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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모르지”

<내 목소리를 들어라> 3탄. 영자의 이야기



성매매를 하는, 그 중에서 성을 파는 사람은 젊고 화려한 20-30대 여성으로 상상된다. 하지만 성매매 현장에는 언제나 노년의 여성들이 있었다. 수십 년 세월을 “가정동네”가 아닌 “이런 거 하는 동네”에서 흘려 보냈음에도, 이들의 경험은 성매매 논의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의 활동가들은 60-70대의, 성판매를 하고 있거나 쉬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을 만났다. 이분들은 서로 다른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고 생활해왔다. 세분께 당신들의 일과 삶, 그리고 동네 이야기를 청했다. 이 기록들이 노년의 성판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66세의 영자(가명) 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자 언니는 처음에, 어떻게 집결지에 오셨어요?

 

“결혼해서 딸들 낳고. 그때부터 애들 아빠는 바람이 나서, 기어나가 오락가락 더부살이하다가. 애들이랑 같이 살 방을 얻어놔야 뭐라도 하겠구나 싶었어. 농사 끝나야 누구라도 아기를 봐주니까, 농사철 끝난 그 해 겨울에 OO집결지(술 판매 없이 성매매만 이루어지는 업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어갔어. 잘 들어갔잖아, 그 해에. 거길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서 그래도.(웃음) 야, 내가 산속에서 땅만 파고 살아서 굉장히 멍청하니 했는데, 그런 건 용감했던 것 같아. 거기 아니면 애들 데리고 못 살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애들 못 길러요, 봐줄 사람이 없으니 낮에 식당은 못 나가잖아. 당시에 내가, 거기 아무리 나쁜 데지만 우연히 거길 잘 알아뒀다가 잘 했지.”


▶ <이룸> 사무실과 영자 언니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이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요.

 

“우리 집이 좀 먹고 살았어. 그런데 내가 다 망가뜨렸어. 일단, 이혼했잖아. 내가 지금 육십육살이니까 오십년생이지. 부모님이 결혼하고 육칠년이 지나도 애가 안 생겨서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따라 당기다가, 어떻게 우리 형제가 생겼대.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욕도 한 번 안 들어보고 컸어요. 쌀밥 먹고 보리밥이라고는 안 먹어보고. 학교 댕길 때 보재기 둘둘 말아서 여기다 이렇게 차던 시절에 난 빨간 가죽가방 메고 다니면서 고무신도 떨어진 거 안 신고 옷도 꿰맨 거 안 입었어. 그렇게 컸지. 우리 아버지가 나를 아들, 아들 하면서 완전히 남자같이 생각했어. 내가 요만한 말을 해도 다 인정을 해줬어. 그게 배짱을 길러준 거 같애. 내가 얼굴은 굉~장히 순진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속에 뭔가, 배짱이 있어. 지금도 나는 대통령 앞에 가서도 말할 수 있어. 못 배웠어도 경우와 일은 훤해요.”

 

-시골이었지만 집에서 귀한 대우 받으며 자란 딸이었군요? 옛날에는 드문 일이었을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가 딸자식이지만 날 얼만치 믿고 신뢰했던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당시에 열여섯 열여덟 이럴 때, 아주 바람들어가기 딱 좋을 나이였어. 도시에서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더라고. 게다가 얼굴, 시골에서 도시 갔다 오면 애들이 얼굴이 허얘가지고 더 이쁘게 하고 오는데, 시골에서는 아무리 씻고 닦아도 안 되니까 나도 올라가고 싶었거든. 아버지야 절대 안 된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아버지 땔나무 하러 간 사이에 애기 동생을 업고 집에서 편지를 두 장, 세 장을 꾸며서 썼어. 우리 초등학교 졸업한 친구가 서울에 가서 양장점엘 다니면서 나더러 올라오라고 부른 것처럼.

