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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죽음’

<반다의 질병 관통기> 죽어가는 과정을 온전히 살 수 있길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이유

 

이른 아침, 이슬 흔적이 확연히 남아 있는 텃밭. 습한 느낌이 오히려 청량감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확연한 흙냄새와 오이순을 지를 때마다 피어나는 풋내음이 숨 쉬는 게 기분 좋은 일임을 확인시켜준다. 들풀을 뽑고, 몇 가지 씨앗을 추가로 심은 뒤, 텃밭의 숨길과 물길이 잘 흐르도록 가벼운 호미질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텃밭에서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시 눕는다.

 

그제서야 여기저기 가벼운 뻐근함이 감지되고, 몸의 모든 뼈와 근육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바닥에 의존해 더 없이 편안해 한다. 바닥이 몸의 무게감을 온전히 다 받아주는 든든한 느낌, 그 바닥 위에서 느끼는 안온함. 이런 순간, 한 번씩 죽음을 떠올린다. 나의 죽음이 이렇게 안온한 느낌일 수 있을까. 죽음이 내 삶의 모든 기억과 상처를 충분히 감싸주고, 플라톤의 말처럼 ‘꿈이 없는 쾌적한 잠’ 속으로 들어가게 해줄까?

 

▶ 언제나 맞닿아 있는 삶과 죽음  ⓒ이미지 제작: 조짱

 

이따금 이렇게 죽음이 어떤 느낌일지, 어떤 태도로 죽음을 맞이할지에 대한 상상을 한다. 예전에는 나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없던 습관이 생긴 건 질병을 만난 이후다. 그러니까 몇 해 전 느닷없이 질병이 찾아왔을 때, 꽤 긴 시간을 혼란과 의문과 분노로 힘들게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젊은 내게도 질병이 찾아 올 수 있음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봤더라면, 질병이 내 인생 계획을 쓸모없게 만들고 일상을 헤집어 놓을 수 있음을 한번이라도 예상해봤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힘들어서 자주 우울해하고 낙담했던 그 시간을 다르게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나의 죽음에 대해, 한 번씩 떠올려 보곤 한다. 죽음이 근거리에서 나를 찾게 될 때, 또 다시 혼란과 의문과 분노를 겪느라 너무 긴 시간을 소모하거나, 삶에 대한 애정과 후회로 죽어가는 과정을 채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나의 신념과 방식대로 꾸려나갔듯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다르듯 죽음도 그렇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텅 빈 형태로 주어지고, 각자가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이 있다고 본다. 죽음도 삶처럼, 계획한다고 해서 그 방향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죽음에 대해, 삶처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할 때, 죽음이 삶의 단절이 아닌 마무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토마토 같은 죽음, 무 같은 죽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죽음을 떠올려 보는 게 그리 쉽진 않다.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너무 멀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는 게 분명한데, 현대사회는 죽음이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외면하는 문화이고, 나 또한 죽음을 내 삶에서 외면하는 정서가 깊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죽음이 언젠가 내 삶에 등장한다는 건 알지만, 외면할 수 있을 때까지 외면하고 싶은, 비극적이고 두려운 이벤트처럼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죽음을 상상하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죽은 듯 뒷방에 방치돼 있던 죽음을 일상에서 조금씩 호출해 보고 있다.

 

죽음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던 초기엔, 죽음이 ‘폐기처분’이나 ‘절망’ 같은 단어와 함께 떠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다수의 도시인들이 그렇듯, 도시에서 경험하는 죽음은 고장 난 모니터나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처럼 쓸모없어짐이나 폐기처분의 경험을 벗어나기 어렵다. 나의 죽음을 떠올리는 태도나 상상력도 그 범위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는 말은 책 속 문장에 불과했고, 죽음을 떠올릴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은 대체로 불쾌하고 축축한 무엇이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조금씩 변화할 수 있었는데, 가장 큰 계기는 텃밭을 통해 작물들의 생과 사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면서였다.

