몸 뿐만은 아니다. 소수자의 몸은 다 그렇다. 늘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설명이 필요 없다면, 이미 소수자에 속하지도 않는다. (남성, 비장애인, 건강한 몸과 달리 여성, 장애인, 아픈 몸은 늘 설명을 필요로 한다.)
‘다양한 몸’들이 사는 세계
최근 내가 마주한 무지는 이런 거였다. 지인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녁 회의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1시간 동안 버스에서 서있을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잠시 쉬면서 체력을 충전하고 싶은데 카페는 시끄럽고, 의자도 좁다. 그럴 때, 나는 길 찾기 어플을 열고 그 근처 가장 가까운 목욕탕을 찾아 간다. 가볍게 샤워를 한 뒤, 30분쯤 누워서 쉬다가 나온다.
▶ 지하철 모유 수유방과 전동휠체어 충전기 ⓒ반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생각한 게 있다. 지하철역에 모유 수유실이 있듯, 전동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급속충전기가 있듯, 체력이 약한 이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쉼터 같은 게 있다면 어떨까. 대학 때 사용했던, 여학생 휴게실처럼 간이침대가 놓여 있는 안전한 공간. 그러면 나처럼 아파서 체력이 약한 이들 뿐 아니라, 월경통으로 잠시 휴식이 필요한 사람, 노인 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내 말에 지인도 맞장구치며, 그 쉼터에 딸린 화장실 칸 안엔 세면대도 있어서 월경컵 좀 편하게 씻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이가 ‘그렇게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왜 돌아 다녀, 집에 있어야지’ 라고 말했다. 그 말에 굳어지는 내 표정을 읽었던지, ‘그게 본인에게도 안전한 일이고…’ 라며 말을 흐렸다. 익숙한 말이다. ‘휠체어 타고 버스는 왜 타, 집에 있지’, 네가 고생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야. ‘애기 데리고 복잡한 식당에 왜 와, 집에 있지’, 애가 힘들어 하니까 하는 말이야, ‘노인인데 왜 시내까지 나와, 집에 있지’, 어르신이 지칠까봐 하는 말이야.
무지가 만든 폭력적인 말이 지겹다. 하지만 이럴수록 아픈 몸이 사는 세계에 대한 면밀한 설명이 더욱 절실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설명, ‘이런 몸’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처럼 우리도 여전히 계속 되는 생(生) 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 다양한 몸들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더욱 시끄럽게 떠드는 게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집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이런 몸’도 있음을 세상이 인정하게 되고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질병이 있든 없든, 장애가 있든 없든, 애기가 있든 없든, 노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각자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어디에 어떻게 머물지는 우리가 정할께. 우리가 어떻게 살지, 너에게 승인을 구한 적 없음을 잊지 마!’
앞서 말했듯 누구나 결국은 아프게 되고,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몸이 사는 세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몸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건, 언젠가 자신의 미래가 될 그 몸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다양한 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현재 ‘정상’의 몸들에게도 자신의 몸을 더욱 편안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일이다. (반다) feminist journal 일다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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