 

내가 지금도 편지를 잘 써요. 나도 글짓기 대회에는 좀 뽑혀 나갔었어. 동네 엄마들 신랑이 두들겨 패서 애들 두고 도망 나온 엄마들 편지를 써줬다니까. 내가 생각해도 나도 좀 희한한데가 있어. 평상시엔 어떻게 그렇게까지 했나 할 정돈데. 때로는 그런 게 나와, 나도 모르게. ‘아부지, 제가 한 번 가서 보고 뭐 아니다 싶으면 오고 일단 한 번 가볼게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알았다면서 차비를 해줬어. 그런데 나중에 우리 아부지가 엄마한테 그러더래. 그게 아닌 줄 알았다. 엄마가 ‘너, 그때 그저 아닌지 알면서 보냈다더라’ 하더라고.”

 

-남편은 어떻게 만나 살게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었는지, 결혼생활 얘기 들려주세요.

 

“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농사짓고 있으니까 동네서 결혼을, 시집을 가는 게 엄마를 도와주는 거래. 그래, 여자가 잘생긴 거 다 소용없어. 아무렇게나 생겨도 남편복만, 남편복이 최고인거야. 여자는. 그렇다고 해도 갈 사람도 없고. 가난하다보니 도시에 한 번 올라가서 뭐 좀 벌어서 시집을 가야되겠더라. 친척집 소개로 식모살이 갔는데 첫날 그 집 아들이 날 자기네 가게 카운터에 앉힌 거야. 난 얼씨구절씨구 따라가서 어디서 복이 들어와서, 난 지게 지고 낫 들고 들일을 하면 했지 부엌일 하는 건 싫어하는 사람인데 아유 잘됐다 싶었어.

 

가게 카운터를 보다가 남자를 하나 알았어. 그 사람이 애들 아빠가 됐지. 결혼하고 땅뙈기 요만한 것도 없이 식구만 많은 집에서 살다가, 겨우 살림 나가서 자식 낳아놓고 나니 애들 아빠는 장사한다고 까불고 기어 올라가서 안 내려오더라. 옛날에 OO동에 그런 여자들이 많았대. 전화로 부르면 여자가 오는 거야. 애들 아빠는 그거를 불러서 잠을 잔거야. 아효, 7년을 그 여자랑 붙어있었어 7년을. 내가 한 5년을 쫓아만 가면 이사하고, 쫓아가면 이사 가고. 그 경험을 하면서요, 형사 이상 돼요. 나는 속 썩은 것도 속 썩은 거지만, 그때 당시에 내 자신이 불쌍해. 별 정을 모르고, 무슨 남자로 보이고 존경스럽고 이런 게 전혀 아니었잖아. 그저 죽이 되나 밥이 되나 가서 엎드려서 그 고생을 하고 살았다는 게. 왜 그때 뭐가 뒤집어 쓰여서 아무것도 흐리하니 안보였을까. 지금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데. 다 내 복이다 싶지 뭐.”

 

-애들 아빠 때문에 속 썩다가, 결국 혼자 애들 키우려고 집결지로 가신 거예요?

 

▶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던 결혼 후의 인생.     © 이룸


“도시로 나갔다는 애들 아빠가 어딨는지도 몰라, 주위에서는 시집에 애 갖다 주고 새 출발하라고들 했지. 근데 어떻게 만들어진 새끼예요? 난 죽어도 그 짓은 못하겠으니까. 이 세상을 다 준다 그래도 못 바꾸지. 애 준 것만도 고마워서, 난 애만 주면 살겠더라고. 현찰도 없고 방을 얻어놔야 뭐라도 하겠구나 싶으니 OO집결지가 생각이 났어. 처음에는 OO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지. 예전 애들 아빠 고향 있을 때 쌀이 많이 나왔거든. 친척집 가서 소매를 해가지고 한 삼일 만에 팔았나봐. 다 팔고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갔는데, 막차가 끊어진 거야. 애들 아빠는 OO을 어떻게 알고 육교 건너가서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내려 가쟤. 줄줄줄 따라가서 보니까는 여인숙이야. 들어가 잤어. 그게 맨 그런 데(성매매 업소들)야 보니까는.

