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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죽으면 안돼, 나랑 같이 살아야 돼”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6. 할머니의 먼 집



※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엄마는 할머니를 보러 화순에 가자고 했다

 

2013년 여름, 엄마는 긴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급하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아흔세 살, 아직도 손수 꽃에 물을 주고 풀을 가지런하게 뽑아 마당을 정리하며, 한 집에 사는 큰 외숙의 반찬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동생들은 모두 직장에 다녔지만 나는 백수였기 때문에 엄마와 그 길로 화순으로 향했다.


“오메 우리 강아지 왔네!”

 

할머니는 아침부터 집 앞 도로에 앉아 뙤약볕 아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계신 큰 외숙이 우리가 오후나 되어야 도착한다고 여러 번 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손수 씨암탉을 잡았다.

 

▶ 전남 화순에서 우릴 맞아주신, 아흔 세 살의 할머니.  ⓒ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이소현)

 

그런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하셨단다. 할머니가 수면제를 모으게 된 과정과, 어떻게 병원에서 깨어났는지에 대해 큰 외숙이 알려주셨다. 할머니가 다시 자살을 시도하실까 걱정이 되어 자꾸만 방문을 열어 확인해보게 된다고 하셨다.

 

“니가 얼마나 보고 자왔는지 몰라.”

 

할머니는 그간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봤다는 사진들을 잔뜩 꺼내놓으셨다. 손때 묻은 쌈지 주머니 속에 내 증명사진이며 어릴 적 사진들이 나왔다. 할머니한테 ‘왜 죽으려고 했냐’고 화도 못 냈다. 입을 열면 말보다 먼저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녁 버스로 서울에 돌아왔다. 토익학원에 가야했다. 엄마가 당분간 할머니와 함께 보내겠다고 하셨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아이와 워커홀릭 할머니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내가 죽은 것은 아닐까 가끔 자고 있는 나를 꾹꾹 찔러 깨워보곤 했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나를 키울 형편이 되지 못했고, 할머니는 임종이 가까워진 할아버지를 지키며 나를 업어 키우셨는데, 내가 잠이 많아서 할아버지를 간호하면서도 키울 수 있어 편했다고 하셨다.

 

▶ 할머니와 나.    ⓒ 이소현

 

“꽃예 일어났냐?” 

“꽃예 밥 묵어라.”

 

할머니는 나를 ‘꽃처럼 예쁘다’고 꽃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그렇게 당신이 키운 열세 명의 손주 모두의 이름에 “꽃”자를 넣어 ‘꽃돌아, 꽃순아’ 부르시곤 했다. 어릴 적 나의 불만은 할머니가 잠이 많은 내가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으셨다는 것이었다. 내가 헐레벌떡 일어나 왜 안 깨웠냐고 짜증을 내면 “잠을 저렇게 예쁘게 자는데 어떻게 깨우냐” 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할 말을 잃기도 했다.

 

엄마는 한시도 쉬지 않는 할머니를 성가셔하기도 했다. 눈이 잘 안보이던 할머니가 집안 모든 살림을 정리해버리니,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종종 쓰레기통으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엄마는 출근할 때마다 바느질거리를 일부러 만들어 할머니에게 숙제처럼 남겨주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 사이에는 할머니의 이런 부지런함으로 인한 트러블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너무 게을렀고, 그 빈 부분들을 할머니가 모두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제법 컸을 무렵까지 집안일을 하나도 못하게 하셨다. 할머니는 내 방을 청소해주고, 나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정말 좋아하셨다. 그래서 난 스무 살 이전에는 청소도, 빨래도, 밥도 할 줄 몰랐다. 너무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녀 프리미엄을 누리며 나는 후천적으로 게을러졌고, 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전남 화순의 외가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화순으로 가신지 5년 만에 자살을 시도하신 것이다. 취업 준비는 잠시 미룰 수 있지만 지금 이 시간을 미루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해 여름을 할머니 곁에서 보내게 되었다.

