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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자
<반다의 질병 관통기> 건강하다는 건 어떤 상태일까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2016 <하늘을 나는 교실> 겨울 학기 “질병과 함께 춤을!” 강좌를 통해 작가와 직접 만나보세요! http://bit.ly/1YcipVv
“올해는 더 건강하세요.”
새해 인사로 받은 문자 메시지. 친한 지인들이 보낸 인사에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낸 문자에도 건강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어느 쪽에서 보내 온 것이든 꼭 내 마음이다. 올해엔 좀 더 건강해 지고 싶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많이 좋아지기도 했고, 더 이상 투병하는 삶에 갇히고 싶지 않아서 부분적이지만 사회 복귀를 했다. 그랬더니 건강에 대한 염려의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취약한 몸으로 사람들의 배려 속에서 사회 활동을 하다 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미안하지만, 회의가 너무 길어지는데 좀 쉬었다가 계속하는 게 어떨까요’, ‘미안하지만, 저녁에 회의를 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이번 주에 일정을 더 잡긴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강 상태가 되면 좋겠다. 그런데 그럴 수 있으려면 얼마큼 건강해야 하는 걸까. 나는 얼마큼 건강해져야 이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건강하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우리는 얼마큼 건강해야 하는 걸까?
지난 연말 지인들과의 송년회 자리에서 건강하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모아진 결론은 두 가지 정도였는데, 첫 번째는 사회 활동을 하는데 무리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지인들은 다들 사회생활에 무리가 없을 만큼 꽤 건강한 줄 알았는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많이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기 너무 힘들다거나, 주말 내내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다들 자신의 건강이 부족한 걸 자책하며, 건강을 보충할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나눴다.
내 지인들은 대부분 하루 최소 8시간에서 10시간 혹은 12시간씩 일한다. 자신의 일터가 기업이든 사회단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다들 긴 노동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한국이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국가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들이 특별한 건 아닐 것 같다. 어쨌거나 그런 노동시간을 고려했을 때, 이들이 호소하는 풀리지 않는 피로감은 개인의 건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오히려 나는 하루 8시간 기본 노동 이외에 야근이나 회식을 하고도 다음날 너끈히 일어나 다시 종일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요구하는 사회가 더 이상해 보인다. 그 건강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불안해하는 게 정말 자연스러운 일인 건지. 건강에 대한 사회적 요구치와 현실적 몸의 간극을 피로회복제와 녹즙 등으로 채우며 살아가는 삶이 언제까지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이 사회가 말하는 건강의 기준을 의심하게 됐다.
▲ OECD 회원국의 노동시간 그래프(2015). 한국이 압도적이다. © 이미지 제작: 조짱
건강하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두 번째 의견은 질병이 없는 상태라는 거였다. 그런데 질병이 없는 완벽한 몸이란 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상태인건지, 그리고 무엇보다 질병의 기준과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모호했다.
이를테면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은 몸이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자정 작용을 하는 것이고, 그런 자정작용이 부지런히 일어나는 건 그만큼 몸이 건강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열이 나는 것 자체를 질병으로 보고 해열제를 먹을 수도 있지만, 몸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고 적절히 앓을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평균대 위를 걸을 때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며 걸어가게 것과 같다. 우리 몸이라는 것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변화하고 흐르는 존재로서,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아픈 과정 즉, 자정작용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매 순간 여기저기가 조금씩 아프다. 열이 나거나, 뻐근하거나, 설사를 하는 등 일시적 증세 혹은 질병을 겪으며 살아간다. 게다가 우리 현대인들은 만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염, 아토피, 만성적 어깨결림 같은 근골격계 질환 등을 ‘개성’처럼 몸에 하나쯤 달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모든 현대인은 건강하지 않다고 정의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념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과 척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을 때, 너무 넓은 개념은 변별력이 없어 무용해진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플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높은 건강 기준을 요구받는 걸 당연시 하거나, 스스로 질병이 없는 완벽한 무균질의 몸이 가능한 것처럼 상정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게으름과 관리 부족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안고 송년회 자리를 일어섰다.
건강하다는 기준도 사회가 구성한다
▲ [몸의 날씨] © 이미지 제작: 조짱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스웨덴에서 6시간 근무제가 확산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런 사회라면 강도 높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내 몸을 사람들에게 덜 미안해하며 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건강하다는 기준은 한국과 다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건강하다는 게 사회 활동에 무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거라면, 혈액이나 세포 수치 등으로만 정의될 수 없는 것 같다. 건강하다는 건 생물학적 실체 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을 포함해서 다시 합의되고 정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마치 계단 옆에 경사로가 설치됨으로써, 휠체어 장애인의 삶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게 필연인 게 아니라, 다른 조건을 필요로 하는 특성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건강 또한 사회적 조건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고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얼마큼 건강해져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얼마큼 건강해야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만약에 정말 사회와 문화에 따라 건강하다는 상태에 대한 규정이 달라질 수 있는 거라면, 내 삶에 필요한 건강은 어느 정도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한 상태를 선호하는 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착각처럼, 무조건 더 건강한 몸을 가져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나 또한 내 몸이 닿을 수 없는, 어쩌면 닿을 필요도 없는 허구적인 건강 기준을 상정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약한 몸으로 태어났든 중증 질환으로 취약한 몸을 갖게 됐든 간에 각자 다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구성해 놓은 소위 ‘표준 건강’이 자신의 건강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는 결핍감에 시달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건 아닐까? 의사들 눈에는 내 몸은 비정상이고, 이 사회에서 내 몸은 표준에 못 미치는 몸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 이 몸은 어쩌면 가장 정상인 건지도 모른다. ▣ 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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