 

난 순진해가지고, 그런데는 맨 처녀만 있는 줄 알았어. 밤에 오줌 누러 가는데 아줌마들 죽 있더라고. 내가 아줌마, 결혼해서 애기를 낳았는데 이런 데 올 수 있나요? 올 수 있죠, 한 달에 얼마나 벌어요? 40-50만원을 안 벌면 이 생활을 안 해야죠. 그러니까잉 40-50만원 번다는 얘기야. 전에 라면공장 알아보니까 잔업을 밤새도록 해야 십오만 원이고 한 달에 십삼만 원이야. 애들 아빠 사라지고 살길 막막한 그때에, 애들은 시집에 맡기고 다음해 농사철 전까지 딱 3개월만 벌자 했어. 애들 자는 새벽에 첫차 타고 올라왔어요.”

 

-OO집결지에 갔을 때 상황은 어땠나요? 일 시작했을 때 기억하세요?

 

“서른다섯 살에, 날씬하니까는 할아버지하고 막 줄 섰어, 사람들이. 나는 어서 오세요 소리도 못하는데도 귀신같이 처음 하는 걸 알고 개나 소나 줄서댔지. 건달들이 다 덤벼요. 심장이 꼴딱꼴딱, 그 새끼들은 막 다마를 박아가지고(성기 표피에 구슬을 넣어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 얼마나 골탕을 먹이는지, 힘든지 알아요? 거기서 내색을 못해, 맞어죽을까봐. 힘 좋으면 막 허리 부러지게 한 시간 이상을 해. 아주 진이 빠지는 거지. 그래도 고만하란 소릴 못하는 거지. 맞아 죽을까봐, 어떻게 할까봐. 그 새끼들은 법도 안 무서운 놈들이여. 얼마나 살벌해요. 죽이는지도 모르게 끌고 가 죽여. 그렇게 살벌한 데서 살았네. 아유.”

 

-집결지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셨는지 알고 싶어요.

 

“피임약 먹는 걸 맨날 까먹어가지고 한 달 건너 하나씩 애를 세 개를 뗐어. 애 보고 싶어서 술을 밤낮으로 퍼먹고 울고불고하다가, 그냥 또 손님 들어오면 하나 받고. 뭐 피임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안나가지고 또 (애가) 걸리고. 한 달 건너 한 번씩 병원엘 가니까 무슨 기운이 그렇게 좋으냬, 병원 원장이, 한 달에 한 번씩 가니까는.

 

그렇게 한 3개월 벌었나. 거진 백만원 쥐고 있었나봐. 1등은 아니지만 중간은 가게 벌었어. 내 인상이 좋다고. 사람들한테 억지 쓰고 돈 달라고 막 이리 안하고, 그저 주는 대로 받고. 그 모은 돈이 방이 됐어. 갑자기 밤에 일을 하니까 난 졸려 죽겄지, 주인한테 욕도 엄청 먹고 울기도 엄청 울고. 주인은 존다고 난리 난리지. 그럼 혼자 저기 가서 대성통곡 울고. 우는 건 잘했어. 그것밖에 할 게 없어. 하늘이 노란지 파란지도 모르고 살았지. 어떻게 보면 OO집결지가 조금 나를 살려준 것도 있어. 못된 사람도 있었지만 거기 아님 내가 어디 가서 일을 하겠어?”

 

-그곳에서 일하면서 돈벌이는 괜찮게 되었어요? 얼마나 버셨는지 궁금한데…

 

“한 달에… 한 달에 몇 백 벌죠. 아, 한 번에 3만원인데 몇 백 벌기 힘들다. 3만원인데 주인하고 반 나누니까. 무조건 어디든지. 주인! 그걸 포주라고 부르잖아. 무조건 반타작. 그거는 정말 너무한 거야. 그리고 다섯 개(성매매 건수) 아래로는 주인이 계산을 안 해. 지네가 다 가져버려. 다섯 명을 넘겨야 그때부터 이제 하나로 계산을 해줘. 애들이 빌려서 하고 막 지 돈 집어넣고 그랬어요. 다섯 개 채우려고. 손님이 5명 넘어가야지 4명, 3명, 2명, 1명 받은 건 돈을 안준다고. 한 푼도 주인이. 그런 주인이 있었어. 다 그런 건 아니고.