 

▶ 매해 생과 사를 목격하게 해주는 텃밭.  ⓒ반다

 

이를테면 토마토는 봄에 씨앗을 틔우는데, 초기 성장을 지나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지를 뻗는다. 그러다 여름이 가까이 오면 날마다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맺고, 한여름이 꺾이고 조금씩 온도가 내려가면 나무가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가지가 앙상해지면 나무를 뽑아 텃밭 바깥에 모아둔다. 비온 뒤 텃밭에 가보면, 지렁이, 배추벌레 같은 것들이 뽑혀진 토마토 나무 밑에 잔뜩 붙어 있다. 그들의 먹이가 되는 중이다. 그리고 반년쯤 지나면, 그 토마토 나무가 흔적도 없이 흙에 섞여 들어가 버린 걸 보게 된다. 그렇게 토마토는 죽었다,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봄, 토마토가 살았던 자리에 심지도 않은 토마토 순이 여러 개 올라와 있는 걸 보기도 한다. 지난여름 떨어졌던 씨앗이 겨우내 추위를 견디고 봄이 오자 싹을 올린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텃밭을 처음 하던 한두 해는 무심히 넘겼는데, 반복해서 보다보니 감탄이 나왔다. 아, 이런 게 순환이구나. 죽음이고, 태어남이구나! 생명의 순환을 경험할 일이 적은 도시사람들이 농촌사람들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음을 새삼 확인했던 순간이다.

 

텃밭에서 다양한 작물의 죽음을 관찰하다 보니, 닮고 싶은 죽음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닮고 싶은 건, 무의 죽음이다. 무는 씨앗을 뿌리고, 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일부는 솎아서 새싹 비빔밥을 해먹는다. 좀더 자라면 다시 한 번 솎아서 샐러드를 해먹고, 제법 굵은 무청이 올라오면 한 번씩 솎아내 살짝 데쳐 나물을 해먹는다. 그리고 무가 완전히 자라면 통째로 뽑아 수확한다. 무는 김치를 담그고 무청은 시래기를 만든다. 버릴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의 삶(죽음)은 토마토처럼 열매를 수확하고도 나무가 남아 있는 삶보다는, 무처럼 아무것도 남김없이 살아버리는 삶(죽음)이면 좋겠다.

 

# 일상에서 죽음을 더 많이 살아볼 수 있길

 

이렇게 닮고 싶은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게 흥미롭다. 현재 내 삶의 욕구와 불안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매 시기마다 이상적인 죽음이 조금씩 변화하는데, 요즘 생각하는 죽음은 이런 모습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편안한 모습으로 죽음을 관조할 힘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약간은 도인(?)처럼 초탈한 모습으로, 들이 쉬는 것도 숨이고 내쉬는 것도 숨이듯, 태어나는 것도 삶이고 죽는 것도 삶이라는 태도를 지니고 싶다. 그래야 죽음 앞에서 많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지막 숨을 천천히 음미하며 죽음을 생생히 느끼고 싶다.

 

▶ 해피데스 데이를 맞을 수 있기를.   ⓒ이미지 제작: 조짱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이 더 있는데, 위와 같은 태도 위에 명랑함이 덧대지는 것이다. 죽음과 명랑함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이지만, 나는 평소 명랑하고 유머러스하기 어려운 사람이어서 인지, 죽을 때만큼은 명랑했으면 하는 ‘로망’이 있다. 일본 천재 애니메이션 감독 곤 사토시처럼 말이다. 그는 겨우 사십대에, 췌장암으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유언장을 썼는데, 나는 그의 작품만큼 그 유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몇 줄만 소개해 보자면, 그는 스탭들에게 수년 동안 함께 작업한 작품 <꿈꾸는 기계>를 마무리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전하며 “암이니까 좀 봐줘!”라고 말하고. 암 말기 환자로서 사경을 헤매던 환각 상태를 묘사하면서 “내 환각은 개성도 없구만!”이라며 웃고. 생에서 함께 했던 많은 인연에 감사해하며 “그럼 먼저 갑니다!”로 유언장을 마무리한다.

 

나도 죽음이 목전에 왔을 때 여유롭게 이 정도의 말을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무처럼 남김없이 살진 못했지만, 토마토 같은 삶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는 충분히 다 자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지만, 토마토는 다 익으면 가지에서 떨어집니다. 떠날 때를 알고, 적극적으로 생의 위치를 이동합니다. 나는 지금이 떠날 때입니다. 명랑하게 죽음으로 출발합니다, 안녕!”

 

죽어가는 과정을 온전히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일상에서 죽음을 더 많이 살아볼 수 있길 바란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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