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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와중에도 타인을 돌봐야 하는 여성들
<반다의 질병 관통기> 성별화된 돌봄 노동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아픈 와중에도 타인을 돌봐야 하는 여성들
“학원 끝나면, 밥 꼭 챙겨 먹고 숙제 미루지 마”
“여보, 넥타이랑 와이셔츠는 순서대로 걸어놨어. 아침에 녹즙 먹는 거 잊지 마”
입원실 옆 침대 위 그녀는 내내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아이에 이어서 남편, 그리고 아이 학원 선생에게로 계속 이어지는 통화들. 휴대폰은 쉴 틈이 없었고, 그녀도 쉴 틈이 없었다.
그녀는 유방암 초기 환자였고, 다음 날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통화가 시끄러워 미안했다며, 여자들은 아프면 더 바빠진다고 했다. 그리고 초기 유방암 수술은 가벼운 거라 수술 직후 거동도 불편하지 않다고, 그래서 옆에서 돌봐 줄 보호자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내일은 친언니가 월차를 내고 와주기로 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열심히 했다.
신도시 아파트에 산다는 그녀는 바쁜 남편이 퇴근해서 서울 도심 병원까지 오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다음 날 출근하기도 피곤할 거라는 설명을 했다. 간병인을 쓸까했지만 수술 후 크게 손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간병인을 쓰기엔 부담 된다고. 아무리 돈이 있어도 여자들은 결혼하면 자기를 위해 돈 쓰기 어렵다고. 자신은 사치스러운 여자는 아니라는 말도 했다.
그녀의 쏟아지는 말들. 나는 수술을 앞둔 이의 불안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말들을 듣는 데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지만, 그녀의 침대와 내 침대를 분리하는 커튼을 칠 수 없었다. 나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달까. 그리고 궁금해졌다. 만약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 암 수술을 앞둔 상태라면 어땠을까?
그녀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병원까지 오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암 수술을 앞둔 남편을 혼자 뒀을까. 남편의 수술 당일에도 직장 일이 바쁘다며 퇴근 후에나 겨우 얼굴을 내밀었을까. 남편의 간병을 시집 식구 누군가에게 맡겼을까. 환자인 남편을 위해 간병인을 쓰는 게 돈이 아깝다 여겼을까.
그리고 만약 그녀가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암 수술을 하는 남편을 간병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어땠을까? 그러니까 시집은 물론이고 친정, 친구, 이웃, 회사동료까지 포함해서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프면 누가 돌봐주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산책이라도 하려고, 슬그머니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며 병실마다 보호자 침대에 앉아 있는 이들을 보았다. 여성병실은 물론이고, 남성병실도 대체로 여성들이 앉아 있다. 엄마, 아내, 언니, 딸, 며느리 혹은 여성 간병인.
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에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환자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암 진단 받은 날 정신이 혼미했는데, 남편이 위로는커녕 혼자 나가서 담배만 피더라’, ‘항암 기간에도 제사를 빠짐없이 준비했다, 그 놈의 제사 때문에 암이 재발한 것 같다’, ‘몸은 아픈데, 남편은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고, 집안 꼴은 엉망이라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남편이 간병을 하겠다고 이것저것 해주는데, 도대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 손이 더 불편하더라’, ‘남편이 오래 누워있으면 아내가 골병들고, 아내가 오래 누워있으면 남편이 바람난다’, ‘남편은 큰 아들이고 남자들은 평생 철들기 어렵다’ 등으로 이어지는 신세한탄 속 촌철살인 같은 말들.
▶ 돌봄 노동을 상징하는 이미지 © 제작: 조짱
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한다. 특히 가족 안에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집안 살림을 돌보고, 노인을 돌본다. 사람들에게 편안한 일상이 가능한 건, 보이지 않는 돌봄이 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차려지는 밥상, 계절에 따라 정리되는 옷장, 아플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 아이 교육법을 선택하는 고민, 나이든 부모에게 영양제를 건네는 다정함까지.
그런데 그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이 아플 수 있다. 아프다는 건 누군가의 돌봄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그런데 그 돌봄 노동을 하던 여성이 아프면, 그 여성은 누구로부터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몸이 아픈 와중에도 타인을 돌보는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돌봄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는 남성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타인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돌봄이란 감정 노동을 동반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요즘엔 돌봄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덕목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돌봄 노동은 성별화 되어 여성에게만 갇힌 채 순환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방적인 돌봄 노동 과정을 통해 여성들은 숨이 턱에 찬다. 핵가족화로 돌봄 노동을 나눌 수 있는 다른 여성이 없고, 많은 남성들은 돌봄을 잘 수행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여성이 아프게 되면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아픈 와중에 남성이나 아이 등 다른 가족을 돌보는 노동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리고 남성은 돌봄 노동에 무능한 존재로 노인이 되어도 '철들지 않는 아들'로 남아 있게 된다.
사회엔 여전히 돌봄은 남성답지 못한 행위라는 분위기가 있다. 남성들은 돌봄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근대에 들어 여성들은 임금노동 시장에 꾸준히 진출해 왔지만, 여전히 남성들은 돌봄 영역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나마 돌봄의 가치를 이해하고 노력하는 남성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여성성의 일부로 돌봄을 훈육 받은 여성들과 달리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남성들은 돌봄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그런 남성들의 돌봄의 손길에는 ‘더 걸리적거릴 뿐’이라는 평가가 붙기 쉽다.
공공적 성격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가상의 보험 광고 이미지. © 제작: 조짱
여성들이 아픈 와중에도 돌봄을 받기는커녕 타인에 대한 돌봄 노동을 멈출 수 없는 건, 돌봄 노동을 할 줄 모르는 많은 남성들 때문만은 아니다. 돌봄 노동이 여전히 가족의 몫으로만 남아 있고,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현실도 존재한다.
근래에 부쩍 돌봄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병인, 가사도우미, 베이비시터 등의 직업이 늘어났다. 하지만 해당 직업을 가진 이들은 노동에 비해 저임금을 받는데, 막상 그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하기엔 이용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적지 않다.
나는 다양한 돌봄 노동 서비스를 공공적 성격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어린이집 보육료를 지원한다든지, 노인 장기요양보험으로 요양보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듯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느린 사회 정책 변화를 기다리는 사이 질병 산업의 핵심인 보험 시장에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보험 광고를 보면 ‘가장’을 타깃으로 한 보험상품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된 내용은 가장이 사망할 경우 가족에게 매달 생활비와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비를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그럼 집안에서 돌봄 노동을 수행하던 이가 아플 때를 대비한 보험이 있다면 어떨까?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간병인 등 돌봄 노동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그 비용을 전액 지급 해주는 상품 같은 것. 이런 보험이 개발돼서 판매된다면 사회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실제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인정이 이뤄지는 데 상징적인 도움이 될 것 같다.
질병을 경험한다는 건, 의료적 치료 이외에도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치료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 질병과 생활 관리에 대한 정보, 다양한 의료를 선택할 수 있는 관점, 그리고 정서적 육체적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질병 경험은 복합적인 필요가 펼쳐지는 장이다.
특히 일상적 돌봄은 질병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의료적 치료에 맞먹을 만큼 아픈 이에게 절대적이다. 의료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해서 질병이 완화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 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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