 

원래는 거기서 먹고 자야 되는데, 밤에는 또 긴 밤이라고 자는 손님을 받잖아. 그건 액수가 많지. 그리고 또 좋은 손님 만나면, 밤 요금 받고도 또 딴 사람 받아. 못된 놈 만나면 거기서 죽으나 사나 엎어져 있어야 되고. 우리 같은 경우는 아침에 갔다 저녁에 딱 와야 되기 때문에 일주일 근무해봐야 큰돈 못 벌지. 그리고 OO집결지에 종업원이 수백 명이었다는데 손님들이 다 나한테만 오냐고. 그래선지 많은 돈은 못 벌었어요. 한 달에 얼마 버는지 따져볼 새도 없어. 나 지금 솔직히 몰라. 신랑은 가끔 나타나서 돈 가져가고, 맨날 빌려서 이자 주고 뭐 일수 찍어야 되고, 고틈에 무얼 어떻게 해.”


▶ 집결지는 허물어지는 중이다. 청량리 성매매집결지 기록화 작업 <불온한 확신, 끝나지 않은 천일야화> 중 ©이룸

 

-이자 갚으랴, 신랑 돈까지 대주랴, 쉴 새가 없었겠어요. 쉬는 날이 따로 있었나요?

 

“쉬는 날 따로 없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 손님이 많았어요. 내가 힘들거나, 손님들하고 문제가 생기면 좀 쉬거나, 아니면 주인하고(문제가 생기거나). 주인은 종업원들 뜯어먹지. 어리숙하고 순해터진 애 들어오면 이거 사라, 저거 사라 해가지고 다 챙기고. 대부분이 그렇지. 어떻게든지 벗겨 먹으려고 눈이 빨개서 앉아있지. 아유, 주인들 너무 추접스러워. 그렇게까지 세상을 살고 싶을까. 그러니까 (주인이 사라는 건) 다 사야 돼. 약 사 먹어야지, 화장품 사야지, 옷 사 입어야지. 옷이야 뭐 하나둘 사서 그냥저냥 입음 되지만. 손님한테 3만원 외에 돈 만원 받으면 그걸로 차비라도 하는데 그걸 주나. 안 줘요.

 

젊은 애들은 주인을 언니라고 많이 부르더라고. 엄마, 언니. 난 그런 데 가선 엄마, 언닌 안 해. 엄마라는 존재는 거의 엄마 수준에 가야 엄마고, 언니도 그렇지. 나는 그냥 아줌마. 아줌마밖에 더 돼? 밥해주는 것 밖에 더 있냐고. 돈 벌어서 우리가 다 먹여 살리는데. 주인은 집 제공, 종업원들은 몸 제공, 이렇게 해서 반타작인데.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경우를 따지고 그러다보니까 주인들한테 쩔쩔매고는 안 살았어. 그리고 난 아주 새파란 나이엔 안 들어갔잖아.”

 

-집결지에서 일한다고 해도 하루 종일 그곳에서 보낸 것은 아니잖아요. 집결지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나간다거나, 그런 활동도 하셨는지…

 

“(집결지 밖) 모임은 안 다녔어요. 난 그냥 아주 거기는 완전히… 이런 세계하고는 다르니까, 아주 등질라 그랬지. 또 마음이 허락도 안하고. 그런 데(집결지) 내가 가서 있다는 거 자체가 이런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만나는 걸) 마음이 허락을 안 하더라고. 아무래도 어렸어서 그런가봐. 지금은 뭐 여기가 됐든 저기가 됐든 내가 얼마든지 소화시킬 수 있지만 그때는 ‘아, 내가 거기 이런 데를…’ 인생 최고 막바지라고 그러잖아. 인생 최고, 밑바닥이라 그러니까 거기를. 그렇게 떠들고 살았어, 거기서. 인생 최고 밑바닥이다 우리는.”

