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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간호사의 노동 강도는 유럽의 약 3.5배
임신순번제, 밤샘근무…간호사, 전공의들의 실태
임신순번제. 병원에서 간호사 여럿이 한꺼번에 임신을 하면 업무에 차질을 빚는다는 이유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임신하는 것을 뜻한다. 몇 해 전 간호사들의 이러한 노동 현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들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여성전공의 등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고용 차별을 겪고 있으며 임신, 출산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통해 실시한 <보건의료 분야 여성종사자 모성보호 등 인권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조사에선 종합병원과 상급종합병원(중증질환에 대한 의료 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료기관) 소속 977명의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53명의 여성전공의를 대상으로 설문이 진행됐다. 또 간호사 44명과 여성전공의 11명에 대한 면접 조사도 실시됐다.
‘못 생겨서’ 입사 못 했어요
“토익 만점에 중국어까지 했던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한데, 대형병원 입사를 못 했어요. 정말로 ‘못 생겨서’ 단지 그 하나의 이유로.” (간호사 A)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에게 ‘채용 시 키, 몸무게, 외모 등 신체적 조건이 영향을 끼치는지’ 묻는 질문에 놀랍게도 응답자의 55.3%가 ‘그렇다’고 했다. ‘채용 시 미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응답자도 전체의 58.3%를 차지했다.
대다수가 여성이어서 간호사 직종 안에서의 성차별은 드물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 유무나 외모 등을 이유로 고용 차별을 겪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업무와 관련이 없는데도 소위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접대’를 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에 이사장이 ‘외부 손님이 온다’, ‘협력업체가 온다’고 하면, 양 옆에 유닛 매니저들 수간호사들이랑 함께 또 얼굴 이쁜 애들만 데리고 가요. 이쁘고 마른 애들만 오프를 일부러 줘서 데리고 가는 거죠. 양 옆에 무슨 정말 일렬로 죽 서가지고. 오면은 뭐 그 ‘솔’톤으로 꼭 ‘어서 오십시오’ 인사하게끔 하고.” (간호사 B)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결혼 유무나 외모 등을 이유로 고용 차별을 겪고 있다. © 일다
“애를 지우든지 나가든지 해라”
임신순번제 또한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료나 선후배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자유로이 임신을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응답자의 39.5%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면접 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나왔다.
“간호사 한 분이 인력도 부족한데 연년생으로 아기를 낳았대요. 그랬더니 ‘쟤는 양심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이런 식으로 엄청 눈총 받았다고.” (간호사 C)
“네가 지금 여기서 애를 가지면 너 근무 안 나오니까 네가 애를 지우든지 나가든지 하나 해라. 그래서 결국에는 낙태했다는 게 있어요.” (간호사 D)
조사에 참여한 이상윤 녹색병원 과장은 “이렇게 임신 시기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행복추구권과 인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외부의 압력보다 간호사 개개인의 주관적, 심리적 압박감이 더 커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
이상윤 과장은 “모성보호와 관련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거나,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비난 받는 가운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간호사들은 임신, 출산에 친화적이지 않은 문화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는 임신 중에도 야간근로나 초과근로를 하는 경우가 많고, 출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조건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서를 쓰게 했어요. 임신을 하면은 간호부에 가서 나이트(밤샘 근무)를 한다, 나는. 그런데 애한테 무슨 문제가 생겨도 병원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나의 문제다, 병원의 책임이 아니다.” (간호사 E)
“연차가 낮은데 임신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워낙 수술이 방사선을 쏘여가면서 하는 수술이 많은데, 연차가 적으면 그걸 좀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요. 임심을 했는데도 방사선이 많이 나오는 수술실에서 일해야 하는 거죠.” (간호사 F)
간호인력 부족 국가 한국의 의료 실태
지난 19일 열린 <보건의료 분야 여성종사자 모성보호 등 인권실태조사> 결과 발표 및 토론회에서는 병원 현장에서 모성보호 법조항이 무색해 지는 이유는 ‘부족한 인력’ 때문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상윤 과장은 “업무량에 비해 간호 인력이 적은 상황에서는 모성보호 관련 조항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때 당시 제 생각은 내가 안 하면 내 동료가 내 것 6개에서 9개를 나눠 가져야 되는 상황이니까 저는 (나이트)안 한다는 얘기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과장님이 부르는데 ‘할 거니, 안 할 거니?’ 이렇게 물어보시는데, ‘해요’ 서명하고 나왔죠.” (간호사 G)
김영애 대한간호협회 서울시 중소병원 간호부서장회장은 “현재 의료기관 대부분이 의료인 정원 기준(간호사 1명 당 환자 13명)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OECD Health Data 2014에 의하면 한국은 간호사 부족 국가다. 임상 간호사 수는 인구 1천 명당 4.8명으로 OECD 평균(9.3명)의 절반 수준이다. 이 수치는 간호조무사까지 포함된 것이다. 또 국가별 간호인력 당 환자 수를 보면 유럽 주요 10개국에서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는 평균 8.8명인데 비해 한국은 31명이다. 한국 간호사의 노동 강도는 유럽의 약 3.5배에 달하는 것이다.”
많은 업무량, 인력 부족, 견디기 힘든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는 이직과 퇴직의 반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김영애 회장은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고, 간호 간병 통합서비스 제도가 도입되어서 간호사 수요는 날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간호 인력을 충원하려는 정부 정책이 아예 없다”고 말했다.
고용차별, 권리침해…‘여성전공의’ 더 심각해
그런데 이번 조사 결과, 여성전공의의 경우 성차별이나 모성보호 권리 침해 수준이 훨씬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문 대상인 153명의 여성전공의 중에서 77.8%가 ‘채용 시 미혼 선호 경향이 있다’고 답했다. 또 53.0%가 ‘여성이기 때문에 교육 훈련, 배치, 승진, 승급상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드러내놓고 남자 전공의를 찾고, ‘우리 과는 딱히 남녀차별은 안 하지만 여자를 받은 적은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과들도 굉장히 많았고…” (여성전공의 S)
“(교수님이) 처음 보자마자 되게 싫어하셨고, 그 다음에 수술 방에서도, 물론 트랩션할 때도 남자선생님보다 힘이 달리긴 하겠죠. 그러니까 막 소리 지르면서 저쪽 한 쪽 가서 서 있으라고.” (여성전공의 T)
여성전공의 응답자의 71.4%가 ‘원하는 시기에 임신을 하기 어렵다’고 답했으며, 76.4%는 ‘임신 중에도 야간근로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임신했다고 근무 시간을 줄여주거나 좀더 수월한 분야로 옮기는 건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힘들다.
간호사의 경우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분위기이지만, 여성전공의에게 육아휴직이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들다. 출산휴가마저 90일 전부를 쓰지 못하고 출산 직전까지 일하다가 애를 낳고 60일 정도만 쉬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인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전공의 업무는 많은데 수는 부족하다보니, 임신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가해지거나 출산휴가를 쓰는 여성을 비난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
이상윤 녹색병원 과장은 “여성전공의의 노동 조건 문제는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수련 하는 교육생 위치이기도 해서 ‘수련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4~5년만 버텨서 의사가 되면 사회적 지위가 괜찮다보니까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어서 권리 침해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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