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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_내_성폭력 한 사람의 동료도 더 잃을 수 없다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 영화판에서 페미니스트 찾기②



나는 요즘 계속 화가 나있다.

 

지난 10월 중순, 내가 시나리오 작가 및 스크립터로 참여한 영화 <걷기왕>이 개봉했다. 나는 영화 홍보를 위해 트위터에 <걷기왕> 프로덕션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다는 글과 함께, 성희롱 예방지침이 실린 콘티북 사진을 올렸다. [관련 기사: 영화감독이 아닌 ‘어린 여성’으로 불릴 때]

 

▶ 영화 촬영 개시 전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여러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출처: 씨네21 트위터


그보다 조금 앞서 트위터에는 ‘#오타쿠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가 올라왔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각계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용기 있는 목소리가 ‘#OO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퍼져나갔다. 그중에는 ‘#영화계_내_성폭력’도 있었다. 트위터에 올라오는 피해자들의 고백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계에서 뿐만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이 살면서 겪었던 성폭력 경험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났고, 마음이 아팠고,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영화 프로덕션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다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이슈가 되면서 내게도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갑자기 주목받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성실히 응했다. 모든 영화 촬영장은 촬영 개시 전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이런 나라도 목소리를 보태면 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될까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 인터뷰에 힘이 난다고 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나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참여하는 프로덕션에서도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는 분과 부당한 성차별에 굴하지 않겠다는 분도 있었다. 친구와 동료들,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들로부터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성폭력 경험을 말해달라’는 언론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강해지는 기분과 소비당하는 기분이 함께 들었다. 나는 성희롱 예방교육에 대해서만 말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많은 인터뷰어들이 나에게 성폭력 경험을 말할 것을 요구했다. 성폭력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을 스스로 재구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피해상황을 다시 떠올려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상대와 나 자신에게 설명하는 일인 것이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온신경이 곤두섰다.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적 있었나 싶다. 내가 내뱉은 말이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계속 검열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떻게 표현할지,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다른 사람의 피해 사실을 내가 말해도 될지, 피해 사실을 서사화 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와 내 친구들의 경험이 ‘이야기’로 소비될까 우려하면서도, 동시에 이 이슈가 많은 이의 주목을 끌어 해결되길 바랐다. 그래서 말하기를 계속 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사람으로서 윤리를 고민하는 동안, 어떤 인터뷰어들은 듣는 사람으로서 윤리를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성폭력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할 때가 그랬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몇 살 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작품명은 무엇인지’, ‘그 때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 ‘저항하지 못했다면 왜 못했는지’ 물었다. “그래서 그 가해자는 누구예요?” 라며 분노하는 척 하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내가 용기 내서 말해야 하는 경험이 듣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들이 관객처럼 보였다.

 

피해의 정도에 따라 내 말의 무게가 평가될 것 같았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상품화하는 것 같았고, 정말로 심각한 일인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만한지 나도 모르게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봐 겁이 났다. 소비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소비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이 문제를 설명할 언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성실히 답해야 하는 것인지, 그러면 정말 나와 내 친구들과 동료들과 어디선가 외로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피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물론 이번 일을 통해서 만연한 성폭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영화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모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 소개글 중에서

 

침묵하고 방관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평소 정권이나 부당한 사안에 대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이 이슈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도 굉장히 이상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와 방관자가 없었다. 이 침묵의 카르텔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정부분 가해자 혹은 방관자의 동조 때문인데도, 다들 제3자처럼 문제와 선을 긋고 심각성을 바라봤다. 그렇기 때문에 반성을 하는 이도, 해결 주체도 없었다. 모두가 이 이슈에 대해 떠들면서도 모두가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해자와 시스템은 소거되고 피해자만 남을까봐 두려웠다.

 

나는 용기내서 고발한 피해자들이 이 공동체에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주변의 남성 작업자들에게 발언함으로써 연대해줄 것을 요청했다. 누군가는 요청에 응답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조심스러워했다. 아마 본인이 가해자 혹은 방관자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먼저 고백하려 한다. 지난 글에서 나는 ‘나는 너무 많은 침묵하는 사람들을 봐왔고,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방관자가 되어 침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라는 문장을 썼다. 하지만 정말 부끄럽게도 사실 나는 때때로 방관자였다. 가해자가 무서웠고, 이 공동체가 문제제기 하는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한 적이 많았고, 침묵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처럼 폭력에 침묵하고 싶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신뢰를 주고 싶다.

 

▶ 페이스북 그룹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 메인 화면 

 

페미니스트 영화인 선언 #나는_찍는페미다

 

앞서 나는 요즘 계속 화가 나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분노를 변화의 동력으로 삼을 것이며 쉽게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해자들이 바라는 것이므로. 나는 성폭력 이슈에 누가 침묵하는지 보았지만, 침묵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만났다. 대표적인 곳이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인 ‘찍는 페미’다.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만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이 그룹은 침묵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침묵해도 설치고 떠들고 나대고 있다.

 

‘말하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 차별과 폭력이 존재함을 드러내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이 ‘말하기’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 없이는 어렵다. 피해자의 ‘말하기’를 진정으로 듣는 이들은 피해자들의 말에 공명하고 그들을 홀로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페미니스트들이다. 우리는 가엾고 상처 입은 피해자 프레임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연대함으로써 더 강해질 것이고 이 모든 부당한 것을 바꿔낼 것이다. 더 이상 한 사람의 동료도 잃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_찍는페미다 

#영화계_내_페미니스트 

#나는_페미니스트영화인이다  (남순아 감독)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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