 

-손님들 중에 기억 남는 사람 있으세요?

 

“나는 (손님을) 가려서 받았죠. 나는 쌈도 안 해봤거니와 싫은 소리하기 싫어서… 왜냐면 싸우다가 시팔년 저팔년 하면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문신하고 이상한 사람 오면 얼른 잠가버리고 ‘없어요, 없어요’ 하고 도망가 버리고. 손님 들어와서 쌈 나면 얼른 (돈을) 줘버려, 가지고 가라고. 한 시간씩 두 시간씩 고생하고도 난 그냥 줬어요. 돈 주면 아무소리 안 하고 가니까.

 

문 잠그고 들어가기 때문에, 거기서 목을 졸라도 꼼짝 못한다고. 또 달래는 거야. 들어오자마자 일어나면 또 욕을 욕을 먹으니까, 어느 정도 해주고 ‘일어나봐라 내가 다시 이렇게 할게’ 이러고서 무서우니까 얼른 옷 벗은 채로 뛰어나갔어. 아주 이상한 종자들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 아 그랬더니 또 못했다고 돈 달래, 지가 내놓고. 멀쩡하게 생겼는데도 그러대. 내가 얼마나 싸우기 싫어서 고르는데도…. 그럴 때는 얼른 내가 미안하다고. 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하다보면 눈물이 막. 울면서 ‘미안해 미안해’ 하고 벌떡 일어나야지. 지금 생각하니 또 무섭네,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았는지 무서워.”

 

-억울한 일, 무서운 일 당할 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신고를? 거기 사람들이 거기(경찰)하고는 안 해. 웬만한 건 신고를 안 하고 이제 정 하다 하다 안 되면…. 그래도 (신고하면) 주인도 같이 넘어가니까 될 수 있음 안하지. 주인도 그거 사채? 사측? 그걸로 넘어가야 되잖아.”

 

-다른 돈 벌이도 해보셨어요?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궁금해요.


▶ 영자 언니는 집에 있지 않고 항상 밖으로 나선다.   © 이룸


“애들이 크면서 다른 일로 몇 번 바꾸기도 했어, 쭉 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돈도 더 못 벌었나봐. 어쩔 때 보면 이게 아니다 싶고, ‘에이 정상적으로 살아야지’ 이러면 제정신 들어서 때려 치고 나와. 이제 못된 손님 만나서 막 욕하고 지랄할 때 아주 오만 정이 떨어지는 거야. 못된 놈이 많아요. 인간이 아닌 게 많아. 특히 그런데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데가 아니고, 니네들은 막 해도 된다는 그런 거 때문에 그런지, 뭔 욕을 막 뭔 년아 뭔 년아. 시팔년 하면서 욕할 때면 ‘그래, 내가 시팔년이지’ 하면서… 그리고 며칠 안 나가.

 

OO집결지 나와서 목욕탕, 그 찜질방 청소를 많이 했어요. 거기서 먹고 자야 돼. 왜냐면 밤 12시, 11시에 손님이 들어오면 우리가 그걸 1시, 2시에 또 치우고 자야 돼. (주인이) 한 일주일 하는 거 보더니 원래는 120 준다고 했었는데 130을 주겠다고 하더라고. 나는 정말 어디가든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양심적으로 살았다는 거. 우리 집에서 잔소리 안 듣고 커서 요만한 말도 들으면 싫거든. 그니까 딱 가자마자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찜질방 분위기 파악을 해요. 그래서 거의 그 수준까지 해주는 거야. 팔떼기가 빠지거나 말거나잉.