 

할머니를 위로하러 화순에 갔지만, 내가 할머니를 위해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할머니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을 청소하고 꽃에 물을 주고 텃밭을 가꾸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여전히 늦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았다. 열 시가 넘어서 눈을 떠보면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고 할머니는 마당의 잔디를 가꾸고 계셨다.

 

“할머니 죽으면 안 돼, 나랑 같이 살아야 돼.”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 할머니를 세뇌시켰다. 그리고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리면 할머니는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걱정하셨다. 나는 할머니 냄새가 너무 좋았다. 백수라 서울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괄시받던 나는 이곳에서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점점 행복해졌다.

 

▶ 화순에 온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점점 행복해졌다.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스틸 컷.  (이소현)

  

할머니와 자주 옥상에 올라갔는데, 옥상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할머니는 이제 화순도 예전 같지 않고 서울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고 자랑하셨다. 그리고 옥상에서 보이는 저 산에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다고 인사를 하셨다.

 

“영감, 나 왔네!”

 

할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하루는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할머니가 다급히 깨우셨다.

“이것 좀 봐라!”

 

할머니 손에는 참새가 한 마리 숨 쉬고 있었다. 할머니는 화장실에 빠진 참새가 죽을까봐 구해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날려주기 전에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가지고 왔단다.

 

할머니는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나도 할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할머니, 나 할머니 사진 찍어도 돼?”

“뭐, 이런 쪼그라진 나빠닥(얼굴)을 사진으로 찍냐, 니나 찍어라.”

 

하고 손사래 치면서도

“가서 이빨(틀니) 가지고 와. 사진 찍을라믄 이빨이 있어야지.”

 

카메라 앞의 주인공이 된 할머니는 무척 신이 나보였다. 나를 동네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이름도 모르는 꽃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저수지를 찍으라고 시키셨다.


▶ 나는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다.    ⓒ이소현 <할머니의 먼 집> 스틸 컷.

 

할머니의 시계

 

할머니가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시다가, 본인의 고장 난 시계 두 개를 발견하셨다. 나는 그 시계를 고치러 갔다가 안이 녹이 슬어 이제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반짝 반짝 빛나는 새 시계를 사서 할머니께 선물했다.

 

외숙은 눈도 안 보이는 양반에게 웬 시계를 사줬냐며, 마음은 알겠지만 괜한 곳에 돈을 썼다고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시계를 받더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라 하나님이 나를 안 데리고 가는 것 같다. 더 살아도 되겠제?” 하셨다.

 

할머니가 시계를 볼 때마다 피식피식 웃으시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3만 원짜리 시계였다.

 

이후에 외숙이 딸인 사촌언니에게 전화를 걸며 시계가 갖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사촌언니는 핸드폰도 있는데 시계가 뭐에 필요하냐며 시계를 사오지 않았고,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숙도 시계가 갖고 싶으셨던 것이다.

 

모두의 삶에는 시계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자나 깨나 시계를 차고 다니시며 보는 사람마다 손주가 사줬다고 자랑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난 더 이상 할머니가 죽음을 열망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였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일까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카메라의 레코드 버튼을 누르기에 바빴다. 나머지는 할머니께서 알아서 부지런히 해주시리라고 또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에 그다지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느끼는 죽음은 일상의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30여년이 지났고, 동네에 친구라고는 한 분 빼고 모두 돌아가셨다.

 

어쩌면 오늘, 또는 내일이 될지 모르는 그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기가 힘드셨던 것일까?

이제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느끼셨던 것일까?

할머니가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일까?


▶ 이소현 감독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2015) 스틸 컷.

 

하루는 옷이 너무 허름하니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보물 상자에서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한복을 꺼내왔다.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입고 거울을 보시더니 활짝 웃으셨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할머니! 시집가도 되겠어.”

 

할머니는 그간 내가 궁금해왔던 것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셨다.

 

“저승으로 시집 갈란다.”  (이소현)


※ 이소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2015)은 9월 말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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