 

찜질방 청소도 또 한 번에 쫙 한 게 아니고, 한 7개월 하고 또 한 달 쉬어야 돼, 너무 힘드니까. 7-8개월 견디기 힘들어요. 한 달에 두 번만 쉬고. 그러니까 일 년 못해. 대부분 다 길어야 7-8개월이야. 그럼 이제 또 한 달 쉬어. 한 달 쉬다가 이제 돈 없지? 또 막상 들어갈 데가 없지? 그럼 천상 도로 가는 거야. (웃음) 병원 식당이며 학교 식당이며 그런데도 많이 있었어요. 안 해본 게 없네, 죽으나 사나 한 군데만 해야 되는데. 옷장사도 했었어요. 그것도 꾸준히 못하고 딴 걸 또 했을 걸? 뭘 내가 꾸준히 못하나봐, 지금 생각하니까.”

 

-최근에 다른 집결지에도 가셨다고 들었어요. 거기선 어떻게 지내셨는지…

 

“△△에는 작년 1월 달엔가 두어 번, 일주일에 한두 번 갔었어. 거길 가려면 집에서 밥 먹고, 뭐 찍어 발라야지, 씻어야지. 가보니까 두 시간 걸리더라고. 아홉시에 나가도 11시지? 두개 받고 3만원 벌어 와야 돼. 차비 하면 뭣이 남아. 거까지 가도 아예 (손님이) 없는 날도 있어. 그니까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야. 하루 세 개, 네 개만 한대도 기를 쓰고 가겠는데, 없대.

 

집결지에서 결혼해 나간 사람들이 또 들어오거든? 헤어져서 들어오는 거야. OO에서 뭘 했느니, 몸을 팔았느니. 싸우고 그런 얘길 해서 헤어지고 또 들어와. 남자들은 싸우면서 거기 얘길 다한대 그냥. 거기서 했다는 둥, 그런 년이라는 둥. 근데 신랑은 그런 데에 관심 없거든. 거기 있는 언니들 만나고 통화하는 건 (신랑) 없을 때 하는 거지. 이 사람이 나를 알려고 하면 끝나는 거야. 지도 이걸 유지하고 싶으니까 꼬치꼬치 안 캐는 거지.”

 

-영자 언니는 지금도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러 다니시잖아요. 그 일은 어때요?

 

“젊음이 좋지. 젊음이 돈이에요. 나이 먹으면 그렇게 가치가 없어져. 난 어제도 알바 가서 그 생각했어. 이 알바는 내가 10시 40분에 나가서 5시에 집에 들어 왔는데 5천500원 벌어. 이게 뭐야? △△집결지를 가면 하나를 해도 1만5천원은 갖고 와. 차비 2천원 빼고도 돈 만원은 들고 와. 이러니 △△집결지가 또 금방 생각나더라고. 똑같은 돈이면 알바를 하지. 1만5천원 아니고 8천원, 9천원 줘도 알바로 가. 왜냐하면 거기는, 나도 거기서 살았지만, 어디 가서 인정을 못 받아요.

 

옛날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갔고, 나 같은 경우는 거기가 괜찮았던 데지. 아기들 데리고 어디 가겠나? 근데 지금은 내가 나이도 있거니와 밥을 못 먹고 이런 게 아니니까. △△집결지, 이런 데까지는 안 해야 하는 게 원칙인 건 알지만, 체력이 안 따라주고, 식당도 맨날 내 자리가 있냐고. 찜질방 청소도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고. 맨날 아파 죽겠는데 어떻게 하냐고. 아파서 맨날 주무르고 다녀 이렇게.

 

옛날에 OO집결지에 있을 때 얄미운 년이 ‘우리 신랑이 한 달에 200을 갖다 주는데’ 그러는 거야. (그 여자가) 간 다음에 세 명이 모여 앉아가지고 ‘미친, 200만원만 갖다 주면 이런 데 안 나온다’ 그랬거든. 그런데 돈이라는 건 끝이 없어. 내가 몇 십억 재산가는 아니잖아. 몇 억도 없잖아. 겨우 어떻게 해서 사는 것뿐이지. 난 집도 없어. 이 일 다시 하는 건 아닌 걸 알지만 돈 떠올리면…. 내가 선택해서 가는데, 중요한 건 뭐냐. 없는 돈이 생기고 바보가 달라지고 이건 아냐. 없는 집이 생기는 건 아냐. 사주팔자가 달라지는 건 아냐. 과부로 살 팔자면 과부로 살아야 되고. 교회 다녀도 팔자는 못 바꿔. 하느님의 하느님도 못 바꾸고 부처님의 하느님도 못 바꿔.”

 

-언니 얘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지금까지 돌아본 언니의 삶에 대해서, 전성기는 언제였는지,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살 계획인지 말씀해주세요.

 

▶ <영자의 전성기, 꿈>       © 이룸


“내 전성기는… 어려서 미술학원 다녔을 때. 그때는 이 세상이 다 내꺼 같이. 보이는 게 없었지. 니미랄 놈의 중간 팔자가 거지 팔자라, 돈이 있어 쌀이 있어 신랑은 이렇게 생겨. 살아오면서 틈틈이 생각할 때 ‘내가 타고난 사주팔자를 살았구나’ 하면서, 한 가지 잘한 건 뭐냐. 그래도 엄마로서 100프로 잘 하진 못했지만 책임감은 다했다는 거. 딸들한테. 1원 한 장 없는 상태에서 초등학교 졸업도 가다 말다 하는 상태에서, 인간적인, 엄마로서의 책임을 어느 정도 했다는 거. 어디 가서 내가 자랑스러워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았지만, 사람은 벌여놓은 일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거.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어요. 배운 것도 없이 뭐가 뭔지 세상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판단을 했다는 거. 정말 잘한 것 같고. 이 시간 이후부터는 할 게 뭐냐, 딸들 힘들게 안하고. 그냥 이 선에서 건강하고, 80까지 살면서 자식들 힘들게 안하는 거. 나 건강한 거. 그냥 이 생활이 그냥저냥 잘 지내잖아. 그게 재미지. 뭐, 남이야? 그놈의 내 식구 해먹이는 게 뭐 힘들다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뭐해. 몸에 쓰잘데기 없이 공상만 들어가지. 내가 조금만 꼼지락거리면 다 잘 먹고 좋아하잖아.”

 

영자 언니와 인터뷰를 마치고

 

노년여성을 일러 ‘억척스럽다’고들 한다. 영자 언니 첫인상도 그러했다. ‘가만히 있으면 뭐하나, 가서 떠들면 얼마라도 벌지!’ 이것이 언니가 <이룸>의 인터뷰에 응한 이유였다. 인터뷰에 대한 소정의 사례비를 드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경우와 이치에 밝은’ 영자 언니에게 돈이란 현실의 다른 이름이다. 돈은 독립이고, 양육이고, 딸들 앞에서의 체면이고, 손주의 미래이고, 언니의 노후 대책이다. 그렇게 돈을 여러 이름으로 번역할 수 있었을 때에야 영자 언니의 첫인상이 입체적으로 만져졌다.

 

이 사회는 육십육세 언니 평생에 주거, 건강, 양육, 교육, 삶의 질까지 모든 짐을 지워놓고는 돈 이외의 다른 이름을 알린 적이 없었다. 영자 언니는 삶을 꾸리기 위해서 돈을 벌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성매매 일을 했다. 그러니까 성매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언니의 삶을 들어야 했다.

 

기록을 마무리하며 기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언니가 오래 살아온 동네에서 만났다. 영자 언니는 자신의 공간에 들어선 우리에게 느긋하면서도 주도적으로 장소를 소개했다. 날마다 어떻게 산책을 하는지, 예전에 살던 집과 지금 사는 집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재개발 소식 등등. 도를 아시냐며 다가온 사람에게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분명히 말하기도 하셨다.

 

대화의 말미에 십이지(十二支)에 얽힌 신화를 들려주며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모르지” 라고 말하는 언니는 문득 아득한 시간 속을 걸어온 존재 같았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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